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201)화 (20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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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에게 받은 쪽지엔 로하데 후작이 알레아 섬을 찾아 혈서를 들고 떠났다는 내용의 메모가 적혀 있었다.

빌터하임 가문에서 로하데 후작에게 사람을 붙여둔 건데, 다행히도 후작의 동향이 파악된 모양이었다.

‘얼른 에녹, 카이든과 공유해야지.’

마침 마탑 앞에 도착했기에 나는 마차에서 내렸다.

그때 길을 지나던 꼬마가 내게 일간지 신문을 건넸다. 나는 굳이 마다하지 않고 꼬마에게서 신문을 구입하고 펼쳐보았다.

[마거릿 로즈 플로네가 달라졌다?!

플로네 영애와 황태자, 마탑주의 삼각관계는 과연 사실인가!]

낯부끄럽게 내 이름이 대서특필되어 적혀 있었다. 아무래도 시사뉴스 위주로 서술되는 신문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나는 대충 신문지를 돌돌 말아 옆구리에 낀 뒤, 마탑을 바라봤다. 하늘 높이 치솟은 건물은 한눈에 다 담기지 않을 정도로 거대했다.

고개를 살짝 내리니 마탑의 입구에 에녹이 서 있었다. 간밤에 입었던 제복과는 다른 간소한 차림의 의상이었지만 굉장히 화려하고 그에게 무척 잘 어울리는 옷이었다.

팔짱을 낀 채로 벽에 등을 기대고 선 그는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나는 팔랑팔랑한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가서 뒷짐을 지고 허리를 기울이며 에녹을 올려다봤다.

“오래 기다렸어요?”

에녹의 황금색 눈동자에 그제야 초점이 잡혔다.

“아니, 나도 금방 왔다.”

나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다소 퇴폐적이라 아침부터 설레게 한다. 저 매력적인 목소리에 담긴 것이 내 이름이라니, 기분이 이상했다.

그가 내 손등에 부드럽게 입맞춤을 했다. 그의 입술이 닿은 손등이 뜨거웠다. 나는 바짝 긴장을 한 채로 에녹을 쳐다봤다. 오늘따라 분위기가 조금 묘했다.

나를 보는 에녹의 시선이 무거웠다. 나는 슬그머니 그의 시선을 회피하며 마탑의 입구를 가리켰다.

“들어갈까요?”

에녹은 말없이 나를 따라 마탑 안으로 들어왔다.

로비에서 잠시 대기를 하던 중, 그가 다시금 깊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마거릿.”

“네?”

“묻고 싶은 게 있다.”

나는 의아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봤다.

“묻고 싶은 거요?”

에녹의 고요한 금안이 내 얼굴을 샅샅이 훑는다. 마치 내 모든 것을 파헤치겠다는 듯이.

“그대는, 과거의 일들을 모두 기억하는가. 나와 있었던 일, 나와 나누었던 대화 전부.”

질문이 묵직하고 무겁다.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어보는 걸까.

“어……. 네. 기억해요.”

“아직도 과거의 자신을 지금의 그대와 분리해서 생각하나.”

“…….”

이것 또한 뜻밖의 질문이다.

하지만, 새삼스러울 건 없는 질문이기도 했다. 섬에서 루제프가 했던 질문하고도 비슷했으니까. 그때의 난 뭐라고 답했더라.

‘교황청에서 제가 본 플로네 영애와, 지금의 당신. 어느 쪽이 본 모습입니까.’

‘……질문이 이상하네요. 둘 다 저예요. 전 과거의 저도 받아들이기로 했어요. 그러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테니까.’

그랬다. 그때의 난 과거의 나도 받아들이기로 했었다.

나는 마거릿으로 22년을 살다가 이진주로 27년을 다시 살고 왔다. 그래서인지, 과거의 마거릿이 내게는 까마득한 옛날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왜, 일곱 살 시절의 나와 스무 살의 내가 같을 수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나를 그렇게나 경멸하던 에녹 또한 섬에서 이진주였던 나를 만나고 바뀌었을 것이다.

“그때의 저도 저예요. 전하께 상처가 되는 말을 많이 했던 거 알아요. 죄송해요.”

마거릿도 이진주도 전부 나다. 하지만 과거의 나는 에녹에게 미움 받을 짓만 골라 했다. 그러니 그가 나를 싫어했던 건 당연했음에도 씁쓸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제가 다른 삶을 살게 된 게 그래서였나 봐요. 신께서 벌을 내린 걸지도 몰라요. 정신 좀 차리라고.”

