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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206)화 (206/234)

아스달은 흰색 제복을 착용했는데 에녹은 검은 제복을 입고 있어서 두 사람이 더욱 대비가 되는 형국이었다. 에녹이 우람한 체격에 전쟁영웅다운 기백이 있기에 화려하고 곱상하며 우아한 느낌의 아스달과는 분위기도 달랐다.

성격도 그렇고,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다 반대긴 하네.

“공작부인께서 이쪽에 그대가 있을 거라 일러주던데.”

내게 다정히 말한 에녹의 시선이 아스달에게 향할 땐 사납게 일그러진다.

“불청객이 있었군.”

아스달은 밉살맞게 어깨를 으쓱였다.

“불청객은 그쪽 같은데. 우리 지금 좋은 시간 보내고 있는 게 안 보이나 보지?”

좋은 시간은 아스달 혼자만 보내고 있었던 것 같지만, 여기서 그런 말을 하면 또 귀찮게 굴 게 뻔하니 조용히 해야겠다.

“아가씨!”

이번엔 바네사가 아닌 다른 하녀가 찾아왔다. 로즈메리의 하녀, 미아였다. 바네사가 자리를 비워 급박하게 그녀가 온 듯 보였다.

“마탑주님께서 방문하셨어요!”

미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닥에 복잡한 수식의 마법진이 그려졌다. 이윽고 마법진에서 환하게 빛이 기둥처럼 솟아오르며 시야를 잠식했다.

잠시 뒤 빛이 사그라들었을 땐, 마법진 위에 휘황찬란한 마법사 로브를 둘러맨 카이든이 서 있었다.

파티에 참석할 목적으로 와서 그런 건지 몰라도 세 남자가 모두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를 정도로 호화찬란한 차림들이었다.

“아 XX, 눈 버렸네. 공작부인께서 마거릿이 여기 있다고 해서 온 건데 이 시커먼 놈들은 뭐야?”

“로드, 지금 그거 우리보고 한 소리인가?”

“황족 모독으로 죽고 싶은가 보지.”

카이든의 욕설에 아스달과 에녹이 차례로 대거리했다.

어머니는 왜 하필 이곳으로 이 남자들을 한꺼번에 안내한 걸까. 처음으로 어머니가 원망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대체 다들 왜 이렇게 일찍 온 거예요?”

하필 이번 파티는 내가 주인공이라 준비할 것도 많아 바빠 죽겠는데!

나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 * *

마법사는 고급인력이고 그 수가 많지 않다. 고급인력인 만큼 사회에 이바지하고 있는 일들이 많아서 무척 바쁘기에 일상 속에서 그들을 보기란 쉽지 않았다.

천 년 전에는 그렇지 않다고 들었는데, 세월이 흐를수록 마법사의 수가 점차 줄고 있는 형국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하여 플로네 공작이라는 대단한 권력을 갖고 있어도 마법사를 가문 내에 사사로이 고용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사실 카이든이 일찍이 방문해준 건 고마운 일이었다. 플로네 공작 성에 미리 결계를 쳐두기로 했으니 말이다.

카이든과 단둘이 제나스 얘기를 좀 해봐야 할 것 같은데.

하지만 하다못해 에녹이나 아스달과도 따로 얘기하기가 눈치 보였다. 플로네 공작 성에 돌고 있는 흉흉한 소문 때문이었다.

공작 성의 사용인들이 ‘마거릿의 남자들’이라는 괴상한 이름까지 붙여서 자기네들끼리 내기를 시작했다던데…….

“마거릿의 남자들이라니, 그 괴상하고도 남사스러운 명칭은 뭐야? 누가 지었어? 그리고 무슨 내기인데?”

내 물음에 카펫에 엎드려 은지와 놀아주던 로즈메리가 고개를 들었다. 저 고고하고 격식 따지는 로즈메리가 카펫에 엎드려 있다니, 놀랄 일이다.

은지가 로즈메리랑 놀면서 신난 얼굴로 꼬리를 흔들다가 그녀와 함께 나를 올려다봤다. 이런 와중에 귀엽다, 둘 다.

“세 남자 중에 누가 네 선택을 받을지 내기 하던데? 재미있어 보여서 나도 했어.”

“뭐?”

“나는 왕세자 저하가 좋더라. 개인적으로 내 취향이야. 뭔가 딱 여유롭고 우아한 어른 같잖아.”

“네 취향 안 궁금해.”

