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202)화 (202/234)

카이든이 손가락을 튕기자 재갈이 풀렸다.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오! 이, 이,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소?! 교황청에서 나를 찾을 거요. 그대들의 짓인 게 금방 들통이 나겠지!”

“상관없어.”

카이든이 날카롭게 대꾸했다.

“어차피 우리가 마력석을 찾고 있는 걸 알아차렸을 텐데. 뭐, 이 정도는 걔들도 예상하고 있지 않았을까?”

연회장에서 대주교가 사라졌으니, 당연히 교황청에서 찾기는 할 거다. 우리를 의심하겠지.

그러나 모든 일이 끝날 때까지 대주교를 이곳에 묶어두고 있으면 문제는 없었다. 제나스가 아나타를 오두막에 봉인했던 것처럼 대주교도 마탑에 봉인됐으니, 찾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산채로 봉인이 된 기분이 어때?”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요! 대체 왜 이런 짓을 하는 건지 모르겠소! 파티에서의 일 때문이라면……!”

“하. 시끄러운데 그냥 다시 재갈을 물리지.”

에녹이 미간을 찌푸리며 대주교의 말을 끊었다. 에녹답지 않은 무례였다. 하긴, 예의 차릴 상대가 아니긴 하지.

나는 대주교를 보며 물었다.

“알레아 섬, 알죠? 당신이 그 섬과 관련 있는 거 다 알고 있어.”

흠칫.

발버둥을 치던 그가 그제야 동작을 멈췄다.

“나머지 마력석은 누가 가지고 있는지, 당신 외에 공범은 몇 명이 더 있는지 말해 봐요.”

“내가 대답할 것 같소?”

“계획이 뭐죠? 실험은 실패했어요. 포기하지 않고 꾸미는 일이 대체 뭐예요?”

대주교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럼 내 생일파티에서 하려는 일은 뭔데요?”

“그걸 어떻게……!”

마지막 질문엔 대주교가 당황해서 대답했다가 입을 다문다.

파티에서부터 느꼈던 거지만, 너무 허술하고 멍청해서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물론 천 년 동안 살아온 제나스와 다르게 모란꽃 세력은 계속해서 세대교체를 해왔겠지만, 이렇게 허술한 사람에게 내 목숨이 달려있었다니 너무 분하고 화가 날 지경이었다.

“손톱이라도 뽑을까?”

카이든이 물었다. 대주교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나는 카이든을 향해 단호히 말했다.

“육체 고문은 안 돼. 혈서를 찾았을 때 이놈도 단죄를 받을 텐데, 그때 몸이 상해 있으면 우리가 곤란해지잖아.”

팔짱을 끼고 서서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에녹도 한 마디 보탰다.

“육체 고문은 나도 반대한다. 하지만 다른 건 할 수 있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대주교가 바짝 굳어서는 달달 떨었다.

“이야. 무서워? 너희가 우리한테 한 짓은 생각 안 하고?”

카이든이 기가 차다는 듯 진 안으로 들어가 대주교의 의자를 거칠게 걷어찼다. 봉인된 이를 제외하곤 마법진 안으로 들락거리는 것이 가능한 모양이다.

대주교가 의자에 묶인 채로 고꾸라졌다. 바닥에 처박혔다가 간신히 고개를 든 그가 두려움에 젖은 얼굴로 카이든을 향해 살려달라고 간청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나와 에녹, 카이든은 모두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다, 다 말하겠습니다.”

대주교는 고문을 시작하기도 전에 쉽게 입을 열었다.

아쉽지만 그는 모란꽃 세력이 몇 명인지, 남은 마력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누구누구인지까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의 목적과 내 생일파티에서 벌일 일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마력석 가진 사람은 모두 영애의 생일 파티에 참석할 겁니다. 그리고 그 마력석을 이용해 마물을 불러 모을 예정입니다.”

“그래서 얻는 게 뭐지?”

“혼란을 야기하고 그 틈에 섬의 생존자들을 모두 제거해 증거를 인멸하는 것입니다.”

“지금 제거한다고 말한 그 생존자 중에 제국의 황태자와 왕국의 왕세자가 끼어있다는 건 알아요?”

황당해서 물었는데 대주교는 그게 뭐 어떻냐는 듯이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몰랐다면 애초부터 섬으로 납치를 하지 않았겠지요. 그것은 사고로 위장될 겁니다. 마물에 의한 것으로요.”

“그리고.”

“네?”

“그리고 그 다음 목표가 뭐냐고 XX XX야.”

