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이니스의 요란에 나는 쓸데없는 상념을 모두 날려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진정하세요.”
그러나 이니스는 당연히 그 말 한 마디로 납득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납치 얘기는 들었어. 알레아라는 실험 섬이 존재했다는 것도. 사실 아직도 그 모든 이야기가 믿기지가 않아.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니?”
“전쟁터에서 거대한 신수와 함께 하늘을 열고 나타났다는 얘기 듣지 않았더냐. 그때 나도 하늘에서 수십 갈래의 번개가 기이하게 내리치는 걸 보았다.”
이니스의 말에 아버지가 말을 보탰다. 아마도 섬에서 있었던 이상 현상이 이쪽에도 발생한 모양이다. 아마 아버지가 보았다는 번개가 마물의 모체가 내리친 번개를 말하는 것 같다.
시공간을 비틀긴 했으나 기본적으로 알레아 섬은 란그리드 제국 남부 해안가에 실존하는 섬이다. 그러니 섬의 시스템이 붕괴되면서 이쪽에도 영향을 미쳤던 모양이다.
“전부 다 사실이에요. 아직 배후는 저도 모르지만, 밝혀내야죠.”
우리가 겪은 일들을 어떻게 다 말로 설명할까. 이건 우리만이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조금 전까지 함께 있었음에도 벌써부터 에녹과 카이든이 그리웠다. 아스달과 유안나, 루제프, 그리고 디에고도.
내 대답에 이니스와 아버지가 잠시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눈치를 보더니, 이니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사실 네가 오기 한 달 전에 빌터하임 공작이 우리 저택에 다녀갔어.”
이니스의 말에 아버지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서 ‘모란꽃’ 문양을 가진 세력에 대해 들었다. 빌터하임 공작도 다른 나라의 가담 세력은 모르는 듯했으나, 란그리드 제국 내에 있는 이들은 누구인지 명확히 알고 있더구나.”
“로드반 황자, 아니 폐태자와 황후인가요?”
내 말에 두 사람이 놀란 얼굴을 했다.
“어떻게 알았어?”
이니스가 내게 물었다.
“폐태자의 몸에서 거미줄에 걸린 모란꽃 문양을 봤어. 모란꽃 세력이 몸에 그런 문신을 새기는 것 같더라. 헤스티아 왕국 사람 중 한 명도 그 문신이 몸에 새겨져 있다고 하더라고. 이건 헤스티아 왕세자 저하께 들은 이야기야.”
내 말에 아버지와 이니스가 놀란 얼굴로 나를 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거릿, 네 말이 맞아. 로드반 폐태자와 황후, 그리고 로드반 폐태자의 외조부인 패더슨 백작 가문. 로하데 가문은 말할 것도 없지.”
“감히 플로네 가문을 건드리다니. 뼈도 못 추리게 만들 거야.”
으득. 이니스가 이를 갈았다. 중얼거리던 그녀가 문득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는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그런데 마거릿……. 너 정말 괜찮은 거니?”
“어? 괜찮아.”
“아니, 완전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서 묻는 거야. 착한 척 굴지 말고 평소대로 해도 돼. 나무라지 않을게. 네가 그러니까 어디 아픈 것 같잖아.”
이니스의 말에 나는 뜨끔해서 잠시 눈치를 살폈다.
다른 차원에서 잠시 살다오느라 다른 영혼과 섞였다고 어떻게 설명해……!
굳이 그런 얘기를 꺼내서 가족과의 사이가 서먹해지거나 어색해지는 걸 보는 건 더 괴로울 것 같았다. 나는 결국 고개를 저었다.
“그냥 피곤해서 그래.”
“우리 망아지, 정말 고생 많았다.”
내 대답에 아버지가 또다시 울먹거리며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그 손길이 어찌나 따뜻하던지 나는 울컥 치밀어 오르는 눈물을 애써 삼켰다.
터지지 않고 한없이 부풀어 오르기만 하던 풍선을 아버지가 바늘로 콕, 하고 찌른 그런 기분이었다.
‘망아지라는 이상한 별명마저 좋아.’
어차피 마거릿이 난데, 과거의 내가 부러웠다. 이런 따뜻한 사랑을 받았다니. 오래 전의 스스로를 부러워하는 그런 머저리가 바로 나였다.