내 대답에 에녹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대는 예나 지금이나 궤변에 능해.”

“이게 무슨 궤변이에요?”

“나도, 그대도. 과거엔 서툴렀다고 하지.”

“네?”

“사과는 이제 그만하면 됐다는 말이야.”

무슨 뜻이냐고 반문했지만, 에녹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사과는 그만하면 됐다니, 진심일까.

그때 마탑의 직원 한 명이 로비에서 기다리던 우리에게 인사했다.

“로드께서 잠시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두 분을 집무실로 안내해드리라고 말씀하셨는데, 가시겠습니까. 금방 돌아오실 겁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에녹과 함께 마탑의 계단을 올랐다.

“불편하지 않나. 업어줄까?”

에녹이 걱정스레 내 드레스를 보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씩씩하게 대답했다.

“잊으셨어요? 저 드레스에 플랫슈즈를 신고 등산도 한 여자예요.”

내 대답에 그제야 에녹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씩씩하게 말하긴 했지만 그래도 플랫슈즈가 아닌 구두를 신고 계단을 오르는 건 조금 힘들긴 했다.

젠장, 괜히 씩씩한 척 했나. 무슨 계단이 이렇게 많은 거지? 나는 밖에서 봤던 건물의 높이를 떠올리고 잠시 아연해지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설마 꼭대기까지 올라가야 하는 거 아니겠지? 여긴 왜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도 없지? 왜 워프게이트는 없어! 마법사들의 탑이라며!

“잠시.”

그러자 에녹이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앗!”

“무슨 일이십니……!”

내 작은 비명을 듣고 앞서 계단을 오르던 마법사가 등을 돌려 우리를 쳐다봤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의 얼굴이 썩은 사과처럼 변했다. 그는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고개를 돌리고는 계단을 마저 올라갔다. 무례한 시선이지만 지적할 수는 없었다. 부끄러운 짓을 한 건 사실이기에.

“내려주세요.”

“정말 그러길 원하나?”

에녹이 의아한 얼굴로 나를 안고 계단을 오르면서 물었다.

나는 조금 민망하게 따라 웃고는 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럼 실례할게요.”

그와 몸이 바짝 밀착하자 긴장으로 몸에 힘이 들어갔다. 내 심장 소리가 그에게까지 들리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는 호흡 한번 흐트러지지 않고 나를 안은 채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이러고 있으니 정말로 알레아 섬에서 그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다행히도 카이든의 집무실엔 금방 도착했다.

도착한 층에는 문이 하나 있었고 우리를 그 안으로 안내한 마법사는 차를 내오겠다며 사라졌다.

집무실의 내부는 천장이 굉장히 높았는데, 양 옆면에 책이 천장까지 빼곡하게 차 있었다. 나는 조금 신기한 마음으로 집무실을 둘러보았다. 마법사들의 집무실은 이렇구나.

“……어?”

“왜 그러지?”

내가 의아한 얼굴로 외친 소리에 에녹이 다가왔다. 나는 책장 한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여기 제나스에 관한 책들이 있네요. 잉그람 왕조 시절에 관한 책들도요.”

나는 곧장 책 한 권을 뽑아 들었다.

[위대한 마법사, 제나스 이그란 로하데.]

위대한 마법사라니.

……위대한 마법사긴 하지.

에녹이 흘끗 나를 보고는 고민하는 얼굴로 책을 훑는 게 보였다. 나는 잠시 서 있는 채로 책을 살폈다.

[……(중략) 제나스는 굉장히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선천적으로 마력을 타고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땅에 태어난 사람이라면 대부분은 소량이라도 마력을 타고나길 마련인데, 제나스는 그마저도 없었다고 한다.]

오. 이건 몰랐던 사실인데. 제법 흥미로워 나는 책을 들고 와 소파에 앉아 본격적으로 제나스의 일대기를 읽었다.

[천 년 전엔 비마력인에 대한 혐오가 만연했다. 마력을 가지지 않은 사람을 하등한 생물 취급하는 인식이 있었다. 이러한 멸시의 풍조는 잉그람 왕조 666년에 절정에 달해, 대규모의 비마력인 박해 사건들이 발생했다. 마력을 가지지 않은 이들은 마력을 가진 이들에게 사냥을 당했다.

당시 비마력인으로 알려졌던 제나스 이그란도 그들의 칼날을 피해갈 수 없었다.]

나는 잠시 놀라서 펼쳤던 페이지에서 호흡을 멈춘 채로 눈을 깜빡였다.