“이니스는 로드에게 걸었던데? 어머니는 황태자 전하를 좋아하시고 아버지는 그 얘기 듣고 방에서 나오질 않으셔.”

나는 잠시 골이 아파서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아버지는 우리 세 자매의 남자 이야기를 별로 좋아하시지 않으시니, 괜히 관심 받으시려고 그러시는 것 같았다. 왠지 아버지에게서 루제프의 향기가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곧 파티가 열릴 텐데, 그때 되면 알아서 나오시겠지.

“마거릿 아가씨. 로드께서 곧 성 주변으로 결계를 치실 거라고 소식을 전해 달라 하시네요.”

때마침 바네사가 와서 반가운 소식을 전했다. 잘됐다. 이참에 카이든과 제나스 얘기를 해봐야지.

나는 은지를 챙겨서 로즈메리와 함께 플로네 공작 성의 정원으로 나갔다. 그곳에 어머니와 이니스, 에녹과 아스달도 모여 있었다.

로즈메리가 아스달을 보고 반가운 얼굴로 쪼르르 그에게 달려가서 이것저것 말을 걸었다. 제법 귀찮게 굴었는데 아스달은 생각보다 친절하고 다정하게 로즈메리의 말에 하나하나 답변을 해주었다.

카이든은 자신이 데려온 마법사들을 지시하며 마법 수식을 바닥에 그리고 있었고 이니스는 학구열에 불타는 얼굴로 그 옆에 붙어 마찬가지로 질문 공세를 하고 있는 듯 보였다.

어머니는 에녹의 옆에서 품위를 지키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말이다.

“결계를 어떻게 치는 거야?”

나는 카이든에게 다가가 마법 수식을 보며 질문했다. 카이든은 진지한 얼굴로 마법진을 보고 있다가 나를 흘끗 보았다.

“보호 결계랑 무장해제 마법을 동시에 걸어둘 거야.”

“무장해제 마법?”

“보호 결계로는 부족할 수도 있어서. 이 안에선 마력을 쓸 수 없도록 이중 결계를 치는 거지. 파티가 끝나면 해제할 테니 걱정 마.”

카이든이 내 머리를 토닥이며 말했다. 그러자 그와 동시에 갑자기 정적이 흘렀다. 뭐지?

고개를 돌리니 나를 빤히 바라보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고개를 돌린다. 못 볼 것을 봤다는 듯이.

에녹과 아스달만이 우리를 빤히 바라보다가 다가왔다. 에녹은 말없이 나와 카이든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고 아스달은 신기한 걸 보듯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가 극렬히 기피하는 얼굴로 그를 올려다봤지만 아스달은 아랑곳하지 않고 싱긋 미소 지었다.

“분위기가 왜인지 나도 이래 줘야 할 것 같더군. 상황이 매우 재미있어. 역시 일찍 오길 잘했지 뭔가.”

물론 그것도 에녹에게 금방 손이 붙잡혀 치워졌지만 말이다.

아무튼 결계를 다 치고 나면 카이든과 대화를 나눌 시간이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 사이 파티의 주인공이었던 나는 끔찍하게 바쁜 일정이 연달아 기다리고 있어 자리를 떠야 했다.

에녹, 카이든과는 제나스가 했던 의미심장한 대화에 관한 얘기도 빨리 해야 하는데…….

* * *

드디어 대망의 생일파티 하루 전,

손님들이 속속들이 영지에 도착하기 시작했다. 멀리서 온 손님들을 위해 정리한 손님방이 꽉 찼을 정도다.

에녹과 카이든, 아스달이 일찍이 공작 성에 왔음에도 그들과 개인적으로 대화를 나눌 시간이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파티 하루 전이 다가오니, 일정에 여유가 생겼다. 하루 종일 춤 연습을 하고 기진맥진해서 방에 누워 있는데, 카이든이 직접 나를 찾은 것이다.

그래도 보는 눈과 듣는 귀가 많아 방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무리다. 나는 결국 카이든과 함께 살롱으로 자리를 옮겼다.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로 소파에 널브러진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많이 피곤해?”

그런 내게 다가온 카이든이 내 이마에 손을 얹었다.

“무리하는 것 같은데.”

“적응해야지. 이제 이게 내 삶인데.”

카이든은 내 옆자리에 앉아 소파에 널브러진 나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그가 가만히 손을 뻗어 내 머리카락을 조심히 쓸어넘기며 정리를 해줬다. 귀에 닿는 손길이 간질거렸다.

