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204)화 (204/234)

문득 섬을 떠나기 전에 아나타가 해준 말이 떠올랐다.

‘그들은 제나스를 신처럼 여기고 떠받들었어. 천 년이나 살고 있는 대마법사잖아. 그러지 않고 배겨? 제나스는 떠받듦에 취해 실험을 성공만 시키면 천년의 세월을 보상받을 수 있다 자신했지만, 내 생각은 달라. 이 실험은 결국 밖에 있는 ‘그놈들’ 좋은 일만 하는 거야.’

“혹시 그들에게 네가 이용당한 건 아니고?”

내 말에 제나스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나를 쳐다봤다.

“그게 무슨 말이지?”

“아나타가 그랬어. 네가 모란꽃 놈들의 떠받듦에 취해있다고. 결국 실험의 성공은 그들 좋은 일만 하는 거라고.”

“하.”

그가 기가 차다는 듯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이내 아주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이 정도면 다른 가족들이 달려올 것 같은데.

“하하하하하!”

박장대소하던 제나스가 돌연 뚝, 웃음을 멈췄다. 그 간극이 제법 스산하고 섬뜩했다. 나는 마른 침을 삼키고 그의 반응을 살폈다.

제나스가 나를 보며 미소 지었다.

“재미있는 소리를 했네. 뭐, 이쪽 세계의 일은 아나타의 담당이 아니었으니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겠군. 내가 어떤 식으로 천 년 동안 그놈들을 다뤄왔는지 모를 테니 말이야.”

“……어떤 식으로 다뤄왔는데?”

내가 조심스레 묻자 제나스가 내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시선이 내 손안에 든 상자 위로 배회했다. 그리고 뜬금없이 맥락 없는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마거릿, 모란꽃 놈들이 갖고 있는 마력석은 누가 만들었을 것 같아?”

그의 질문에 나도 모르게 들고 있던 상자를 움켜쥐었다. 제나스의 시선이 아래로 향하는 것을 느끼며 나는 황급히 입을 열어 그의 시선을 돌렸다.

“네가 카이든에게 말했잖아. 그건 로하데 가문에서 개발했다고…….”

“아, 질문을 다시 하지. 마력석을 개발한 로하데 가문은 누구의 것일까.”

질문의 요지가 뭔지 모르겠다. 제나스는 로하데 가문의 초대 가주다. 그러니까 그의 허가 아래 로하데 가문에서 마력석을 개발했다는 뜻일까?

하지만 마력석에 대해 제나스가 잘 알고 있다 하더라도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지 않은가.

“로하데 가문에서 그걸 개발하기는 했지, 내 지시 하에. 재료는 알레아 섬에서 나왔고.”

알레아 섬에서 나온 재료란 죽은 피실험자들의 영혼을 말하는 걸까. 어쩐지 섬뜩해진다.

“모란꽃 놈들에게 나눠준 건 15개뿐이지만, 알레아 섬에 남은 마력석이 더 있을지도 모르잖아.”

제나스는 다소 모호한 말로 유혹을 하듯이 내게 속삭였다. 마치 알레아 섬에 모든 것이 숨겨져 있으니 가서 확인하라고 부추기는 것처럼 들렸다.

나는 미간을 좁히고 생각에 잠겼다. 제나스의 말이 맞는지는 알레아 섬을 가서 확인을 해보는 게 좋을 것 같긴 한데…….

어차피 디에고 형제가 섬을 찾으면, 그 자체로 납치의 증거가 되니 증인이 되어줄 수뇌부 귀족들을 데리고 확인차 방문하기는 해야 했다.

하지만…….

‘재미있는 소리를 했네. 뭐, 이쪽 세계의 일은 아나타의 담당이 아니었으니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 내가 어떤 식으로 천년 동안 그놈들을 다뤄왔는지 모를 테니 말이야.’

조금 전 제나스가 한 말이 의미심장했다.

