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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결국 에녹과 카이든의 초대장을 들고 도망 나왔다.
누구를 선택할지 알려달라니. 나도 모르겠어!
마거릿은 한 번도 누군가와 정식 파트너가 되어 파티에 참석한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마거릿의 기억을 빌려 경험을 살리는 것도 불가능한 이야기라는 거다.
내가 며칠간 잠만 자는 통에 귀환파티가 벌써 내일이었다. 편지에 답이 없어 에녹과 카이든이 이후로 몇 번이나 편지를 다시 보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무튼 저는 이만 가 볼게요. 두 분 모두 건강하시고 귀환 파티에서 봐요.’
‘난 그전에 저택에 찾아갈 거야.’
‘나 역시 그 전에 방문하겠다.’
에녹의 경우는 어제 저택으로 방문요청을 했다더라. 그런데 내가 내내 잠을 자는 통에 이니스가 나를 대신해서 그의 방문을 거절했다고 한다.
절차를 중요시하는 에녹이니 공식적인 방문이 거절됐다면 내가 무리하지 않도록 배려하며 얌전히 답을 기다리고 있을 게 분명했다.
‘걱정하겠다.’
방으로 돌아가 서둘러 답신을 써야겠어.
파트너 신청서와 함께 에녹의 편지도 동봉되어 있었다. 편지에 따르면 황제가 파티에 신수를 데려오라 지시했다고 한다. 더불어 귀환 파티는 모란꽃 세력을 찾을 좋은 기회인 만큼 에녹 역시 은지를 데려오길 바란다고 적혀 있었다.
황제의 앞에 은지를 내보여야 한다니.
신수는 이곳 사람들도 실제로 본 적이 없었다. 당연하지만 전설 속으로만 전해져 왔기 때문이다.
은지가 정말 신수일까?
확실히 마물들과 다르기는 했다. 게다가 카이든과 그 제나스조차 은지가 특이한 마물이라고만 했지, 정확한 정체는 모르지 않았던가.
“마거릿!”
뒤이어 로즈메리가 내 뒤를 종종걸음으로 따라왔다. 손에는 아기자기한 꽃무늬 자수가 들어간 주머니가 들려 있었다.
그녀가 부끄러운 얼굴로 나를 흘끗 봤다.
“그, 그……. 큼. 네가 신수를 데리고 왔다는 소문을 들었어.”
“그런데?”
“받아! 피로 회복에 좋은 약초야. 신수한테 먹여. 먼길 왔으니 걔도 힘들 거 아니야.”
“어? 어. 고마워.”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그녀에게서 약초를 받아들었다. 로즈메리가 초롱초롱한 눈을 하고는 나를 쳐다봤다.
“왜?”
“신수는 방에 있어? 나 먹는 거 구경하면 안 돼? 이니스는 봤다며. 나도 보고 싶어.”
로즈메리의 눈동자는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늘 이니스가 로즈메리는 애늙은이 같다며 걱정했던 것 같은데, 이렇게 보니 로즈메리도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며칠 전 저택에 도착했을 땐 은지가 잠이 들어 있어서 로즈메리와 어머니는 아직 은지를 보지 못했다. 궁금해할 만도 하지.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자.”
나는 그렇게 대답하며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녀가 놀란 얼굴로 내 손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왜?”
“아, 아니……. 너 진짜 개과천선 했나 보다. 너답지 않아.”
로즈메리가 쭈뼛쭈뼛 내 손을 잡았다. 나는 그녀의 귓불이 벌겋게 물들어 있는 걸 보았다. 부끄러운 모양이다. 음, 낯간지럽긴 하지. 우리는 사이가 썩 좋은 자매는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로즈메리와 나는 난생처음 타인과 손을 잡아본 사람들처럼 딱딱한 움직임으로 방까지 향했다.
내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로즈메리가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놓았다. 나도 땀이 잔뜩 난 손바닥을 드레스에 대충 문질러 닦았다. 어색해 죽는 줄 알았네.
