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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197)화 (197/234)

그녀가 구슬을 감싸고 있는 은지를 들어 올리자 구슬의 상태가 훤히 드러났다.

구슬 안을 가득 메운 보랏빛 연기가 현란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구슬에 금이 가며 쩌억 갈라지더니 맥없이 산산조각 났다.

“이, 이게 대체…….”

마거릿이 당황하는 원로 의장을 보며 싱긋 미소를 지어보였다.

에녹은 마거릿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의 색이 미묘하게 달라진 걸 확인했다. 아스달이 그녀에게 선물한 것으로, 보통 그녀가 누군가에게 마력을 나눠줄 때 사용하곤 하는 반지였다.

‘은지에게 마력을 나눠준 게 맞는 모양이군.’

그녀는 과거 마력 테스트를 하다가 마력구를 깨먹은 적이 있을 정도로 방대한 마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지 않은가.

마거릿은 안타깝다는 얼굴로 침착하게 원로 의장을 쳐다봤다.

“마력구가 불량인 것 같군요. 이것으로는 판단이 어려워 보입니다만.”

“이게 어떻게 깨질 수가…….”

“마력은 이 땅에 태어난 이들 대부분은 타고나는 힘입니다. 이를 간악한 힘으로 몰아가는 건, 우리 모두를 악마의 자식으로 몰아가는 것과 뭐가 다르지요?”

마거릿의 이어지는 말에 관전하던 주변 사람들이 격하게 동의를 표했다. 이어서 여론은 주교를 향한 비난으로 이어졌다.

그녀는 마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모두가 공감할 이야기를 하며 순식간에 파티장 내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신수임을 증명할 수는 없으나, 그렇다고 이 뱀이 마물인 건 아닙니다.”

“그게 무슨……! 신수도 마물도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란 말이오!”

무릎 꿇고 있던 사제가 마거릿을 노려봤다. 그러나 마거릿은 동요 없이 대답했다.

“사제님께서는 신수를 두 눈으로 보신 적 있습니까? 본 적도 없으면서 고작 고서를 본 것만으로 어찌 그리 확신하시는지요. 더군다나 이 뱀처럼 인간에게 각인하는 마물은 없습니다.”

“그, 그건……!”

“저와 이 뱀이 하늘을 찢고 내려오는 모습을 수만 명의 기사가 목격했습니다. 사제님께서는 수만 명의 란그리드 제국군을 거짓말쟁이로 몰아가시는 겁니까.”

호오.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황제가 감탄을 하며 마거릿을 쳐다봤다.

마력구가 깨진 상황에서 주교와 마법사 협회의 원로의장이 주장하는 ‘은지가 신수가 아니라는 것’과 ‘마거릿의 죄’는 지금 바로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서로 증명할 것이 없다. 그렇다면 중요한 건 대화의 우위를 점하는 게 누구인지다. 그걸 판가름하는 말장난에서 마거릿은 확실하게 주교와 원로 의장을 눌렀다.

“그리고 제가 이 뱀을 신수로 속였다는 말은 사실이 아닙니다. 저는 제 입으로 그런 말을 한 적 없으니까요.”

기다렸다는 듯이 어디선가 근위대 제복을 입은 기사 두 명이 달려와 황제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전쟁 막사에서 마거릿을 쫓아다니던 노엘과 하이젠이었다.

“마, 맞습니다! 플로네 영애를 벌하시다니요! 저희가 목격했습니다. 이 뱀이 하늘을 열고 나타났습니다. 이는 란드리드 제국군 전체가 증명할 수 있습니다.”

“종전을 하고 귀환하던 중에 마물의 습격이 있었습니다. 그때 이 뱀이 습격해온 마물을 전부 해치웠습니다. 마물은 보통 인간을 공격하지, 서로에게 위해를 가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 뱀은 분명히 마물을 전멸시켰습니다.”

이어서 연회장에 있던 다른 가문의 기사들 역시 황제 앞에 줄줄이 달려와 무릎을 꿇고 전쟁터에서 자신이 본 것을 사실대로 고했다. 사람들이 술렁거리는 소리가 점차 커진다.

이제 은지가 진짜 신수이냐 아니냐는 정말 상관이 없어졌다.

사제를 향한 책망 어린 목소리들이 이어지자 황제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 일련의 상황을 지켜보던 에녹이 황제에게 말했다.

“폐하. 이 파티는 귀환한 이들을 위한 파티입니다.”

소란스럽던 좌중이 다시 고요해졌다.

“저희를 납치했던 범인을 아직 잡지도 못 한 바, 피해자를 추궁하는 게 그리 좋은 그림으로 보이진 않을 것 같습니다.”

“그것도 그렇군. 알아들었으면 이만 물러가게, 대주교. 내 귀환한 이들을 봐서 이번은 자네의 무례를 그냥 넘어가 주는 건 줄 알게나.”

