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203)화 (203/234)

“이거 선물.”

선물? 의아한 얼굴로 나는 카이든에게서 주머니를 받아들고 내용물을 확인했다. 그리고 깜짝 놀라 다시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이걸 어떻게……!”

카이든이 뺨을 긁적이며 멋쩍은 얼굴을 했다.

“내 연구실에서 제나스가 다시 만들었어.”

주머니에 든 것은 조명탄의 탄알이었다. 탄알 자체도 제나스가 직접 개조한 것이라서 제나스라면 다시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하긴 했는데.

나는 꼼꼼히 탄알을 살피다가 문득, 내가 왜 새로 생긴 탄알을 반가워하고 있는 건지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다. 뭐야, 마물 사냥꾼이 될 것도 아닌데 왜 탄알을 보고 좋아하는 거냐고.

“그런데 이걸 쓸 일이 있을까? 여긴 섬이 아니잖아.”

“글쎄. 모르는 거지. 모든 일이 끝날 때까지는 가지고 있어.”

“흠. 제나스를 이제 뜻대로 다룰 수 있는 모양이군.”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에녹이 카이든에게 물었다. 카이든은 하고 싶은 말이 많다는 얼굴로 에녹과 나를 보았다.

“그거야 그 XX가 마거릿을…….”

말끝을 흐린 그가 머리를 거칠게 헤집었다.

“됐다. 그게 뭐가 중요해. 이제 가.”

그리고 그답지 않게 나와 에녹을 떠밀어 보냈다.

“어? 어. 아, 그래도 이건 고마워. 잘 쓸게.”

쓸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내 감사 인사에 카이든이 싱긋 미소를 짓고는 내게 인사했다.

카이든이 마지막에 하려던 말은 뭐였을까. 말을 하다 마니 궁금증만 남는다.

* * *

크흑.

제나스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뱉으며 자리에 누워 있었다. 손 하나도 까딱할 수가 없었다.

뜨거운 인장에 찍히는 건 별 게 아니었다. 영혼이 찢기는 고통에 비하면 말이다. 제가 어쩌다가 이런 굴욕적이고 비참한 상황에 놓였는지 하루도 빼놓지 않고 생각했다.

‘누구 때문이겠어. 망할 마거릿 때문이지.’

마거릿, 마거릿. 하루에도 수십 번 그 짜증나는 이름을 곱씹었다.

오두막 근처로 떠내려 온 마거릿을 그때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마거릿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더라면, 일이 이 지경까지는 되지 않았을 텐데.

마거릿을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을 지경이다. 지금은 그따위 생각을 할 때가 아닌데.

그는 한참 만에 정신을 차리고 카이든에게 말을 걸었다.

[그 대주교 말이야. 나였으면 고문을 했을 텐데. 고문하다가 수틀리면 죽여 버리면 되지 않나. 어차피 아무도 모를 텐데.]

창문 앞에 서서 우중충한 하늘을 올려다보던 카이든은 제나스의 말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후손님, 그 주교 놈 내가 대신 죽여줄까.]

“시끄러워.”

[그 머저리들이. 주제도 모르고 나 없이 내 위업에 손을 대려 하잖아.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닐 놈들이, 감히.]

카이든의 몸 안에 모란꽃 놈들이 실험을 재개하고자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하는 소리다.

제나스의 오만이 그의 천재성과 대단한 능력에서 온다는 걸 카이든도 모르지 않는다. 천재라는 소리를 듣고 자라온 카이든조차도 제나스는 상대하기 힘든 존재였으니까.

[한심하기 짝이 없어. 다들 진짜 무서운 게 뭔지 몰라.]

“진짜 무서운 게 뭔데.”

[글쎄. 내가 널 돕는 건 제약 때문이야. 그 이상으로 널 배려할 거라 생각하지는 마, 후손님.]

제나스가 동문서답을 했다. 카이든에게 영혼이 종속된 주제에 배려는 무슨. 그러나 대화의 마무리는 조금 찝찝했다.

과거 마거릿이 투덜거리던 게 생각난다. 제나스는 즉흥적이며, 무언가를 말해줄 듯하다가도 정작 중요한 건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제나스는 끝끝내 그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카이든 역시 모란꽃 세력의 수작질이나 그들의 계획 따위는 걱정되지 않았다. 제나스의 말대로 한심할 정도로 머저리 같은 집단인 것 같았으니.

우르르, 쾅.

그때 창밖으로 거대한 천둥소리와 함께 일곱 갈래로 갈라진 번개가 내리치는 장면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며 카이든이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요즘 들어 저 이상한 번개가 계속해서 내리치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

* * *

대주교는 여전히 마탑에 봉인되어 있었다. 그리고 아마도 사건이 모두 끝날 때까지 그는 그렇게 봉인되어 있을 거다.