마차는 금방 멈췄다. 아버지와 이니스가 먼저 마차에서 내리고 아버지가 내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리는 것을 도와줬다.
수도 버네튼의 중심가에 위치한 플로네 저택은 매우 화려했다. 플로네 영지는 수도에서 멀지 않았음에도 구태여 수도에 화려한 저택을 사들였다.
많은 귀족들이 사교철을 위해 으레 그랬던 것도 있지만, 플로네 가문의 딸들이 그 외에도 황실을 밥 먹듯이 들락거렸기 때문이다.
플로네 공작은 에녹을 보러 황실로 출근을 하다시피 하는 마거릿과 사교 파티를 즐겨 다니는 로즈메리, 그리고 황궁의 재무부에서 일을 하는 이니스를 위해서 이 저택을 마련했다고 한다.
“집에 온 걸 환영한다.”
이니스와 아버지가 각각 양쪽에서 내 손을 잡고 웃으면서 말했다.
그와 동시에 저택의 대문이 열렸고 대문을 따라 적당한 크기의 정원을 지나니 저택의 입구가 보였다.
우리가 입구에 서자 기다렸다는 듯이 문지기 시종이 인사를 하고는 문을 열었다.
거대한 대문이 열리자 일렬로 줄을 서서 우리를 반기는 사용인들과 어머니, 그리고 막내 동생 로즈메리를 만날 수 있었다.
가족을 만난 기분은 굉장히 이상했다.
하루 종일 하늘 위를 붕 뜬 기분이었다. 화려한 만찬도 따뜻한 환대도 모두 얼떨떨했다.
만찬 후에는 모두 나를 배려한다고 제법 이른 시간에 나를 침실로 보내주었다. 나는 3층에 위치한 마거릿의 화려한 방안을 잠시 둘러봤다.
마거릿의 기억 속 모습 그대로다. 마치 심혈을 기울여 그때 그 모습 그대로 보존을 해둔 것처럼 보였다.
내가 없는 동안 동생 로즈메리를 담당하던 하녀 바네사가 다시 내게로 돌아왔다. 그녀가 눕기 편하도록 침구를 정리하고 잠자리에 들 준비를 도왔다.
향유를 부어 기분 좋은 목욕까지 마치고 보송보송하게 세탁이 된 슈미즈를 입은 난 따뜻하고 푹신한 침대 위에 누웠다.
“살아계셔 주셔서 감사해요, 아가씨.”
바네사가 따뜻한 말로 내게 인사하고는 웃으며 내 목 끝까지 이불을 덮어주고는 침대 옆 협탁에 놓인 양초의 불을 껐다.
순식간에 어둠이 몰려왔다. 나는 멍하니 침대에 누워 침대의 기둥과 캐노피 천장을 올려다봤다. 눈꼬리 끝에 눈물방울이 맺혀 이내 또르륵 흘러내렸다.
‘꿈일까.’
너무도 꿈만 같았다. 이 모든 상황이. 이 편안함이. 이 행복이. 과거엔 너무도 익숙했을 이 모든 것들이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잠들기가 무서웠다. 눈을 감았다가 뜨면 다시 알레아 섬일까 봐. 나는 그렇게 한참을 두려움에 떨다 잠이 들었다.
* * *
나는 며칠을 방 안에서 잠만 잤다. 오랜만의 편안함에 침대 위를 벗어나기가 어려웠다. 긴장감이 녹아 없어지고 쌓인 피로가 풀어지니, 계속해서 잠을 자도 모자란 듯싶었다.
알레아 섬에서 생사를 넘나들며 지치고 낡은 육신이 회복되는데 엔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가족들은 모두 그런 나를 배려했다. 그 배려가 너무도 고마워서 나는 사흘째 되던 날에는 침대를 벗어나 보기로 했다.
마침 내 앞으로 꽤 많은 편지가 도착했다고 한다. 나는 이니스의 집무실을 찾았다. 그녀가 내 편지들을 모두 보관중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이니스의 집무실에는 어머니와 로즈메리도 있었다.
“우리 망아지, 몸은 괜찮니?”
소파에 앉아 있던 어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와서는 내 안색을 살폈다.