카이든이 옆으로 기울어진 대주교의 의자를 걷어차며 불량스레 물었다.

“아, 알레아 섬에서 남은 마력의 잔재라도 회수하고 실험을 재개할 계획입니다. 조금만 더 하면 성공이었으니까요. 천년의 계획을 이대로 망칠 수 없지 않습니까. 물론 당신들 같은 피실험체는 절대로 뽑지 않을 거라고 하더군요.”

우리는 그 말을 듣고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뭐? 실험을 재개한다고? 이것들이 정말 미친 모양이다.

실험을 설계한 제나스도 없는데 무슨 수로 실험을 완수하겠다는 거지?

“이, 이제 풀어주시는 겁니까?”

이제는 존칭을 사용하며 대주교가 우리에게 물었다. 카이든은 하찮고 경멸스러운 것을 보듯 대주교를 보다가 바닥에 고꾸라져 있는 그를 일으킬 생각도 하지 않고 마법진 밖으로 나왔다.

“나가서 얘기할까?”

카이든이 우리를 향해 물었고 그걸 들은 대주교가 다시금 바닥에서 발버둥을 치며 저를 풀어달라고 외쳤다. 물론 카이든이 손가락을 까딱하자 풀려 있던 재갈이 입에 다시 물렸지만.

어차피 이런 놈들은 다 잔챙이일 뿐이다. 진짜 잡아야 할 모란꽃 세력의 수뇌부는 교황과 로하데 후작, 그리고 황후겠지.

하지만 이상하게 자꾸만 찜찜했다. 뭔가 놓친 게 있는 것만 같았다. 정말 이렇게 쉽게 문제들이 해결되는 게 맞는 걸까. 천 년 동안 이 미친 실험을 진행해오며 보안을 유지하던 이들이 왜 이렇게 허술하게 구는 걸까.

* * *

우리는 마탑주의 집무실로 들어왔다.

카이든이 재빨리 내 옆자리를 차지하자 에녹은 하는 수 없이 앞자리에 앉았다. 한참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여기가 네 집무실이라니 신기하다.”

나는 카이든의 집무실을 둘러보며 말했다. 시야에 온갖 서적과 실험 기구가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 집무실 내부가 눈에 들어온다.

아까도 둘러봤지만 왠지 새삼스럽다. 망나니 미치광이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카이든이 마탑주라는 게 다시 한 번 실감이 났기 때문이다.

비스듬히 소파에 앉은 카이든이 나를 쳐다봤다.

“내 공간에 네가 있다니, 이것도 굉장히 좋네.”

“여기 나도 있다는 걸 잊은 모양이군.”

카이든이 에녹을 없는 사람 취급하자, 에녹이 못마땅한 티를 내며 말했다.

그리고 다시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아, 아까 이거 읽었어.”

나는 테이블 위에 올려둔 [위대한 마법사, 제나스 이그란 로하데]라는 책을 들어 보였다.

“아…….”

카이든이 팔짱을 끼고 앉은 채, 내가 가리킨 책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한참 동안 말없이 얼굴을 구기고는 머리를 헤집었다. 아무래도 제나스와 무슨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다.

“그 자식이 만든 마탑이어서 관련 서적이 많이 남아 있어.”

“어? 아, 그래? 역사가 깊은 곳이었구나.”

카이든은 미간을 좁힌 채 앉아 있다가 떨떠름하게 입을 열었다.

“돌연 잠적을 하기 전까진 그 자식이 마법 역사에 획을 그을 만한 업적을 많이 남겼지. 잠적한 이유가 그 X 같은 실험 때문이었다는 점이 진짜 어이없지만.”

그렇게 대답한 카이든이 나를 보며 말했다.

“더 궁금한 게 있으면 말해. 저택에서 가져다줄게. 그런 건 쉽게 구해올 수 있어.”

그렇게 말하던 카이든이 돌연 씨익 미소를 지었다.

“아, 이 XX 일기도 많이 썼나 봐. 책은 절대 뒤지지 말라고 노발대발하네. 내가 일기도 꼭 찾아서 플로네 저택으로 보내줄게.”

남의 일기 같은 거 별로 보고 싶지 않은데. 하지만 카이든은 지금 제나스를 골려주는 데 심취한 것 같았다.

그리고 다시금 우리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나는 멍하니 제나스의 책을 내려다봤다. 마음이 공허했다.

“사실 지금 너무 허탈해.”

오랜 침묵을 깨고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다들 외면하고 있는 것 같지만, 나와 같은 생각이었을 거다. 황제의 앞에까지 나서서 나를 음해하려던 대주교가 이렇게나 별볼일없는 인간이었다니.