내 방 침대엔 은지가 똬리를 틀고 잠을 자고 있었다. 은지를 발견한 로즈메리가 흠칫 놀라서는 뒷걸음질을 쳤다.
“신수가 뱀이었어?”
새하얗게 질린 그녀가 멀찍이 떨어져서 은지를 쳐다봤다.
그때 소란을 듣고 은지가 끔뻑끔뻑 눈을 뜨며 고개를 들었다. 은지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침대 끝으로 기어와 목을 길게 빼고는 초롱초롱 나를 쳐다본다.
녀석이 해맑게 혀를 날름거리다가 로즈메리를 발견하고는 귀엽게 고개를 갸웃 기울인다.
“뭐야……. 마거릿. 저거 뱀 맞지?”
로즈메리가 당황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나는 침대 맡으로 다가가 은지를 들어 어깨에 올리며 그녀를 돌아봤다.
“음, 뱀이긴 하지.”
로즈메리는 홀린 듯이 내게 다가와 어깨 위에 앉은 은지를 쳐다봤다.
“뱀 주제에 왜 이렇게 귀여워……?”
로즈메리의 말을 들은 은지가 어깨 위에서 콧김을 뿜으며 뿌듯해하는 게 느껴졌다.
“신수가 뱀이었다니. 근데 이렇게 귀엽다니.”
로즈메리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반짝이는 눈으로 다시 나를 쳐다봤다.
“내가 준 약초! 그거 내가 직접 먹여보면 안 돼?”
나는 로즈메리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들고 있던 주머니를 그녀에게 건넸다. 그리고는 은지를 부드러운 카펫 위에 내려놨다. 은지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더니 나를 올려다보며 혀를 날름거렸다.
나는 로즈메리가 주머니에서 네모난 상자를 꺼내는 것을 보며 물었다.
“그런데 그거 확실히 먹어도 되는 물건이야? 마물이 먹으면 어떻게 돼?”
“마물이 먹어도 상관없는 약초라 괜찮아. 보통은 애완동물에게 많이 먹여. 피로 회복에 좋고 마력을 가진 동물이라면, 꼬인 마력을 풀어주기도 하거든.”
로즈메리는 상자를 열고 안에 들어 있는 약초를 꺼내 은지에게 내밀었다. 상자 앞을 기웃거리던 은지가 약초 냄새를 맡았는지 기겁하며 물러난다. 그리고는 나를 올려다봤다.
나는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은지가 다시금 호기심 어린 얼굴로 로즈메리의 손바닥 앞을 기웃거렸다.
“나 만지고 싶어. 만져도 돼?”
“약초 줄 거면 그거부터 주고.”
그렇지 않아도 로하데 가문에서 제작한 특수 마력석을 먹어치우는 은지가 걱정됐었다. 그런데 꼬인 마력을 풀어주고 피로 회복에도 좋은 약초라니. 은지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은지가 결국 로즈메리의 손바닥 위에 놓인 약초를 날름 삼켰다.
그러더니 자리에서 펄펄 뛰기 시작했다.
잔뜩 찡그린 표정을 보니 약초가 어지간히도 맛이 없었던 모양이다. 나는 재빨리 물을 가져와 녀석의 앞에 들이밀었다.
은지가 짜증이 난다는 듯이 바닥에 꼬리를 팡팡 두드렸다. 얼굴에 불만이 가득했다. 녀석은 이렇게 맛없는 걸 어떻게 제게 먹일 수 있냐는 눈빛으로 나와 로즈메리를 노려보곤 물을 마셨다.
나와 로즈메리는 물 마시는 은지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고 앉아 녀석을 관찰했다.
“괜찮나?”
“괜찮대도. 네가 신수를 데려온대서 내가 그에 걸맞는 선물을 주려고 얼마나 고생한 줄 알아? 황실에서 공인한 약재 상점에서 비싸게 주고 구입해 온 거야.”