생명에 지장이 없을 정도로 최소한의 물만 제공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감옥의 죄수를 다루는 방식과 다르지 않았다.

‘자업자득이지.’

생일은 대략 보름 정도 남았고 카이든과 에녹은 나흘 뒤에 플로네 영지에 방문하기로 했다. 모란꽃 세력의 공격을 대비해 결계를 치기 위해서였다.

생일 파티는 수도 버네튼이 아닌 플로네 공작 영지에서 치르기로 했다. 마침 수도의 사교시즌이 마무리되는 시점이라 영지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또, 플로네 공작 성에서 더 성대한 파티를 열 수 있다는 게 어머니 아버지의 주장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내일 버네튼을 떠나기로 했고 오늘은 수도의 저택에서 지내는 마지막 날 밤이었다.

나는 방 안 소파에 느긋하게 앉아 내게 온 소포를 하나 뜯었다.

유안나의 이름으로 온 것이었는데, 동여맨 끈을 풀고 소포의 누런 종이를 뜯어내자 그 안에 꽁꽁 포장되어 있는 작은 상자가 보였다.

열어보지 않아도 그게 무엇인지 직감했다. 아마도 그녀가 구했다는 마력석인 듯했다. 조심히 포장을 뜯어 상자를 열어보니, 역시나 마력석 2개가 들어 있었다.

그리고 나는 소포에 함께 동봉된 작은 쪽지를 발견했다.

[마력석은 하루라도 빨리 보내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 먼저 보내요. 소포는 마법 봉인과 위치 추적을 걸어뒀으니, 걱정 말고요.]

이렇게 빨리 마력석을 보내줄 줄이야. 그녀 말대로 마력석은 최대한 빨리 찾아서 파괴해버리는 편이 낫다. 그래서 나는 은지에게 바로 먹이려고 했다. 은지가 호기심 어린 얼굴로 내 발밑을 배회하다가 왜 그러냐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순간 마력석을 은지에게 먹여도 정말 아무 문제 없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말도 못 하는 아이인데, 혹시 아파도 말 못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표정을 보면 그건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며칠 전에 마력석 하나를 삼켰는데 연달아 무리를 시키는 건 아닌가 싶어서 잠시 내가 보관하기로 했다.

나는 마력석을 든 채로 소파에 널브러졌다. 피곤해.

이니스에게 듣기로 내 생일파티의 초대장을 받고 싶다는 편지가 굉장히 많이 도착했다고 한다.

‘하긴, 일간지 신문에서도 내 얘기가 대서특필될 정도였으니.’

다들 궁금해 하는 것도 이해는 갔다. 함께 전쟁터에서 귀환한 기사들이 은지가 신수라는 소문을 널리 퍼뜨려놓았기 때문이었다. 그중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은 당연 노엘과 하이젠이었다.

그것뿐만 아니라 다들 나와 에녹, 카이든의 달라진 관계에 대해서도 무척 호기심을 표하는 것 같았지만.

스스스-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는데 은지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슬쩍 내리자 소파 앞 카펫 위에서 은지가 뒹굴거리며 나를 쳐다봤다.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예쁜 척까지 하는 게 귀여워서 녀석을 쓰다듬지 않고는 못 배겼다. 소파에서 내려와 녀석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자, 녀석이 기분 좋은 얼굴로 혀를 내밀고는 눈을 감는다. 예뻐라.

캬악!

그런데 갑자기 돌연 은지가 날카롭게 이빨을 세웠다. 의아한 얼굴로 녀석을 보다가 녀석을 따라 시선을 옮긴 나는 깜짝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다.

창문 앞에 익숙한 인영이 앉아 있었다.

“마거릿.”

공기 중에 무겁게 내려앉은 목소리는 카이든의 것이면서도 카이든의 것이 아니었다.

같은 몸을 쓰고 있으면서도 제나스가 그 몸을 사용할 때는 느낌이 확연히 달랐다.

창틀에 비스듬히 앉아 느른하게 미소 짓고 있는 태연자약함이 자못 섬뜩하다. 그가 제나스임을 알아차려서가 아니라, 눈이 웃고 있지 않아서였다.

“여긴 왜 왔어.”

대체 왜 이렇게 자꾸만 나를 찾아오는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딱히 뭔가 해코지를 하는 것도 아니면서.

나는 얼른 은지를 주워 어깨 위에 올리고 그를 경계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제나스는 미동도 없이 앉아 나를 가만히 바라볼 뿐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계속 궁금했어.”

근처 협탁 위에 놓인 촛불이 흔들리자 제나스의 얼굴에 그림자가 졌다.