그간 모종의 방법으로 육지에 있는 모란꽃 세력을 직접 통제하기라도 했다는 걸까?

예를 들어…… 바로 이 마력석으로 말이다.

그래. 생각해 보면 천년을 사는 사람은 없다. 제나스와 아나타를 제외하곤. 아마 평범한 인간인 모란꽃 세력도 천년 동안 수십 번 사람이 바뀌었을 거다.

그 점이 조금 이상했다. 보통 악당이 자기가 살아생전에 이룰 수 없는 과업을 대대로 이어오나? 그것도 또 다른 악당을 도와가며?

하지만 제나스에게 조종을 당했다면 설명이 된다. 마력석의 또 다른 역할이 그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마력석을 더더욱 파괴해야 할 이유가 생겼다.

“궁금한 게 많은 얼굴인데, 아무것도 답해줄 생각은 없어.”

“그럼 애초에 말을 꺼내지 말든가.”

섬에서와 같았다. 나를 위해 마물의 모체에 대해 알려주는 것처럼 말하던, 그때도 저랬다.

제나스에 대한 살의가 차곡차곡 쌓여갔다.

그를 볼 때마다 알레아 섬이 떠오른다. 그 어둡고 질긴 감정이 겹겹이 나를 덮어 숨통을 조이는 것만 같았다. 이건 제나스가 죽지 않는 이상 끝나지 않을 것이다.

하루빨리 제나스의 영혼이 남은 한 조각까지 전부 사라졌으면 좋겠다.

“마거릿. 내가 말했잖아, 난 네가 살아남았으면 좋겠어. 아니, 너만 살아남으면 돼. 넌 그래야만 해.”

이어지는 제나스의 마지막 말을 듣고 내 마음은 더욱 심란해졌다.

그는 내게 왜 이렇게 구는 걸까.

앞뒤 맥락도 없이 남긴 제나스의 마지막 말이 계속해서 응어리처럼 마음속에 남았다.

* * *

제나스가 지난밤에 한 말에 대해서는 각각 에녹과 카이든에게 편지를 보내서 알렸다.

카이든이 깨어나면 아마 제나스가 무슨 짓을 했는지 바로 알겠지만, 그래도 직접 말을 전하는 편이 낫겠지. 이 정도 내용의 편지는 제나스가 카이든의 몸속에서 함께 읽는다고 해도 괜찮을 것 같다.

아무래도 생일파티만 끝나면 알레아 섬을 수색 중이라는 디에고 형제를 바로 찾아가 봐야겠다.

‘제나스의 말이 맞는지 확인을 해봐야겠어.’

물론 지금은 생일파티라는 큰 행사가 있어서 움직일 수 없었다.

플로네 영지로 돌아온 나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카이든이 마탑의 마법사들과 함께 와서 플로네 공작성에 보호 결계를 쳐주기로 했는데, 도착 인원이 많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손님방을 많이 빼둬야겠네.’

내가 직접 초대한 손님들인 만큼 그들이 지낼 방을 꼼꼼히 체크해 두었다.

방으로 올라가던 내게 집사가 편지와 함께 소포 하나를 건넸다.

“마탑주님으로부터 편지가 왔습니다.”

방으로 돌아와서 소포를 열어보니, 그곳엔 제나스의 일기와 그의 마법 연구 일지가 들어 있었다.

‘제나스가 싫어했다고 들었는데, 용케 일기를 찾아 보냈네.’

하긴 제나스가 싫어한다고 해서 카이든이 신경 쓸 리는 없지만. 나는 소파에 느긋하게 앉아 카이든의 편지부터 먼저 뜯어보았다.

[……(중략) 제나스 XX가 헛소리를 많이도 지껄인 모양인데, 너무 마음 쓰지 마. 알레아 섬 마력석에 관한 건 만나서 얘기해. 내일 당장 갈게.]

