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198)화 (198/234)

“저 XX들이 지금 뭐라는 거야.”

나는 카이든을 돌아봤다.

“뭐라는지 들려? 아니면 마법으로 뭐라고 하는지 들을 수는 없어?”

“마법이 만능은 아니라니까.”

카이든이 한숨을 내쉬고는 정원 아래, 한창 대화 중인 이들을 빤히 노려봤다.

“네 생일파티에 뭔가 일을 치른다는 내용인데, 정확히 뭘 한다는지는 얘기를 안 하네.”

“뭐야, 마법이 만능은 아니라며.”

내 물음에 카이든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마법 아니야. 그냥 귀가 밝아서 들린 거야.”

“그보다 이렇게 되면, 대주교의 마력석만 빼앗을 게 아니라 그들의 계획이 뭔지 추궁을 해야겠군.”

에녹이 팔짱을 낀 채, 고요한 시선으로 정원에 있는 이들을 보며 말했다.

그때 아래서 대화를 나누던 이들이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에녹과 카이든을 잡아당겨 황급히 테라스 난간 아래로 고개를 숙였다. 양옆에서 카이든과 에녹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저희를 봤을까요?”

“내가 조금 전에 결계 쳐 뒀잖아, 마거릿. 괜찮아.”

카이든의 대답에 나는 조금 민망해져서 잡은 옷자락을 놓았다.

나는 우선 난간 위로 슬쩍 고개를 들고 다시 정원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러나 자리를 떠났는지 조금 전까지 모여 있던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뭐야. 다 가버렸네.”

어깨에 매달려 있던 은지도 혀를 날름거리며 나를 따라 정원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보다 마거릿, 너 정말 춤 안 출 거야?”

카이든의 물음에 에녹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흘끗 나를 쳐다봤다. 그도 내심 궁금했던 모양이다.

“X같이 구는 따까리 넘버투, 그 XX X치고 나랑 춤추자.”

따까리 넘버투라니. 그 말에 문득 루제프가 떠올랐다. ‘따까리’가 추억을 회상하는 단어가 될 줄이야.

“춤은 나와 먼저 추기로 되어 있는데.”

“그게 무슨 X소리입니까?”

에녹이 시비를 걸자 카이든이 바로 맞받아쳤다. 카이든은 진짜 황태자고 뭐고 눈에 보이는 게 없다.

에녹은 저 문제아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미간을 좁혔다. 그는 이내 태도를 전환하여 애처로운 눈으로 나를 돌아봤다.

“마거릿, 아까 그러기로 했잖아. 나와 추기로.”

“제가요?”

황당해서 반문했다가 나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춤은 절대 안 돼요. 그리고 왜 이렇게 춤에 집착해요. 지금 대주교를 먼저 해결해야죠!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요. 빨리 계획을 말해 봐요.”

그래. 중요한 건 춤이 아니다. 지금은 모란꽃 문양을 가진 그 대주교에게 마력석이 있는지 확인하고 내 생일파티에서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알아내야 했다. 그리고 그들 세력의 규모와 앞으로의 최종 목적까지 정확히 알아내면 금상첨화일 터.

아니, 섬에서 탈출을 하고서도 이렇게 힘들어야 하나? 그냥 쉬고 싶다.

내가 한숨을 내쉬자 에녹과 카이든이 잠시 서로의 얼굴을 보며 눈빛 교환을 한 뒤, 나를 쳐다봤다.

결국 두 사람은 춤을 추지 않겠다는 내 고집을 꺾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 셋은 다시 대주교의 마력석을 빼돌리기 위한 작전 세우기에 골몰하게 되었다.

열띤 토의 끝에 우린 파티 끝물에 저들이 귀가하는 길을 노리기로 했다. 마차를 탄 뒤에는 돌이킬 수 없으니, 그 직전이어야 한다.

그렇게 논의를 마치고 파티가 한창인 연회장 내부로 돌아오니, 역시나 교황청 사람들과 마법사 협회 원로의장도 돌아와 있었다.

얌전히 파티가 무르익기를 기다리는데, 어디서 나타난 건지 아버지와 어머니가 교황청 사제들에게 갑자기 포도주 세례를 하고 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리고 뜻밖에도 포도주 세례를 맞은 교황청의 사제들이 어머니에게 인사를 하며 죄송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우리 망나니!”

뒤늦게 나를 발견한 아버지와 어머니가 단숨에 달려와 나를 끌어안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굉장했다.

“괜찮니? 우리가 잠시 빌터하임 공작과 대화를 나누고 온 사이에 어처구니없는 일이 있었다던데.”

