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200)화 (200/234)

이니스에게서 헤스티아 왕국에 피바람이 불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아마도 아스달이 복귀하며 시원하게 물갈이를 한 모양이다.

아스달이 편지 끄트머리에 전하기로는 마력석 1개를 회수했다고 한다. 생일파티에 가지고 올 테니, 은지에게 파괴를 부탁한다는 말도 적혀 있었다.

마력석을 찾았다니 다행이다. 벌써 15개의 마력석 중 3개를 찾은 셈이다. 유안나와 루제프 쪽도 마력석을 찾았다는 내용일까?

나는 기쁜 마음으로 뒤이어 유안나의 편지를 뜯었다.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자 영원할 친구인 마거릿에게.]

그리고 도입부의 멘트를 잠시 흐린 눈으로 바라봤다. 음, 틀린 말은 아니지만 굉장히 부끄러운데.

[……(중략)마력석을 두 개나 찾았어요. 그리고 교황청에 차원의 균열에 대해 연구한 연구일지가 있더라고요. 정확히는 마력과 신력의 과용이 세계에 미치는 영향 같은 재미없는 내용이지만. 관련된 자료는 이것뿐이라…….]

차원의 균열? 마력과 신력의 과용이 세계에 미치는 영향이라니.

[이게 무슨 말인지 궁금하죠? 자세한 건, 만나서 얘기해 줄게요. 제가 마거릿의 생일파티를 얼마나 고대하고(후략)…….]

이어지는 내용은 내 생일파티에 트윈룩으로 드레스 코드를 맞추자는 내용이었다. 나는 대충 내용을 훑고는 이번엔 루제프의 편지를 꺼내 읽었다.

[친애하는 플로네 영애께.]

고민을 많이 했는지 잉크가 고여 있는 글씨가 굉장히 많았다.

[……(중략)이번엔 정말로 멋진 꽃을 선물해드리겠습니다. 부디 영애께서 기뻐해 주셨으면 좋겠군요.]

이번엔? 내가 루제프에게 꽃 선물을 받은 적이 있었나? 나는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외에는 별다른 내용 없이 안부 인사가 적혀 있었다. 나는 다 읽은 편지들을 한데 모아 정리하고는 외출준비를 시작했다.

로드반의 것과 귀환 파티에서 은지가 먹은 마력석까지 포함하면, 지금까지 5개의 마력석을 빼앗은 것이고 모란꽃 세력에겐 총 10개의 마력석이 남은 것이다.

없어진 마력석 때문에 지금 즈음이면 그들도 우리가 마력석을 회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뭔가 대책을 세우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오늘은 카이든의 마탑에 방문하기로 했다. 나머지 마력석 10개도 회수하려면 어제 파티에서 데려온 대주교의 입을 털어보는 수밖에.

* * *

어릴 적의 에녹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평민 소생의 황자라며 경멸을 받고 천대를 받기 일쑤였다.

그렇다고 어머니를 부끄러워했냐고 묻는다면 글쎄. 그는 어머니를 제 눈으로 본 적이 없었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낳고서 곧장 독살을 당했다. 모두가 범인은 황후일 거라 말했지만 증거가 없었다.

어린 에녹이 홀로 살아남기에 황실은 살얼음판처럼 차가웠다.

황후에게서 난 적통 핏줄인 로드반이 있었지만, 황제는 가장 능력 있는 후계에게 황태자위를 내리겠다고 선언했다.

경쟁은 치열했고 또 비열했다. 다른 무엇도 아닌 황태자 자리를 두고 하는 경쟁이라 어린아이들에게도 무척 혹독했다.

‘에녹. 양심이 있으면 그냥 얌전히 찌그러져 있어. 아무도 네가 이 경쟁에서 승리하길 바라지 않아.’

에녹의 바로 손위 형제가 그에게 했던 말이다. 그 말을 듣고 에녹이 주춤했냐고 묻는다면, 그것도 글쎄.

그는 에녹에게 그렇게 경고를 하고 바로 다음 날 죽었다. 마차사고로.

그때부터 시작됐다. 에녹의 형제들이 의문의 사고로 죽어가던 것이.

‘야. 천한 냄새 묻으니까, 썩 꺼져.’