내일 당장 출발한다고 해도 플로네 영지까지 오는 데는 이틀이 걸릴 테다. 그나마 수도 버네튼에서 플로네 영지가 멀지 않아 망정이지.

나는 카이든의 편지를 접고 이번엔 제나스의 일기를 펼쳐보았다. 천 년 전의 물건임에도 마법사들이 보관을 해서 그런지 상한 곳이 많지는 않아 보였다. 그저 손때가 묻고 조금 색이 변색된 정도?

제나스의 일기에 특별한 내용은 없었으나, 그가 상당히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점은 알 수 있었다.

그와 아나타는 잉그람 왕국의 이름 없는 남작 가문에서 태어났다. 비마력인으로 박해를 받을 때에도 그의 가족들이 그를 위해서 해준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아나타는 그때부터 제나스에게 큰 죄책감을 가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래서 알레아 프로젝트를 함께 기획한 걸까.

[마력과 신력이 완전히 소거된 세상. 그 태생적인 힘만 없다면 인간은 자력으로 더 큰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땅에 존재하는 마력인들은 전부 머저리 같아서 그러한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내가 도와줘야지.

세상의 모든 마력을 수거할 방법을 연구 중이다. 한심한 것들을 직접 지도해줄 생각이다. 결단코 과거에 대한 복수는 아니다. 결단코.]

나는 제나스의 일기에 적힌 그 문구를 다소 착잡한 얼굴로 바라봤다.

사연 있는 악역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사연이 있다고 해서 그들이 저질러온 일들이 용서받을 수 있는 건 아니다.

내가 궁금한 건 ‘제나스가 정말 원했던 결과가 어떤 것이었나’였다. 그의 사연 따위는 관심 없다.

차원을 지배하고 싶다고 했었지. 그런 결심을 하고 실행에 옮긴 제나스는 그를 박해했던 이들과 뭐가 다른 거지? 내 눈엔 똑같은 악인이다.

나는 일기를 후루룩 읽다가 접고 이번엔 마법 연구 일지를 꺼냈다.

마법 연구일지는 알레아 섬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곳엔 제나스가 했던 다양한 연구가 기록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알레아 섬에 대한 이야기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나타가 알레아 섬을 고안. 그녀가 만든 섬의 구조는 매우 흥미로움.]

그런 메모가 적힌 다음, 의미를 알 수 없는 글자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마법 수식에 관한 글자들 같았다.

[증거 인멸 필요. 섬에 자동 폭발 장치 추가 고안.]

이런 게 있었구나. 나는 끄적이듯 적혀 있는 메모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자동 폭발 장치가 뭐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게 있었다면 아나타는 왜 굳이 펜던트를 이용해서 섬을 폭파시키고자 했던 걸까.

잠깐, 알레아 섬이 완전히 폭발한 게 아니긴 하지. 잔재가 남아있긴 하니까. 그래서 디에고 형제가 그걸 찾으러 간 거고.

이 문구가 다소 거슬렸지만 실험이 모두 끝난 지금 상황에선 딱히 이상할 건 없었다.

[차원 너머의 생명체를 만나게 된다면. 나는 반드시 그것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내 목적을 이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할 테니.]

그리고 나는 그 다음 적힌 메모에 잠시 동작을 멈췄다.

차원 너머의 생명체라. 설마 나를 말하는 건 아니겠지?

그 문구가 마지막 장에 적혀 있었기에 더는 읽을 게 없었다. 나는 들고 있던 업무일지를 접었다. 딱히 ‘이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겠다’ 싶은 중요한 내용은 없었던 것 같다. 다 지나간 일이라서.

하긴, 제나스가 이렇게 후대 사람들이 쉽게 건드릴 수 있을 만한 장소에 중대한 비밀이나 중요한 정보를 메모해뒀을 것 같지는 않았다.

일이 모두 끝나면 여행이나 갈까. 유안나와 함께 여행을 다녀도 재미있을 것 같다. 처음 사귄 친구니까.

