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205)화 (205/234)

* * *

아스달과 응접실로 이동하는 내내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설마 스캔들이 터지진 않겠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에녹과 카이든이 오해만 하지 않도록 상황을 잘 설명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아스달을 쳐다봤다.

우리는 응접실에 마주 앉은 채였는데, 나와 달리 아스달은 매우 기분이 좋아 보였다.

“보고 싶었다네, 영애.”

그 말에 나는 들고 있던 쿠키를 파삭 부쉈다. 아스달이 놀라서 손수건을 들고 와 내 드레스 위로 떨어진 쿠키 가루를 털었다.

“영애는 칠칠맞지 못하군. 손수건은 없나?”

“없어요. 깜빡했네요. 아직 그런 데에 익숙지 않아서.”

“그거 문제가 꽤 심각한 것 아닌가.”

“심각한 정도는 아니에요.”

그때 테이블 위에서 쿠키를 야금야금 먹던 은지가 고개를 들었다. 녀석의 입가에 쿠키 부스러기가 잔뜩 묻어 있었다.

주식은 마력인데, 은지는 그것 말고도 아무거나 다 먹었다. 나는 조용히 녀석의 입가에 묻은 쿠키 부스러기를 털어주었다. 이런 것도 주인을 닮는 건가?

아스달이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어앉은 채로 반박했다.

“아니야. 이건 심각해. 귀족이 손수건도 들고 다니지 않는다니.”

그가 어린 동생을 나무라듯이 내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벌써부터 피곤해지기 시작했다.

성가신 얼굴로 그를 쳐다보고 있을 때, 응접실 문이 열렸다.

“에그머니나!”

티세트를 준비해왔는지 쟁반을 들고 들어오던 하녀가 놀라서 문 앞에 멈춰 섰다. 아스달이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드레스를 정리하는 걸 본 탓이다.

나는 민망한 얼굴로 의자를 들고 아스달에게서 멀찍이 떨어졌다.

“손수건은 고마워요.”

아스달이 황당한 얼굴로 나를 보다가 하는 수 없다는 듯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는 놀라 굳어 있는 하녀를 향해 말했다.

“뭐하는 겐가. 차는?”

아스달의 말에 하녀가 화들짝 놀라서는 황급히 우리 테이블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우리끼리 은밀하게 할 얘기가 있으니, 대기할 필요는 없고 나가보게나.”

“네, 네?”

“영애네 가문 사용인들은 다들 이리 영애처럼 어리버리한가? 그게 귀여워 보이는 건 영애 한정이니, 사용인들 교육은 잘 시켜야겠군.”

“그러는 헤스티아 왕국 사람들은 전부 저하처럼 뻔뻔한가 보군요. 사용인의 무례는 대신 사과드리죠.”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우리의 대화를 듣던 하녀가 기어코 무릎을 꿇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나가보라며 손짓했다. 아무런 처벌도 없었던 것이 의외였는지 하녀는 크게 감동 받은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는 우리에게 연신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는 응접실을 나갔다.

“흠. 차 맛은 아주 좋아.”

“여전하시네요. 평가하는 습관.”

“내 지위가 원래 그래. 무엇이든 평가를 내려야만 하지. 내가 이래 보여도 상당히 예민한 사람이야. 그러지 않으면 잡아먹히기 십상이거든. 왕실에선.”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혀서 입을 다물었다. 적통 왕세자라고 해서 마냥 편하게만 산 것은 아니었나 보다. 물론 나라의 정점에 서 있는 자의 삶이 어찌 고달프지 않을 수 있겠냐마는. 아스달은 그런 건 전혀 생각하지 않고 사는 줄 알았다.

“이렇게 일찍 방문하신 이유가 정말 업무에서 벗어나고 싶으셨기 때문인가요?”

“흠. 그것도 상당한 이유를 차지하긴 했지.”

애매한 대답을 보아하니, 역시 다른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우선 이것부터 전해주도록 하겠네.”

아스달이 재킷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마법으로 봉인된 상자였다. 나는 얌전히 그것을 받아들었다.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진다.

“마력석이군요.”

아스달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왕실에 복귀했더니 아주 엉망이더군. 국고를 많이들 헤쳐 먹었던데, 싹 갈아엎느라 힘 좀 썼지. 마력석도 겸사겸사 찾아내고.”

헤스티아 왕국에 피바람이 불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었는데, 그때 일을 말하는 것 같았다.

“모란꽃 문양을 가진 이들은 잡아서 감옥에 보냈다네. 처분은 좀 더 고민해봐야겠더군. 별 것도 아닌 놈들이……. 하…….”

