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황제와의 인사는 더 길게 이어지지 않고 끝이 났다.
황제와 황후도 성으로 돌아갔고 기사들도 각기 제 일을 하러 흩어졌지만 성 앞엔 여전히 상당한 인파가 남아 있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의 이목이 여전히 우리에게로 집중되어 있었다. 주목받는 건 싫으니 어서 집에 가야겠다.
나는 에녹, 카이든과 작별 인사를 하려고 등을 돌렸다가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중년 남성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곱슬거리는 장발을 깔끔하게 뒤로 묶은 청초한 인상의 중년 남성, 바로 내 아버지인 플로네 공작이었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꽃처럼 화사한 얼굴을 하고는 내게 손을 흔들었다. 근엄하게 무게를 잡고 있던 얼굴이 예쁘게 풀어지며 바보처럼 변하는 광경이 다소 신기했다.
‘그래. 아버지는 원래 저런 분이셨지.’
아버지라니. 나는 그 단어를 속으로 계속해서 곱씹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내 안에 이진주로서의 자아가 더 강하다면, 아버지란 이름도 이 모든 상황들도 낯설게 느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과거의 마거릿 또한 분명히 나 자신이었기 때문일까, 모든 것이 이질감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생경한 기분과는 또 별개의 감정이라 더욱 신기했다.
“우리 망아지!”
아버지는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한걸음에 달려와서는 나를 꼭 끌어안았다.
“이리 살아있었다니, 이 아비는……. 아비는……! 크흐흑……!”
그는 나를 끌어안은 채 대성통곡을 시작했다.
평소의 플로네 공작은 우아하고 기품이 넘치는 귀족이었는데, 가족의 일만 얽히면 이렇게 한 떨기 꽃처럼 연약한 사람이 되고 만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아버지의 등을 토닥거렸다. 사람들이 흘끗흘끗 감격적인 부녀상봉을 구경하는 것도 굉장히 부끄러웠고, 무엇보다 에녹과 카이든이 당황해서 우리를 멀거니 지켜보고 있는 게 가장 부끄러웠다.
게다가 ‘우리 망아지라니.’
아버지가 나를 부르는 애칭이 망아지라는 건 기억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공개적인 장소에서 그 애칭을 부르다니……!
창피해서 살 수가 없어……!
“아, 아버지. 이것 좀…….”
“그래. 너도 이 아비가 무척 보고 싶었겠구나. 어디 다친 곳은 없고?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겠느냐. 네가 그간 어떤 고생을 했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이 아비는 숨이 쉬어지지 않아……!”
아버지는 가슴이 미어지는 얼굴로 정말 서럽게 울었다. 그리고 그 요란한 주책에 나는 잠시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고 말았다.
사실 난 란그리드 제국으로 돌아오면, 귀족 세계에 굴러들어온 돌처럼 적응을 못 하면 어쩌나 걱정했었다.
그렇지만 권위 높은 플로네 공작 가문의 가주인 아버지도 저런 사람인데, 이상한 사람이 나 하나쯤 더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
곤경에 처한 나를 구제해 준 건 플로네 공작 가문의 장녀이자 내 언니인 이니스였다.
“아버지, 황태자 전하와 마탑주님께서 앞에 계신데 이 무슨 추태입니까.”
이니스의 말에 아버지는 그제야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고는 흘끗 내 뒤에 선 에녹과 카이든을 쳐다봤다.
이니스는 에녹과 카이든에게 자기소개를 마친 뒤에 아버지를 밀어내고 내게 다가와 나를 끌어안았다.
“마거릿, 무사해서 다행이야.”
아버지에 비해선 무척 깔끔하고 덤덤한 인사였지만, 나는 그녀의 목소리 끝이 떨리는 걸 알아차렸다. 얼떨떨한 얼굴로 서 있다가 나는 결국 그녀를 마주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조용히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보고 싶었어, 이니스.”
이건 내가 하는 말이자, 마거릿이 하는 말이다.
이상하게도 체취가 익숙했다. 그리고 정말 기이하게도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그녀가 무척 반가웠는데 그 기분이 굉장히 기묘했다.
“마거릿, 이 아비는? 아비에게도 보고 싶다는 말을 해주겠느냐!”
뒤에서 아버지가 촐싹거리며 나를 채근하는 것만 아니었으면 꽤 감동적인 가족 재회가 됐을 것 같다.
“당연히 아버지도 보고 싶었어요.”
그러나 다정한 내 대답에 아버지는 오히려 화들짝 놀라는 것 같았다. 아버지가 휙 고개를 돌려 이니스를 보며 울먹였다.
“이니스, 우리 망아지가 조금 이상한 것 같지 않으냐! 저 아이가 이 아비에게 저리 친절할 리가 없는데.”