로즈메리는 신수를 데려온다는 소리에 제가 얼마나 들떴었는지 술술 밝히고는 민망했는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그녀가 그러거나 말거나 은지는 약초를 먹고 정말 기운이라도 난 건지 한참 동안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며 신나했다. 그러다 이내 끔뻑끔뻑 졸기 시작했다.
로즈메리가 귀여워 죽겠다는 얼굴로 은지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은지는 혀를 내민 채로 눈을 감고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다가 결국 꼬리를 말고 잠이 들었다.
“너무 귀여워…….”
로즈메리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민망했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 난 신수를 봤으니까 이만 갈래.”
그리고는 고장 난 로봇처럼 삐걱거리며 방문을 열고 나갔다. 완전히 밖으로 나간 줄 알았는데, 로즈메리가 문을 닫지 않고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마거릿.”
“왜?”
“내일 파티에 저 녀석도 데려갈 거야?”
“데려가야지. 황제 폐하께서도 궁금하신가 봐. 데려오라고 황명을 내리셨어.”
내 말에 로즈메리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녀가 세차게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이며 그제야 내게 인사했다.
“나 갈게!”
로즈메리가 사라진 자리를 보며 웃던 나는 잠든 은지를 조심스레 침대 머리맡 방석 위에 올려놨다. 은지 전용으로 놔둔 방석이었다. 은지가 기분이 좋은지 고로롱거리며 몸을 말았다.
녀석을 보다가 나는 에녹과 카이든에게 보낼 편지를 작성하고 바네사에게 전달한 뒤, 방에서 간단히 식사를 했다. 그리고 책을 읽다가 일찍이 침대에 들었다.
평화롭다.
이 평화가 계속됐으면 좋겠는데, 사실 내일 있을 파티는 조금 긴장돼서 잠이 안 올 것 같기도 했다.
아직 귀족 예법에 적응을 다 못했는데 괜찮을까. 마거릿도 춤만은 제대로 추지 못했는데, 나라고 잘 출 수 있을 리 없었다. 춤은 다시 연습해야 할 것 같은데 내일은 일단 눈에 띄지 말고 구석에만 있어야겠다.
춤은 절대로 추면 안 돼.
절대로.
그런 생각 속에서 나는 고요히 잠이 들었다.
내가 불현듯 눈을 떴을 땐 한밤중이었다.
살짝 열린 창문 사이로 부드러운 봄바람이 간질거리며 들어오고 있었다. 알레아 섬은 내내 후덥지근한 여름이었는데 이런 기분 좋은 봄바람이라니.
어스름한 달빛이 고요히 방안을 가득 메운다. 나는 침침한 눈을 깜빡이며 캐노피 천장을 올려다봤다. 한참 뒤에 초점이 또렷하게 잡혔다.
내가 얼마나 잠든 거지? 아직 밤인 것 같은데.
“깼어?”
옆에서 누군가 내게 말을 걸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쉿.”
누군가가 내 입술 위로 검지를 가져다 댔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눈앞의 남자를 쳐다봤다.
달빛을 받은 새하얀 은발이 아름다운 색을 자아냈다. 그 아래 자리한 붉디붉은 눈동자는 나를 집어삼킬 것만 같이 깊었다.
“카이든?”
“아직도 구별이 안 가?”
그제야 나는 그가 제나스임을 알아차렸다.
카이든이 내게 비공식적으로 플로네 저택에 방문한다고 말하긴 했다. 그게 카이든이 아니라 제나스일 줄은 몰랐지만.
플로네 저택은 나름 경비가 삼엄하기로 유명한데 대체 어떻게 들어온 거지?
“이게 무슨 짓이야. 이거 굉장히 무례한 짓인 건 둘째 치고 무단침입죄로 신고할 수도 있어.”
“신고할 건가? 잡혀가는 건 내가 아니라 카이든일 텐데.”
망할 X끼.
내 표정을 본 제나스가 기분 좋은 얼굴로 웃음을 지었다. 그가 내 침대 옆에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