라고 말하던 그의 둘째 형도,

‘오늘 시험에서 만점을 받았단 얘기 들었어. 그런데 우쭐해하지 마. 네가 만점을 받아도 기뻐할 사람은 여기 아무도 없으니까.’

라고 말하던 그의 셋째 형도.

‘식사자리에는 왜 그렇게 꼬박꼬박 나오시는 거예요? 모두가 오라버니 싫어하는 거 알면서. 내일부터는 그냥 방에서 혼자 드세요. 그게 더 어울릴 것 같은데.’

라고 말하던 여동생도 죽었다.

황후 소생의 로드반과 에녹을 제외하고는 전부 죽었다. 황후의 계략 아래. 경쟁을 하라고 말하던 황제도 눈을 감아주었다. 그에겐 그것 또한 일종의 경쟁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에녹이 가장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이유는 간단했다. 로드반에게 위협이 되지도 않을 만큼 미천한 뒷배를 가졌기 때문이었다. 그의 생존에 도움이 되었지만, 유쾌한 사실은 결코 아니었다.

아마도 그 시기였을 것이다. 마거릿을 만난 것은.

‘세상에, 재투성이 황자가 이렇게 멋있다는 얘기는 없었잖아요.’

그의 얼굴을 처음 본 마거릿이 그를 면전에 두고 한 말이었다. 천박하다는 의미로 그를 재투성이 황자라고 부른다는 얘기는 종종 들었었다. 재투성이 황자와 반쪽짜리 황자 중 뭐가 더 나은지는 우열을 가리기 어려웠다.

‘좋아해요.’

마거릿은 제 욕망에 충실한 여자였다. 그리고 공작 영애답지 않게 무례하고 저돌적이었다. 어쩌면 그에게는 그래도 된다는 생각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전하께서 왜 저와 결혼도, 약혼도 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시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전하께서 가지지 못한 걸 가졌잖아요. 순수 귀족 혈통이요.’

그래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겠지. 에녹은 플로네 공작 가문의 위세에 어쩔 수 없이 마거릿과 티타임을 가지면서도 종종 환멸을 느꼈었다.

사실 그녀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다. 그래서 더욱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플로네 공작 영애 즈음 되는 여자가 왜 하필 저와 결혼을 하겠다고 이 난리를 피우는지.

플로네 공작 부부의 유별난 딸 사랑은 유명했다. 그 사랑을 등에 업고 그늘 한 점 없이 자란 부부의 세 딸도 유명했다.

그가 늘 동경하고 갈망하던 고귀한 신분을 타고 난 마거릿이지만, 그는 그녀가 부럽지 않았다. 플로네 공작 부부의 세 딸 중 가장 아름답다고 소문난 외모를 보고도 에녹은 그저 그 외모가 아깝다는 생각만 했을 뿐이다.

그를 좋아한다 말했으나 그를 대하는 그녀의 태도에는 그에 대한 존중이 털끝만큼도 없었다.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어차피 그는 살면서 그를 존중하는 사람이라곤 단 한 명도 만나본 적이 없었으니까.

어느 날은 마거릿이 그런 말을 했었다.

‘제가 매번 전하를 모욕해서 기분 나쁘세요?기분 나쁘시면, 황태자가 되세요.’

‘뭐?’

기가 찬 그의 반문에 마거릿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아니, 보통은 억울하면 권력을 가지려고 하지 않나요? 그걸 하라고 말씀드린 것뿐인데요. 솔직히 순수 능력만 놓고 보자면, 그럴 능력은 있으시잖아요. 절 이용하시라니까요. 존중이란 권력에서 나오는 거예요.’

마거릿의 논리대로라면 그는 제 형제들의 죽음을 방관한 황제도, 제 형제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황후와 로드반도 존중해야 함이 맞다.

‘영애의 주장은 틀렸어. 존중은 인품에서 나오는 거야.’

‘흠. 그건 세상이 평등했을 때나 통하는 얘기죠. 지금 세상은 권력부터 가지는 게 우선이에요. 나머진 그 다음. 원하는 게 있다면 그때 해도 늦지 않을걸요?’

‘들을 가치도 없군.’

그렇게 말했지만, 에녹은 그 말 역시도 틀리지 않았음을 알았다. 아무런 생각이 없어 보였던 마거릿은 나름의 신념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그의 속을 긁었다. 그 점이 더욱 악질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확실히 그에게는 자극이 됐다.