아스달은 짜증스럽게 미간을 꾹 누르며 고단한 숨을 뱉었다. 그쪽도 잔챙이만 있었는지 문제가 쉽게 해결된 모양이다.

“그 마력석은 왠지 그냥 들고 있기는 찜찜해서 영애의 조언대로 마법을 걸어 상자에 봉인해뒀네.”

유안나는 성녀라서 괜찮았는지 모르겠지만, 아스달은 혹시 모르지 않는가. 그래서 그에게 마력석을 봉인해서 보관하는 게 좋겠다고 급보를 보냈었다. 편지를 받은 아스달이 착실히 내 말을 따른 모양이다.

“고생하셨어요.”

나는 조심히 상자를 열어 마력석을 확인하고는 대답했다. 그러자 아스달이 콧바람 쐬는 것만큼이나 별 것 아니었다며 으스댔다. 하여간에.

그런 그를 보며 웃다가 나는 드레스 주머니에서 상자 하나를 꺼내어 뚜껑을 열었다. 그곳엔 유안나가 전해 준 마력석 2개도 함께 들어있었다. 나는 아스달이 준 상자 안에 마력석 3개를 한꺼번에 담았다.

턱을 괴고 나를 지켜보던 아스달이 물었다.

“바로 파괴하지 않고 보관해둔 건가? 반황이 전해준 편지에 따르면 영애의 애완뱀이 그걸 파괴할 수 있다고 하던데.”

“그게, 은지가 요즘 무리를 하는 것 같아서요. 그리고 이게 은지에게 부담이 되는 거면 어떡해요?”

나는 생각이 많아 복잡한 얼굴로 상자 안에 든 마력석을 노려봤다. 로즈메리가 공수해온 약초를 먹고 나선 팔팔해지긴 했지만, 아직은 모르는 거다. 은지는 말을 할 수가 없으니까 내가 더 세심하게 녀석을 살펴야 했다.

“이미 두 개는 먹었다고 하지 않았나. 그땐 괜찮았던 것 아닌가? 영애의 애완 뱀이 먹기를 싫어하는 겐가?”

“아뇨. 먹기를 싫어하는 건 아닌데…….”

은지는 제 이야기를 한다는 걸 아는지 고개를 들고 나와 아스달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러더니 내 손에 들린 상자 앞을 기웃거렸다.

은지는 마력석을 먹고 싶어 했다. 마력을 응축해 만든 마력 결정체여서 그런 걸까. 그래. 그냥 걱정하는 건 나 혼자지.

“신중한 것은 좋아. 하지만 생각이 지나치게 많으면 그게 화를 부르기도 해. 적정한 때를 놓치기도 하고 말이지.”

아스달이 뼈를 때리는 말을 했다.

그때, 은지가 머리로 내 손을 툭 쳤다. 그 바람에 나는 들고 있던 상자를 테이블 위에 떨어트렸다. 상자 안에서 마력석 3개가 데굴데굴 굴러 나왔다.

은지가 크게 입을 벌리더니 순식간에 마력석 3개를 먹어 치워 버렸다.

“은지야!”

깜짝 놀란 내가 녀석을 잡아 등을 두드렸지만 녀석은 기분 좋은 얼굴로 혀를 날름거리다가 꺼억, 트림을 했다.

“너 언니 말 안 들을래? 언니는 걱정돼서 그런단 말이야, 걱정돼서!”

그러나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은지는 사춘기 아이처럼 뿔난 얼굴로 꼬리를 테이블 위에 두드리며 성을 냈다.

“하하하! 하하하하하!”

아스달은 뭐가 그렇게 웃긴지 눈물까지 흘리며 좋아했다.

“역시 주인 닮았어. 화끈해.”

화르륵. 은지가 아스달의 말에 화답을 하듯 입에서 작게 불을 뿜었다. 그리고는 기분이 좋은 얼굴로 테이블 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거봐, 괜찮네.”

“일단 보기엔 그렇긴 한데…….”

나는 은지의 턱을 톡톡 두드렸다. 그러자 은지가 기분 좋은지 혀를 내민 채로 눈을 감았다.

벌써 마력석을 5개나 먹어치웠는데, 녀석은 그럼에도 멀쩡했다. 이쯤 되니까 나는 의문이 들었다.

은지는 정말 정체가 뭘까?

“아, 내가 마력안을 가지고 있는 것 알지? 이 눈으로 마력의 흐름을 볼 수 있는 것도.”

아스달이 안대를 쓰지 않은 눈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파랗고 영롱한 눈동자가 반짝거린다. 마력안이라고 듣고 봐서 그런지 몰라도 눈 색이 참 예뻐 보였다.