황제의 엄한 목소리에 무릎을 꿇고 있던 사제가 낭패감 어린 얼굴로 황후를 흘끗 보는 게 느껴졌다.

황후는 고요한 얼굴로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은 채 상황을 지켜봤다.

그 차가운 정적이 섬뜩하다.

황제는 에녹에게로 고개를 기울인 뒤, 그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에녹. 그러니 사건의 전말을 밝혀내거라. 너를 지지한 이 아비를 실망시키는 일은 없어야 할 거다.”

에녹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연회장 내부로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까지 그의 앞에 있던 대주교와 마법 협회 원로 의장은 각기 그들의 무리로 돌아갔다. 그런 그들을 짜증스레 바라보던 에녹이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저것들을 어떻게 처리할까.’

카이든이 제나스를 통해 듣기로 모란꽃 세력이 가진 마력석은 총 15개라고 했다. 그중 로드반이 가진 마력석 하나를 해치웠으니 이제 남은 것은 14개일 터.

만약 조금 전, 모란꽃 문양을 가진 주교가 마력석을 가진 놈이라면 빼앗아야 했다.

에녹은 우선 연회장 끄트머리로 돌아간 마거릿과 카이든을 바라봤다. 우선 그들과 이와 관련해 논의를 해야겠다.

* * *

멀리서 교황청 사람들이 살벌한 얼굴로 나를 노려보고 있는 게 보였지만, 하는 수 없었다. 시비는 저쪽에서 먼저 걸지 않았나.

나는 그들을 똑같이 노려봐주며 신경전을 벌였다.

아까 그 대주교가 정말 마력석을 가지고 있는지 수색해 봐야 하는데 어떻게 몰래 접근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한숨을 푹 쉴 때 은지가 내 어깨 위로 올라갔다. 소심한 녀석이라 아까는 숨 막히는 분위기 속에 눈치를 보느라 바빴는데, 이제는 사람들의 시선을 어느 정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처음엔 은지를 무서워하던 귀족들도 이제는 호기심 어린 얼굴로 내 주변에 몰려들었다.

“다 비키시죠. 비키십시오. 어이쿠. 발 밟았네. 그러니까 비키라고. XX.”

하지만 카이든이 깡패처럼 내 옆에 딱 붙어서 주변 사람들을 쳐내는 바람에 호기심 어린 시선도 곧 사그라들었다.

귀족 영애들도 내 근처에는 다가오지도 않았다. 누군가가 내게 말을 걸려 하면 카이든이 집지키는 개처럼 으르렁거렸기 때문이다.

이번 파티에서 모란꽃 세력과 마력석을 찾아내야 한다는 목적이 있었지만, 어찌 되었든 내게는 첫 데뷔탕트나 마찬가지인 파티였다. 그래서 친구라도 좀 사귀고 싶었는데 카이든 때문에 다 망한 것 같다.

“너도 좀 비키면 안 돼?”

끝내 나는 카이든을 향해 그렇게까지 말했지만, 카이든이 들을 리 없었다.

“뭐라고 했어, 마거릿?”

듣고도 못 들은 척 천연덕스럽게 웃는 게 아주 가증스러웠다.

“마거릿.”

때마침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나와 카이든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사람들 사이를 가르고 느릿하게 걸어 나오는 남자가 보였다.

카이든도 그렇지만, 에녹 역시 사람들의 주목을 한눈에 받는 남자였다. 뭐, 황태자니 당연한 거겠지만.

“전하.”

“그게 아니지.”

낮은 목소리가 고요하고 덤덤히 호칭을 지적했다. 나는 슬쩍 주변 눈치를 살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녹.”

그제야 에녹의 얼굴에 만족감이 퍼져간다. 에녹은 호칭에 조금 집착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옆에 선 카이든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에녹을 쳐다봤다.

“그대와 나눌 이야기가 있었는데.”

에녹이 흘끗 카이든을 쳐다봤다. 아무리 봐도 자리를 비키라고 눈치를 주는 모양새다. 카이든의 얼굴이 더욱 험악해진 건 말할 것도 없었다.

나는 파티장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리를 구경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젠장할.

나는 주목을 받으면 죽는 병이 있단 말이다. 수치사라고……. 아무튼 그런 병이 있다.

그때, 에녹이 내게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의아한 얼굴로 내밀어진 손을 바라보자 에녹이 말했다.

“춤이라도 추며 이야기하는 건 어떻겠나.”

“네? 아……. 그게 춤은 좀 곤란한데…….”

지난밤 춤은 절대로 추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게다가 춤을 추면서 대화를 나누는 건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지 않나? 춤에 집중하기도 힘들 텐데 거기다가 대화까지 하라니!