물론 그따위 자극도 결국 로말리잔 전투로 파병을 나가며 끝이 났지만.

로말리잔 전투에서 생사를 넘나들며, 에녹은 결심했다. 마거릿의 말대로 황태자가 되어야겠다고.

-지금 세상은 권력부터 가지는 게 우선이에요. 원하는 게 있다면 그때 해도 늦지 않을걸요?

전투에서 죽을 고비를 넘길 때마다 마거릿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러나 막상 승전보를 울리고 귀환을 한 뒤, 로드반에게서 황태자위를 빼앗고 나자 허망한 기분이 들었다.

권력을 가졌지만, 행복하지 않았다. 수많은 피를 뒤집어쓰고 오른 자리여서일까.

그런 그에게 마거릿은 청혼을 해왔다.

‘황태자가 되셨으니 더 중요하잖아요, 결혼은. 입지를 다져야 하니까. 플로네 공작 영애인 제가 전하를 좋아하는 걸 다행으로 여기세요.’

‘그래. 그렇다면, 묻지. 영애가 날 좋아하는 이유, 정말 내 외모뿐인가.’

그의 물음에 마거릿은 한동안 대답 없이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저도 궁금해요. 전하께선 전하의 외모가 전하의 다른 면들보다 무가치하다고 여기시나요? 그것 또한 전하의 일부잖아요.’

‘내 노력 없이 타고난 것 아닌가.’

‘외모 보고 좋아하기 시작한 게 그렇게 질타 받을 일인가요? 아 혹시, 제가 전하를 위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가 알고 싶으신 건가요?’

에녹은 할 말을 잃었다. 그녀와 말을 계속 섞어봐야 이런 동문서답이나 하고 있을 터였다. 여전히 그녀는 그를 배려하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그 뒤에 있었던 사건이 바로 사랑의 묘약 사건이었다.

‘전하께서는 늘 제 마음을 부정하시잖아요.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데 꼭 명확한 이유가 필요한가요? 저도 전하께 아무런 이유 없이 사랑받고 싶었어요.’

궤변이다. 마거릿은 반성조차 하지 않았다. 마거릿이라면 지긋지긋했고 그녀가 그를 사랑한다는 명목으로 그를 옥죄는 것 또한 진절머리가 났다.

하지만, 애써 그녀를 머릿속으로 지워낼 때마다 뼈를 후벼파듯 그녀의 목소리가 그의 내부에 파고들었다.

‘존중이란 권력에서 나오는 거예요.’

그 사실을 좀 더 일찍 깨달았다면 그는 우울한 유년 시절을 겪지 않고 조금 더 순탄하게 자랄 수 있었을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어느덧 마거릿에게 세뇌라도 당했는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데 꼭 명확한 이유가 필요한가요? 저도 전하께 아무런 이유 없이 사랑받고 싶었어요.’

그녀가 그에게 했던 말과 행동들을 결단코 용서할 수 없었으나, 에녹은 그 말을 그 누구보다 공감했다.

그는 아무 이유 없이 사랑받고 싶었다.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그런 사랑 한 조각 즈음은 받아볼 수 있었을까?

무엇보다 그는 그 말을 그가 가장 경멸하는 여자에게서 듣게 된 것이 몹시 비참했다.

에녹은 마거릿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를 혐오하면서도 그녀가 했던 말들을 모두 이해한다. 그녀는 그와 너무 다른데 그녀의 말에 공감했다. 그런 자신이 싫고 역겨웠다. 참을 수 없이.

“오래 기다렸어요?”

과거의 기억 속에 파묻혀 있던 에녹은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야로 화려한 인상의 미인이 눈에 들어온다.

자신이 그녀를 기다리면서도 내내 그녀 생각을 했다는 걸 그녀는 알까.

“아니, 나도 금방 왔다.”

에녹은 그녀의 손등에 경건한 마음으로 입맞춤을 했다. 자신에게 내밀어진 그녀의 손이 어여뻤다.

과거의 자신은 마거릿을 정말 싫어하고 경멸했던 것이 맞을까. 어쩌면 인정하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말에 공감하고 이해하고 있던 자신을.

그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마거릿. 묻고 싶은 게 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