어머니와 아버지가 화를 터트리며 대놓고 교황청 사람들을 험담했지만, 그들을 나무라는 이는 없었다. 새삼 두 분 다 참 대단한 성격을 가지고 있구나 싶었다.

나는 두 분께 이후에 있을 계획을 말씀드려야 하나 싶었지만, 말을 아끼기로 했다.

‘왠지 말하기 무서워.’

일을 다 치른 뒤에 말씀드려야지. 나는 그렇게 화를 터트리는 부모님을 다독이며 웃었다. 조금 전까지 피곤하고 힘들었던 감정이 눈 녹듯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이렇게 무조건 내 편이 되어 주는 사람들이 있다니. 뭔가 굉장히, 기분이 좋다.

* * *

플로네 공작부부를 다독인 마거릿이 다시 에녹과 카이든에게로 돌아왔다.

때마침 교황청 사제들이 무리 지어 어디론가 사라지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계속해서 무리 지어 움직였기 때문에 대주교만을 따로 빼돌리기가 쉽지 않았다.

마거릿이 그쪽을 향해 움직이는 걸 보고 카이든은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마거릿. 위험할 것 같으면 뒤로 물러나.”

그의 말에 마거릿이 예쁘게 눈웃음을 짓는다. 그 미소에 카이든은 잠시 숨을 삼켰다.

“걱정해줘서 고마워. 그런데 섬에선 이것보다 더한 경험도 많이 했잖아. 저 바보들이 운이 나쁘지. 하필 우리를 실험체로 골라서.”

그녀가 그의 어깨를 토닥이고는 망설임 없는 걸음걸이로 앞으로 나아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거릿은 보통 여자가 아니야.]

그의 머릿속에서 제나스가 중얼거렸다.

[여기보다는 잠시 머물렀다는 차원 너머 세계가 더 잘 어울릴 수도 있겠군.]

카이든은 대답하지 않고 앞서 걷는 마거릿의 뒤통수를 바라봤다.

그쪽 세계가 마거릿과 더 어울린다고? 그건 말도 안 된다.

제나스가 자신의 일생을 ‘로하데 가문의 영광’과 ‘알레아 실험’에 바치고자 했다면, 카이든은 ‘로하데 가문의 몰락’과 ‘마법’을 위해 바치고자 했었다.

그래서 그가 새롭게 겪고 느끼는 감정들은 모두 마거릿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그래서 더더욱 그녀를 잃을 수 없었고 놓아줄 수 없었다. 제아무리 에녹이라 할지라도 마거릿을 양보할 순 없었는데 하물며 모란꽃 세력 따위에 마거릿의 신경이 쏠리는 꼴은 더더욱 볼 수 없었다.

마거릿이 요즘 부쩍 힘들어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정작 본인은 모르고 있는 것 같았으나 알레아 섬에서 탈출한 뒤로도 마음 편히 쉰 적이 없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빨리 전부 없애 버리고 마거릿을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곳으로 납치라도 해야지. 안 되겠어.’

물론 정말로 마거릿을 납치할 생각은 아니지만, 필요하다면 그렇게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며 카이든은 고개를 들었다.

시야 끝에 교황청 사제들의 뒷모습이 보였다.

‘진짜 다 쓸어버릴까.’

그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후손님, 내가 도와줄까?]

제나스가 그의 귓가에 악마처럼 속삭였다. 그리고 그 속삭임에 카이든이 정신을 차렸다.

발현.

‘X수작 부리지 말고. 닥쳐.’

제나스는 터지지 않는 시한폭탄이었다. 위험하지는 않았으나 부담이 되는 것도 사실.

정신을 바짝 차려야만 했다.

* * *

다행히도 모란꽃 문양이 새겨져 있던 대주교가 가장 뒤처져서 걷고 있는 게 보였다. 나는 은지에게 마력을 나눠줄 준비를 하며 빠르게 그들의 뒤를 쫓았다.

우리가 걸어가는 복도는 1층이었고 개방된 형식의 복도라 창이 없어 난간을 넘으면 곧장 황실 정원이었다. 긴장된 마음으로 발걸음을 서둘렀다.

우선 에녹이 먼저 달려가 그들의 걸음을 막고 시간을 끌기로 했다. 그는 황태자의 신분이었으니 교황청 사제들도 어쩌지 못하고 잠시간은 붙잡혀있어야 할 테다.

“조심하도록.”

에녹이 내 머리를 토닥이고는 앞으로 뛰어갔다. 나는 바짝 굳은 얼굴로 멀어지는 에녹의 뒷모습을 보다가 드레스 주머니를 뒤적여 화염 폭탄을 찾았다.