비마력인 박해와 사냥. 이 끔찍한 단어도 놀랍지만, 제나스가 그런 일을 당했다는 것이 가장 놀라웠다.

그런데 잉그림 왕조 666년이면 알레아 섬 지도에 적힌 날짜와 동일한 것 같은데…….

666년에 지도를 만든 것이 아니라, 그저 그 해 자체가 제나스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알레아 섬을 만든 계기와 연관이 있는지도.

[제나스는 운이 좋았다. 그는 마법사들에게 사냥 당하기 직전 각성했다. 그가 선천적으로 마력을 갖고 태어나지 않은 게 아니라, 마력이 흐르지 못하고 몸 안 어딘가에 고여 있었던 것이다.

죽음은 면했으나 이미 심한 고초를 겪은 후여서 마력을 가진 사람과 신력을 가진 사람을 향한 그의 증오는 상상 이상이었다.]

마력을 가진 사람과 신력을 가진 사람을 증오한다니. 이것 또한 처음 아는 사실이다. 하긴 내가 제나스에 대해 뭘 알겠어. 그동안 난 제나스가 마법사를 위한 마법사쯤 된다고 생각했는데 의외였다.

‘아니지. 마법사를 위한 마법사라기보단, 정확히 말하자면 로하데 가문을 위한 마법사였지.’

하긴 돌이켜보면 그가 딱히 마법사에 대한 긍지나 애정 같은 것을 비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비마력인 박해 사건으로 어지러운 시국에 잉그람 왕국에 반란이 일어난다. 이때 제나스는 비마력인 박해를 주도하던 잉그림 왕조를 몰락의 길로 이끌었다.

이후 그는 란그리드 건국에 큰 공헌을 하며, 로하데라는 작위를 받았으나 고작 후작위를 받는 것에 그쳤다. 그가 비마력인으로 박해를 받은 이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나스는 잉그람 왕조를 몰락시키기만 하면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거라 여겼지만, 결론적으로는 란그리드도 잉그람과 별다른 게 없었던 것이다.]

와. 나쁜 XX들. 빼먹을 거 다 빼먹고 적당히 치웠다는 거네. 제나스가 삐뚤어질 만도 했다. 물론 그렇다고 그가 인간말종에 나쁜 놈인 건 변함없지만.

“무슨 문구를 봤길래 그런 표정이지?”

맞은편 소파에 앉아 나를 관찰하던 에녹이 물었다. 나는 들고 있던 책을 접고 어깨를 으쓱였다.

“제나스가 미친 실험 섬을 만든 이유가 마력과 신력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복수는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내 말을 들은 에녹의 한쪽 눈썹이 까딱 올라갔다. 내 말을 곱씹는 듯했다.

“사실 이제 와 그게 뭐가 중요하겠어요. 이젠 제나스의 계획도 다 무너졌는데.”

그때였다. 집무실 문이 열리고 조금 전 우리에게 길 안내를 해 준 마법사와 함께 카이든이 나타났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도착 시간이 생각보다 늦어졌네.”

그는 피곤한 얼굴로 우리를 한번 쳐다보고는 고갯짓을 했다.

“바로 보러 갈래?”

그가 뭘 말하는지 단번에 이해했다. 나와 에녹이 마탑을 찾아온 이유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를 따라 계단을 한층 더 올라갔다.

“어디 다녀온 거야?”

카이든이 퀭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로하데 저택. 지하실의 봉인이 더 강화됐더라고. 혈서를 찾는 게 쉽지는 않을 것 같아.”

예상했던 일이라 카이든의 말에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한층 더 올라오니, 방이 하나 있었는데 그 방에는 우리를 안내해 준 마법사는 들어올 수 없었다.

나는 카이든이 문을 잠그는 것을 보며 차분히 방안을 둘러보았다. 사실 둘러보고 할 것도 없었다. 방 안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의자에 대주교가 묶여 있었고 그의 의자 주위로는 마법진과 마법진을 에워싼 양초가 있었다.

낯설지 않은 마법진이다. 이건 흡사…….

“맞아. 아나타를 산채로 봉인했던 마법진이야.”

카이든의 대답에 나는 그제야 오두막에서 제나스에 의해 마법진 안에 갇혔을 때를 떠올렸다.

온몸이 부르르 떨린다. 알레아 섬에서의 끔찍한 경험이 새삼스레 떠올랐다.

눈앞의 대주교는 거기에 일조한 인간이다. 그 점을 상기하자 서서히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읍! 읍읍!”

마법진 안에서 대주교가 의자에 묶이고 재갈이 물린 채로 발버둥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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