나는 들고 있던 일기와 연구일지를 서랍에 넣어뒀다.

‘괜히 읽었나.’

머릿속만 어지러워졌다.

* * *

아침 댓바람부터 플로네 가문의 사용인들은 조금 들떠 있었다. 헤스티아 왕세자가 방문한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에녹 황태자와 마탑주가 일찍이 플로네 공작 성에 도착할 거라는 소식을 들었는데 그들보다도 헤스티아 왕세자가 하루 먼저 방문한 것이다.

타국의 이름난 왕세자의 방문이다. 하녀들은 모두 기대에 차 있었지만 마거릿이 무서워 티를 내진 못했다.

‘헤스티아 왕세자 저하께선 마거릿 아가씨를 싫어하신다고 했는데.’

로즈메리의 전담 하녀 미아는 의아한 얼굴로 왕세자의 방문을 기다리며 생각했다.

‘뜬소문으로 듣기론 아니라고 했던 것 같기도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미아는 다른 하녀들과 함께 저택의 입구에 일렬로 서서 헤스티아 왕국의 왕세자를 맞이했다.

헤스티아 왕국의 왕세자, 아스달은 굉장히 화려한 남자였다. 흰색에 휘황찬란한 금박 장식이 가득 들어간 제복과 붉고 화려하게 펄럭이는 우플랑드에 흰여우털 장식도 어딘지 과한 감이 있었다.

핑크색 머리카락과 처진 눈꼬리는 그의 인상을 한층 더 능글맞고 여유로워 보이게 만들었다.

게다가 한쪽 눈에 하고 있는 안대가 무척 튀었다.

“저택에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하. 이리 일찍 방문하실 줄은 몰라서 대접이 성이 차실지 모르겠습니다.”

우아한 인상의 플로네 공작이 나서서 아스달을 향해 인사했다. 공작의 인사를 시작으로 공작부인, 이니스, 로즈메리가 차례로 인사했고 마지막으로 마거릿이 아스달을 쳐다봤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저하.”

“오랜만에 봤는데 인사가 너무 딱딱한 거 아닌가?”

아스달이 호쾌하게 손을 내저으며 웃음을 터트리고는 손뼉을 쳤다.

“공작, 내 마거릿을 하루라도 빨리 보고 싶어 달려온 것이니 둘이 은밀하게 담소를 나누고 싶습니다만. 양해를 부탁드리지요. 자자, 사용인들은 이만 물러가지.”

이어지는 그의 말에 모두가 경악을 한 채로 그를 쳐다봤다. 반면에 마거릿은 떨떠름한 얼굴로 아스달을 쳐다보다가 매우 귀찮은 얼굴로 공작 부부를 돌아봤다.

“응접실에서 이야기 나누고 오겠습니다.”

마거릿의 말에 아스달이 턱을 짚고는 천연덕스럽게 폭탄을 던졌다.

“응접실보다는, 영애의 방을 구경하고 싶소만 그건 어려운가?”

“X……! 작작하ㅅ……! 아니, 후……. 죄송합니다. 듣는 귀가 많습니다.”

무언가 욕설 같은 단어가 나온 것 같았지만 미아는 제가 잘못 들었겠지 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튼 마거릿의 마지막 말은 거의 체념에 가까웠다. 그녀가 이를 악물고 아스달을 향해 눈치를 줬다.

상대는 헤스티아 왕국의 적통 왕세자다. 분명 무례하다거나 하면서 큰 불호령이 떨어질 것 같았으나, 아스달은 즐겁다는 듯이 호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듣는 귀가 없으면 그런 말을 해도 괜찮은 건가? 영애는 역시 재미있어! 공작 일가는 굉장히 좋겠소! 이런 영애와 함께 살고 있다니. 하하하하!”

떨떠름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아스달의 유쾌한 웃음소리만 저택을 가득 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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