“한쪽밖에 없어서 좀 약해졌지만, 그래도 마력을 볼 수 있기는 하거든. 일단 내가 보기엔 이 녀석의 마력 흐름은 양호해. 문제없는 것 같군.”

그제야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스달이 그렇다고 말한다면 정말 그런 것이다. 그의 마력안은 믿을 만했으니까.

“아마 녀석이 영애에게 각인을 해서 일반적인 마물들과는 다른 기운을 풍기는 게 아닌가 싶은데.”

“인간에게 각인을 하면 다 이런가요?”

“아니, 정확히는 영애에게 각인을 해서지. 영애의 영혼은 이쪽저쪽 섞여 있지 않은가. 그래서 마력의 흐름도 조금 특이하거든. 섬에서 영애 혼자 마력을 쓸 수 있었던 것도 그렇고.”

그래. 역시 나는 이 세계에서 일종의 버그가 맞는 거다. 섬에서만 그런 건 줄 알았는데 섬을 탈출해서도 변함없이 버그 같은 존재라니.

하지만, 내가 한국에 다녀온 건 이미 벌어진 일이고 되돌릴 수 없다. 받아들여야지 뭐. 그래도 덕분에 은지가 지금의 은지가 되었다는 이야기 아니겠는가.

나는 나와 아스달 몫의 쿠키까지 다 먹어치우고 있는 은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생각에 잠겨 있던 중에 아스달이 내 손가락을 가리켰다.

“반지는 계속 끼고 있나 보군.”

나는 그제야 오른손에 끼워진 반지를 내려다봤다.

“아. 도움이 많이 되고 있어요. 반지 선물해주신 건 정말 감사하게 생각해요.”

“도움이 된다니, 다행이야. 그거라도 도움이 되지 않았으면 영애가 날 다신 안 봤을지도 모르는 것 아닌가. 그걸 미리 선물해두길 천만다행이었지. 후우.”

아스달이 장난스럽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제가요?”

“영애는 날 싫어하지 않나?”

“아시네요.”

“그렇게 대놓고 말하면 나도 상처를 받는다네.”

“저하께선 상처 좀 받으셔도 됩니다.”

“역시 피도 눈물도 없어.”

“그래서 하고 싶으신 말이 뭔데요?”

내 물음에 아스달이 태평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인다.

“나는 사람을 믿지 않아. 의심이 많지.”

“알아요.”

“원래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야. 신뢰하고 있던 전 부인 손에 죽을 뻔했거든. 아마 그때부터였나. 인간불신에 시달리던 게.”

콜록. 나는 차를 마시다가 찻잔을 급히 내려놓고 아스달이 준 손수건으로 입가를 가렸다. 그리고는 연신 마른기침을 뱉었다.

아스달이 그런 나를 보며 재미있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영애에겐 미안하네. 아 이런. 사과라는 것을 이리 남발하면 진실성이 희석되는 법인데, 죽다 살아났더니 사람이 좀 감성적으로 변한 모양이야! 하하하.”

그는 천연덕스럽게 웃었지만, 어쩐지 이번의 웃음엔 생기가 없었다.

나는 조금 복잡하고 안쓰러운 마음으로 그를 바라봤다. 내가 아스달을 이런 마음으로 바라보게 될 날이 올 줄은 몰랐지.

처음부터 먹이사슬 최상위에 위치하고 있던 그가 누군가에게 사과를 하는 것도 쉽지는 않았을 거다.

“저하의 사과 받아들일 테니까, 이제 사과는 그만 되었어요.”

나는 지난번 에녹이 내게 해주었던 말을 아스달에게 되갚았다.

우리 모두 많이 변했다.

서로를 조금 더 알게 되고 서로의 상황을 이해했다.

물론 아직도 많이 부족한 점이 많고 더 성장해야 했지만, 이만하면 잘하고 있는 게 아닐까.

* * *

아스달과 난 응접실을 나와 플로네 공작 성의 정원을 산책 중이었다. 그가 정원을 구경하고 싶다고 아주 귀찮게 굴었기 때문이다.

성가신 티를 팍팍 냈지만 그래도 그에게 기억을 더듬어가며 정원에 대해 설명하고 있을 때였다.

“아가씨!”

바네사가 정원까지 급히 나를 찾아 나왔다. 무슨 일이지?

“황태자 전하께서 오셨어요.”

나는 그 말에 조금 놀랐다. 에녹이라면 분명 내일 즈음 도착했어야 하는데, 이렇게 빨리?

“여기 있었군.”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에녹이 나타났다. 아스달만큼이나 화려한 황태자 제복을 입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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