황실에서 주최하는 파티에 참석하는데 폭탄 같은 걸 꼭 가져가야 하나 회의감도 들었었는데, 이게 이렇게 도움이 될 줄 몰랐다.

“조심해.”

에녹이 했던 말을 반복해 말한 카이든이 황실 정원에 보호 마법을 걸었다. 인명 피해가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순식간에 해치워야 하는 일이었고 카이든은 보호 마법을 걸어야 해서 손이 모자랐으니, 나머지는 나와 은지의 몫이다. 나는 은지에게 마력을 나눠줬고 은지의 몸집이 조금씩 커졌다.

멀리서 에녹과 카이든이 교황청 사람들을 멈춰 세우고 뭔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게 보였다.

실수하면 안 된다. 지금부터 정말 간 큰 짓을 해야 했으니까.

나는 혀로 마른 입술을 축이며 자세를 취했다. 그러곤 화염 폭탄의 핀을 뽑으며 황실 정원 쪽으로 폭탄을 던졌다.

펑! 퍼엉!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사제들이 놀라서 황실 정원을 쳐다보는 것이 보였다. 폭탄이 그들의 시선을 끄는 틈에 에녹이 그들을 부추겨 더욱 혼란을 가중시켰다.

이때다.

은지가 혼자 잠시 동떨어진 대주교를 입안에 삼켜 넣고는 뒤로 물러났다. 뒤늦게 마법 수식 발현을 끝낸 카이든이 나를 따라왔다.

한적한 정원 한구석으로 돌아와서 맛없다는 듯이 사제를 뱉어낸 은지가 켁켁 헛구역질을 했다. 그리곤 다시 실뱀으로 돌아와서는 내 발에 머리를 치대며 힘들다고 칭얼거린다.

순식간에 긴장이 풀렸다. 로드반 폐태자도 그렇고 교황청의 사제들도 그렇고.

섬에서 생존하며 우리가 강해진 건지 모르겠지만, 일이 의외로 쉽게 풀린다. 허탈할 정도로.

나는 자리에 주저앉아 은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끈적이는 점액질로 뒤덮인 채 쓰러져 있는 대주교를 바라보았다.

“으.”

손수건을 꺼내 대주교의 옷을 뒤적이다가 드디어 마력석 하나를 찾아냈다. 다행히도 이놈이 정말 마력석을 가지고 있었다. 은지가 기다렸다는 듯이 마력석을 먹어 치웠다.

이로써 벌써 2개의 마력석을 없앴군.

바닥에 널브러진 대주교를 보며 카이든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거 깨워야 하냐? 만지기 싫은데.”

그때 에녹이 나타났다. 황궁 밖이 시끌벅적했다. 아무래도 연회장 내부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쏟아져 나온 모양이다.

다행이다. 적당히 시선을 끌고 있으니 이 틈에 계획대로 대주교를 데려가야겠다. 그가 모란꽃 세력이고 15개뿐인 마력석 중 하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아는 정보도 많은 자일 테다.

“마거릿, 괜찮나.”

에녹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 안색을 살폈다.

“나는 네가 정말로 황궁에서 폭탄을 던질 줄은 몰랐다. 넌 진짜……. 이럴 때 보면 나보다 간이 커.”

카이든이 손뼉을 치며 감탄하는 사이 에녹이 내게 물었다.

“마력석은.”

“은지가 먹었어요.”

은지가 때마침 꺼억, 하고 트림을 했다.

그때 카이든이 갑자기 휘청거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왜 그래!?”

내가 놀라서 그의 팔을 잡자 그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짜증스럽게 미간을 찌푸렸다. 이윽고 정신을 차린 그가 괜찮다며 내 손을 거부하고 똑바로 섰다.

“모란꽃 세력을 하나씩 찾아낼 때마다 제나스의 영혼이 찢기는 제약을 걸었거든. 그것 때문인데, 후. 두 번째라서 그런지 강도가 조금 올라간 모양이야.”

제나스의 영혼이 찢겼구나.

제나스가 그렇게 계속해서 고통을 받고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천년의 죗값으로는 그 어떤 벌을 받아도 부족하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게 혹시 너한테도 영향을 미치는 거야? 그렇다면 위험하잖아.”

“위험하진 않으니 괜찮아. 아무튼 다들 고생했고 이 틈에 헤어지는 게 좋겠는데. 이놈은 내가 마탑에서 데리고 있을 테니, 내일 마탑으로 찾아와.”

카이든이 황급히 말을 돌리며, 주변을 살피고는 말했다. 나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걱정의 말들을 애써 삼켰다. 그의 말대로 이 틈에 휩쓸려 헤어지는 편이 더 나았다.

우리는 하는 수 없이 짧게 작별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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