나와 이니스, 로즈메리는 모두 아버지를 빼닮은 백금발 머리카락이었다. 이 집에선 어머니 혼자 회색빛 머리카락이었는데, 그녀의 자주색 눈동자는 대신에 이니스가 물려받았다.
“괜찮아요. 걱정 끼쳐드려서 죄송해요.”
내 대답에 집무실 안으로 잠시 긴 침묵이 흘렀다. 어머니가 아무 말도 못 하고 입만 벙긋대다가 하녀 바네사를 쳐다봤다.
“마거릿이 정말 괜찮은 건 맞느냐. 의원은 다녀갔고?”
바네사도 놀란 얼굴로 나를 살폈다. 가만히 소파에 앉아 우리를 지켜보던 로즈메리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탄식했다.
“오만하고 철없는 마거릿이 그런 예의 바른 대답을 하다니.”
나는 그제야 과거의 마거릿이 집에서 얼마나 철없이 굴었는지를 떠올렸다. 이거 참, 민망하네.
과거의 마거릿은 내가 맞지만, 지금의 나도 나다. 그러니까 바뀐 내게 가족들이 적응을 해줬으면 좋겠다는 작은 바람과 욕심도 있었다.
나는 민망한 얼굴로 눈치를 보다가 이니스를 쳐다보며 물었다.
“내 앞으로 편지가 많이 왔다고 들었어.”
이니스가 그제야 책상 서랍을 열고 편지봉투들을 책상 위에 쌓았다. 듣던 대로 정말 많은 양의 편지였다.
“다 쓸데없는 파티 초대장이란다. 그 중 두 개는 파트너 신청서고.”
그 모습을 보던 어머니가 내게 설명해주었다. 그리고는 나와 로즈메리를 소파에 앉히고는 바네사를 시켜 차를 내오게 했다.
이니스가 책상 위에 쌓아둔 편지봉투들을 내 앞에 놓인 테이블 위에 옮겼다.
“파트너 신청서는 뭐지?”
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편지봉투들을 살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어머니가 웃음을 지었다.
“귀환 파티 때 함께 참석할 파트너, 아직 안정했지?”
귀환 파티라니, 완전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나는 이니스가 말한 두 개의 파트너 초대장을 살폈다. 하나는 황실 인장이 찍혀 있었고 하나는 마탑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아니 근데 왜 파트너 신청을 두 사람밖에 안 보냈을까?”
플로네 공작 가문의 영애라면 응당 파트너 초대가 차고 넘치도록 쏟아져야 하는 거 아닌가?
“어머, 그건 그야…….”
어머니가 곤란한 듯이 말끝을 흐리자 로즈메리가 새침하게 대꾸했다.
“네가 에녹 황태자 좋아하는 거 제국 내에 모르는 사람도 있어? 어떤 머저리가 너한테 초대장을 보내겠니?”
“로즈.”
어머니의 엄격한 목소리에 그녀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나는 이니스가 건네주는 레터오프너로 두 개의 초대장을 모두 개봉했다. 예상대로 황실에서 온 것은 에녹이었고 마탑에서 온 것은 카이든의 것이었다.
“그런 머저리가 둘이나 있잖니. 정말 파티 초대장이 맞는지 모르겠어. 어때, 마거릿? 누구야?”
이니스가 회의적인 얼굴로 내 손에 들린 초대장을 가리켰다. 그녀는 황실의 문양과 마탑의 문양이 찍혀 있었음에도 그게 에녹과 카이든이 보낸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도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나는 에녹……, 아니 황태자 전하께서 보내신 거고. 하나는 마탑주께서 보내신 거야.”
“……나 지금 뭐 잘못 들은 것 같은데.”
로즈메리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어머니와 이니스를 돌아봤다. 그녀들 또한 마찬가지로 믿기 어렵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참지 못한 로즈메리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초대장을 직접 보겠다는 뜻이다.
나는 그녀에게 초대장을 넘겨줬다. 어머니와 이니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로즈메리에게 붙어 초대장의 내용을 살폈다.
“맙소사, 이게 진짜인가?”
“말도 안 돼!”
“얘들아, 이거 내 눈이 이상한 건 아니니?”
이니스와 로즈메리, 어머니가 동시에 내게 물었다.
가족들의 반응도 이러한데, 다른 사람은 어떻겠는가.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