나를 바라보는 붉은 눈동자는 어둠 속에 꼭 석양처럼 보이기도 했다. 고요하고도 뜨겁게 저무는 태양처럼 붉은 눈이었다. 카이든의 눈은 보석처럼 화려하고 반짝이고 늘 빛이 났지, 저런 색을 품지는 않았는데. 영혼이 다른 것뿐인데 이렇게 달리 보이다니 조금 신기했다.

“이번에도 너 때문에 모든 걸 망치게 될지.”

그러나 이어지는 제나스의 말에 찬물을 휙 끼얹은 것처럼 정신이 들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이번에도’라니?

그가 느긋한 동작으로 이마 위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 탓에 드러난 그의 단단한 목선과 느리게 움직이는 남성적인 목젖이 이상하게 눈에 들어왔다.

분위기가 이상했다. 뭐야. 왜 저렇게 오늘따라 퇴폐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걸까.

“처음 알레아 섬으로 너를 데려올 땐, 분명 특별할 것 없는 실험체였는데. 그랬는데…….”

나를 보는 제나스의 얼굴에 복잡한 감정이 스쳐 갔다. 스스로도 혼란스러워 하는 것 같았다.

“거슬려. 마거릿, 네가 너무 거슬려.”

“…….”

“그러니, 아무것도 하지 말고 제발 얌전히 있어. 자꾸 그렇게 설치면 아무리 너라도 내가 가만히 못 있어.”

가만히 못 있으면 어떻게 하려고 저런 말을 하는 걸까. 어차피 그가 할 수 있는 건 없을 텐데.

신경이 거슬린다고 말하지만, 이건 분명 관심이다. 그는 지속적으로 내게 흥미를 표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차원 너머에 다녀온 영혼이기 때문이겠지.

“네 감정 같은 건 관심 없어. 나는 단지 너 때문에 상처받을 카이든과 그의 안위만 걱정될 뿐이야.”

내 말에 제나스의 눈동자가 매섭게 흔들렸다. 일순 그가 상처받은 표정을 지은 것도 같았지만, 아주 찰나여서 내가 본 게 맞는지도 확실치 않았다.

그때, 제나스가 창틀에서 훌쩍 내려왔다. 그가 단숨에 내게 다가와서는 고개를 숙였다.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가까워진다.

캬악.

어깨에 턱을 걸치고 있던 은지가 날을 잔뜩 세우고 경계했지만, 제나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손가락으로 내 턱을 들어올렸다. 시야에 그의 붉은 눈이 들어왔다.

그가 내 눈을 빤히 쳐다봤다. 특별히 마법을 쓴 것도 아닌데 마치 사슬에 얽힌 것처럼 나는 잠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왜 그렇게 까칠하게 굴어, 나한테만.”

나는 오로지 너 때문에 머저리같이 천년을 이어 온 실험마저 망친 사람인데.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말은 꼭 애원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가 하는 말에 잠시 분노가 차올랐다.

제나스가 카이든의 몸 안에 꼼짝없이 갇혀 있다고 해서 그를 향한 내 분노가 사그라든 것은 아니었다.

영문도 모른 채 미친 섬에 납치되어 끊임없이 목숨을 위협당하고, 죽음 앞에 좌절하고, 두 개의 영혼으로 정체성에 혼란을 겪고, 돌아와서도 안정을 취할 수 없는, 이 모든 일의 원인이 되는 사람이 바로 제나스였다.

내가 겪은 그 어둡고 힘겨운 감정들은 그저 고요히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있는 것일 뿐, 결단코 사라진 것이 아니다.

이제 가족도 만났고 모란꽃 세력도 쉽게 해치울 수 있을 것 같으니 괜찮지 않냐고 묻는다면, 아니. 나는 괜찮지 않다.

섬에서의 일은 평생 나에게 깊은 트라우마로 남아있을 것이다. 결단코 그 무엇으로도 지울 수 없는 흉터로 남아있겠지.

“네가 지금껏 해온 일들을 생각해. 난 네가 우리 카이든 몸에 기생해 살아 숨 쉬는 것조차 끔찍한 사람이거든. 내가 힘만 있었으면, 내 손으로 직접 너를 죽여 버렸는데 그러질 못해 안타까울 뿐이야.”

“살벌하군. 지난날들을 반성하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아니, 난 반성하지 않아.”

“그럴 줄 알았어. 너 같은 XX들은 살아있는 게 죄악이야.”

내 말에 제나스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모욕을 듣고도 웃다니, 소름이 끼친다. 정말로 저놈은 제대로 미친 X이다.

“모란꽃 애들한테 너무 많은 걸 기대하지 마. 그들을 만든 건 나야. 천년 동안 이 세상의 최고는 나였고, 여전히 최고는 나거든.”

게다가 뭘 믿고 저렇게 당당한 걸까? 제나스는 이제 분명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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