그때 카이든이 입을 열었다.

“제나스를 제외하곤 너무 멍청이들이라 금방 해치워버릴 수 있을 것 같아서 걱정은 안 되는데. 문제는 로하데 노친네와 함께 사라진 혈서란 말이지.”

로하데 노친네라고 하면 로하데 후작을 말하는 것일 테다. 나는 카이든의 말에 그제야 주머니에서 어머니가 줬던 쪽지를 꺼냈다.

“맞다, 이거 빌터하임 공작 각하께 받은 쪽지인데, 로하데 후작이 알레아 섬을 찾아 떠난 모양이야.”

“하. 그 망할 노친네.”

카이든이 욕설을 중얼거릴 때까지도 에녹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는 내가 내민 쪽지를 가만히 노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알레아 섬은 디에고 형제가 먼저 찾아낼 거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군.”

에녹은 정말로 걱정하지 않는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들이 파티에서 마력석을 사용하는 현장을 검거하려면 제국군을 대기시켜야 하는 거 아닐까요? 에녹은 어떻게 생각해요?”

“대주교가 한 말을 온전히 다 믿을 수는 없지만, 제국군을 대기시키는 편이 좋겠군.”

대주교의 말이 사실이든 거짓이든 내 생일파티에서 뭔가를 하려고 한다는 건 우선 확실했다.

차라리 그때 전부 잡아서 멱이라도 딸 수 있었으면 속이라도 시원할 것 같은데. 나는 고단한 얼굴로 관자놀이를 누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우선, 모란꽃 놈들이 파티에서 마력을 쓸 수 없도록 플로네 저택에 결계를 쳐야 할 것 같은데. 생일파티 하기 전에 내가 방문해도 돼?”

카이든이 초롱초롱한 눈을 하고 내게 묻자, 에녹이 재빨리 대꾸했다.

“그렇다면 나도 함께 가지.”

카이든이 대번에 에녹을 노려보기에 나도 빠르게 끼어들었다.

“둘 다 오세요. 아버지, 어머니께는 말씀드려놓을게요.”

앞으로의 계획도 세우고 나니, 순식간에 피로가 몰려왔다. 정말로 이 소파에서 잠이라도 들 수 있겠다 싶었다. 너무 허무한 악당들이라 복수고 뭐고 쉬고 싶은 마음만 들 정도라니.

“건빵 왕자님하고 성녀님도 있었으면 좋겠다. 같이 논의하면 좋았을 텐데.”

“뭐야, 마거릿. 그 말은 조금 서운하네. 우리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거야?”

“어? 아……. 그 말은 아닌데.”

“너, 우리랑 이렇고 저렇고 별거 다 한 거 잊었어?”

옆자리에 앉은 카이든이 엉덩이를 끌어당겨 내게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이렇고 저렇고 별거라니. 누가 들으면 오해…….”

순간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시종과 내 눈이 마주쳤다. 카이든이 조금 전에 주문한 차를 가지고 들어온 것이리라. 시종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아무래도 조금 전의 대화를 들은 모양이다.

나는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카이든 때문에 내가 살 수가 없어……!

나는 시종이 차를 세팅하고 나가자마자 카이든을 노려봤다.

“오해할 건 없지 않나. 사실이긴 하니.”

뜻밖에도 에녹이 카이든을 두둔했다. 나는 배신감에 가득 찬 얼굴로 에녹을 쳐다봤다.

“왜, 마거릿. 그걸로는 부족한 것 같아?”

가만히 나를 지켜보던 카이든이 물었다.

“뭐?”

내가 황당한 얼굴로 반문하자 카이든이 내게로 고개를 바짝 기울였다. 그가 내 턱을 잡았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코앞에서 반짝였다.

“모른 척하지 마. 그때 나눴던 키스 말이야.”

그의 뜨거운 시선이 내 입술 위에 닿았다. 그 순간 커다란 손바닥이 카이든과 내 사이를 갈랐다.

“이만 용건은 끝난 것 같으니, 우린 가보는 게 좋겠군.”

에녹이 그런 말을 하며 나를 공주님 안기 하듯이 번쩍 안아들었다. 그런 에녹을 향해 카이든이 신경질을 부렸다.

다들 그래도 조금 전보다는 기운이 난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에녹의 품에서 다시 내려왔다.

“아, 가기 전에 너한테 줄 선물이 있어.”

카이든이 책상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내왔다. 두둑한 무언가가 들어가 있는 주머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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