“마거릿.”

“으, 응?”

조금 어색해서 나는 그만 살짝 말을 더듬었다. 카이든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와 결국 몸을 일으켜 앉았다. 얼굴이 화끈거린다.

“미안해.”

그러나 이어지는 갑작스런 사과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놀라서 눈만 깜빡이며 그를 쳐다봤다.

“이젠 널 좋아한다고 말 못 하겠어.”

“……어?”

“제나스가 계속 네게 찾아가잖아.”

카이든이 깊고 고요하게 가라앉은 눈을 하고는 대답했다. 그의 얼굴에 그림자가 졌다.

그는 내가 쉽게 공감할 수 없는 고독감에 젖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밤마다 그가 널 찾아가는 건, 평소의 내가 할 법한 행동이라는 거지. 제나스는 그 안에서만 행동할 수 있도록 제약이 걸려 있으니까.”

“그거 너무 비약 아니야? 애초에 범위가 너무 모호하잖아.”

“아니야, 난 알아. 나 때문이야.”

“너 때문이 아니야.”

내가 그렇게 단호히 선을 그었음에도 카이든은 내 말을 납득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는 그저 나를 보며 서글프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서글픈 미소라니 이런 말도 안 되는 문장도 있나 싶었지만 카이든의 얼굴이 딱 그랬다.

“난 괜찮아, 정말이야. 제나스가 찾아오면 뭐해. 그가 위협적인 것도 아니잖아.”

카이든의 얼굴이 괴롭게 일그러졌다. 그가 한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고단한 한숨을 토해냈다.

“내가 안 괜찮아. 그리고 마거릿, 그 녀석이 무슨 헛소리를 하든 귀담아듣지 마.”

카이든이 내게 경고하듯 말했다.

“천년 동안 그 X 같은 실험을 계속해온 XX야. 알지? 제정신 아닌 놈이라고.”

“……내가 제나스를 믿겠니?”

믿는 게 아니라 의심하는 거다. 제나스가 허구의 말을 지어내는 놈은 아니었으니까. 그가 하는 헛소리를 통해 알아내고 싶은 정보들을 유추하고 추리한다고 하는 게 더 맞겠지.

나는 챙겨온 제나스의 연구일지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이거 너도 읽어봤어?”

“어? 아니.”

“읽어봐. 알레아 섬 얘기가 몇 줄 있기는 하더라. 그리고 제나스가 거기에 차원 너머 생명체에 관한 메모를 적어놨던데…….”

“차원 너머 생명체? 그건 혹시 너에 대해 말하는 거야?”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그가 찾던 생명체가 아무래도 날 말하는 것 같은데, 제나스가 그래서 나한테 이렇게 집착하는 건가 싶기도 해. 정확히 그가 뭘 하려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말에 카이든이 더욱 심각해진 표정으로 말이 없었다. 혹시 제나스가 무슨 말이라도 하고 있는 걸까?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지만, 딱히 그런 건 아닌 모양이다.

“그건 내가 좀 더 알아볼게.”

다행인 건, 카이든이 제나스를 통제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나는 그의 대답에 조금 안심했다.

“마력석에 대해선 그쪽 세력에 발을 걸치고 있던 빌터하임 공작이 잘 알 것 같은데, 이번 파티에 참석한다고 했지?”

카이든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도에서 내려오는 거니까, 아마 내일 연회장으로 바로 오실 것 같아.”

내 말에 카이든이 알겠다며 대답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혀 그답지 않았다. 정말로 용건만 해결하고 가다니.

“왜?”

카이든이 뭐가 문제냐는 듯이 나를 쳐다봤다.

그는 정말 제나스 때문에 나와 거리를 두려고 작정한 것 같다.

카이든이 이만 나가자며 살롱의 문을 열었지만, 냉정한 얼굴의 그를 보고 있자니 어쩐지 조금 얼어서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마거릿?”

“먼저 가. 나는 좀 더 여기 있다 갈게.”

나는 어색하게 그를 향해 미소를 지어보였다. 잠시 나를 빤히 보던 카이든이 이윽고 알겠다며 문을 닫고 떠났다.

친구도 제대로 사귀어 본 적 없는 내가 이런 의문 모를 무거운 감정에 대해 제대로 알 리도 없고 감당할 수 있을 리도 없다.

혼자 남겨진 넓은 살롱 안에서 나는 그렇게 하염없이 혼자 서 있었다. 이 복잡하고 어지러운 감정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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