하지만 왠지 에녹이 할 얘기라는 게 모란꽃 세력과 관련이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지금 반드시 나눠야 할 이야기다. 조금 전에 황제 앞에서 내게 죄를 덮어씌우려고 했던 교황청 사제의 목에서 모란꽃 문양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아마 에녹도 그걸 봤겠지.

불만 가득한 얼굴로 대화를 듣던 카이든이 내 앞을 가로막으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모란……에 관한 이야기를 할 거면 따로 나가서 하시죠?”

그러나 에녹은 포기하지 않고 카이든을 비켜서서 내게 다시 손을 내밀었다.

“일단 그대와 첫 춤을 함께 하고 싶은데.”

“역시 그게 목적일 줄 알았어, XX. 그럼 나랑 추시죠. 첫 춤.”

카이든이 나 대신 에녹의 손을 덥석 잡는다.

대화는 듣지 못했겠지만, 주변에서 우리를 지켜보던 사람들이 경악했다. 나는 부끄러워서 얼굴을 가렸다. 창피해서 도대체가 살 수가 없어!

“그럼 둘이 추고 오세요. 전 좀 쉬겠어요!”

나는 그렇게 두 남자를 향해 외치고는 돌아섰다. 두 남자가 당황한 얼굴로 나를 잡았다.

“춤추러 가자는 소리 안 할 테니, 여기 있지.”

에녹이 내 오른쪽 어깨를 잡았고,

“미안해. 여기 있어, 마거릿.”

카이든이 내 왼쪽 어깨를 잡았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그들을 향해 돌아섰다.

“잘 생각하셨어요. 지금 저희는 나눠야 할 대화가 많잖아요. 춤추러 갈 때가 아니라. 잠시 테라스에서 얘기하실래요?”

나는 한쪽 테라스를 고갯짓으로 가리키며 그들에게 말했다. 에녹과 카이든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사람들이 테라스로 나가는 우리를 보며 수군거리는 것 같지만, 이번엔 정말 하는 수 없었다. 지금은 더 중요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끌벅적한 파티장에서 벗어나 우리는 시원한 테라스로 나왔다. 내가 주변에 아무도 없는지 확인하자, 카이든이 결계를 쳐 줬다.

안심하고 나는 시원한 밤공기를 마치며 봄바람을 잠시 만끽하다가 뒤를 돌았다. 그러자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에녹과 카이든과 눈이 마주쳤다. 저건 꼭 마치 내가 은지를 바라볼 때, 보던 시선인데.

“왜요?”

“아무것도 아니다.”

“네가 귀여워서.”

에녹과 카이든이 각기 다른 대답을 하며 나를 봤다. 에녹이 카이든을 흘끗 노려보는 것이 보였다.

“로드, 혈서는 아직 못 찾았나.”

에녹의 물음에 카이든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못 찾았습니다. 거기다가 로하데 후작은 부재중이더군요. 파티에 참석도 하지 않았으니, 몹시 수상쩍지 않습니까.”

카이든의 말이 맞다. 이번 파티는 황제가 직접 주최한 황실 파티였으므로 로하데 후작 정도 되는 인물이라면 참석을 해야 했다. 그런데 계속해서 부재라니. 어디로 간 걸까.

나는 에녹을 돌아보며 물었다.

“알레아 섬은 아직 못 찾은 건가요?”

“오늘 디에고 경에게 연락이 왔더군. 남부 해안에 도착해서 해안 수색을 시작한다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곧 알레아 섬을 찾을 수 있을 거다.

모란꽃 세력이 먼저 수를 쓰기 전에 섬을 찾아, 그들이 증거 인멸을 하지 못하게 막아야 했다. 그리고 세간에 실험이 자행된 섬이 있었다는 증거를 명확히 내보여야 했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나는 에녹과 카이든을 향해 물었다.

“만약 혈서를 찾지 못한다면? 혈서 없이 그들이 실험 섬에 가담했다는 증거를 찾아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우선 가장 크게 짐작 가는 이들은 황후와 로하데 가문, 교황청이지. 그들 사이에 오고 간 거래가 있는지 찾아내야 한다.”

에녹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천년 동안 해온 실험을 그들이 이렇게 포기했을 리가 없어요. 분명 또 다른 일을 도모하기 위해 접촉할 게 분명해요. 그리고 이 파티엔 그들이 모두 모여 있잖아요.”

그때, 테라스 밖으로 여러 사람의 대화 소리가 소곤소곤 들려왔다. 결계가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말을 잠시 멈추고 테라스 밖을 쳐다봤다.

그리고 그곳엔 교황청 사제들과 마법사 협회 원로의장이 한데 모여 무언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우리는 잠시 몸을 숙이고 그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조금 전 파티에서 내 죄를 운운하던 대주교가 무언가 말을 하고 있었는데, 워낙 목소리가 낮아서 제대로 들리지는 않았다.

“……플로네 영애의………생일……. 거사는 그때…….”

잠깐, 저거 뭐라는 거야. 내 생일에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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