이니스가 성가시다는 듯이 짜증스럽게 아버지를 쳐다봤다. 그 냉랭한 표정을 본 아버지가 딸내미 얼굴이 너무 무섭다며 상처 입었다고 징징거린다.
나는 조금 피곤해진 얼굴로 그들에게 말했다.
“저 황태자 전하와 로드께 인사 좀 해도 될까요?”
이니스와 아버지는 뒤늦게 에녹과 카이든의 눈치를 살피곤 슬금슬금 자리를 비켜주었다.
우리의 대화를 들을 만큼 가까이 다가와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 나는 에녹과 카이든을 돌아봤다.
에녹과 카이든은 흥미진진한 얼굴로 우리를 보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미소를 지었다.
“그대의 가족답군.”
“역시 특이해. 너처럼.”
에녹에 이어 카이든이 연달아 말했다.
어쩐지 얼굴이 화끈거렸다. 마거릿의 기억 그대로다. 역시 어디 내놔도 부끄러운 가족이야.
나는 잠시 뺨에 손을 얹고 열을 식히다가 입을 열었다.
“이제 정말 헤어져야 한다니 어색하네요.”
몇 달 동안 매일 같이 함께했는데, 조금 많이 허전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 영원히 안보는 건 아니지만.
내 말에 카이든이 와락 얼굴을 구겼다.
“헤어지다니 무슨 말을.”
“헤어지는 건 맞잖아.”
내 말에 에녹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 손을 들어 천천히 손등에 입맞춤을 했다.
“조만간 정식으로 플로네 저택에 방문토록 하지.”
그 모습을 보던 카이든은 내 다른 쪽 손을 들어 손등에 입맞춤을 남겼다.
“그럼 나는 비공식적으로 방문할게.”
“로드.”
에녹의 서슬 퍼런 음성에도 카이든은 어깨를 으쓱이며 태연하게 웃었다. 그 모습이 너무도 카이든다웠다.
우리 세 사람의 모습은 나누는 대화를 듣지 않아도 친분이 깊어 보였을 것 같다. 섬에서는 익숙했는데, 이곳 사람들은 이 모습이 낯설었을 것 같기도 했다.
멀리서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우리를 지켜보던 사람들이 놀란 얼굴로 술렁이는 게 보였다.
나는 피곤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고는 에녹과 카이든에게서 떨어졌다.
“저한테 너무 가까이 오지 마세요. 추문이라도 나면 어떡해요. 저도 저지만, 두 사람에게도 안 좋아요.”
내 말에 카이든의 눈빛이 매섭게 반짝였다. 그가 내게 가까이 다가와 어깨에 손을 얹었다.
“마거릿, 우리 거리 두지 않기로 했잖아.”
어깨에 닿은 손이 조금 무겁게 느껴진다. 보는 눈이 많아 카이든도 그 이상의 스킨십은 하지 않은 채로 내게 말했다.
“그리고 추문이라고 지껄이는 놈들이 있으면 입을 내가 다 찢어놓을게.”
빈말이겠지만, 카이든은 왠지 정말로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데 그러면 더 역효과가 나지 않겠니?
카이든을 떼어낸 에녹이 고요히 나를 봤다. 위엄이 느껴지는 강경한 금안에 내 얼굴이 고였다.
“추문이 걱정이라면, 걱정 마라. 곧 그게 추문이 아니게 될 터이니.”
에녹의 말은 의미심장해서 뜻을 파악하기가 조금 어려웠다. 나는 주변의 시선을 조금 의식했다. 뭐가 되었든 일단 자리는 좀 피하고 싶었다.
“아무튼 다시 말하지만, 여긴 알레아 섬이 아니잖아요. 결혼도 안 한 남녀가 이렇게 가깝게 지내는 건 이상할 거예요. 이제는 적응해야죠. 문명사회에.”
나는 고개를 저으며 한사코 그들을 내 곁에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했다.
“……지금 결혼이라고 했나?”
“뭐야, 그게 무슨 소리야 마거릿. 너 결혼할 남자가 있었어?”
나는 그들의 추궁에 미간을 좁혔다.
“있겠니?”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두 남자를 보며 나는 결국 고개를 저으며 작별 인사를 했다.
“아무튼 저는 이만 가볼게요. 두 분 모두 건강하시고 귀환 파티에서 봐요.”
“난 그전에 저택에 찾아갈 거야.”
“나 역시 그 전에 방문하겠다.”
그래그래. 알겠다 알겠어. 나는 그들에게 대충 알겠다고 해준 뒤에 등을 돌렸다.
그리곤 입을 헤 벌리고 나를 쳐다보고 있는 아버지와 이니스를 발견했다.
벌써부터 이들과의 관계에 대해 설명할 생각을 하니 머리가 아프다.
* * *
플로네 저택에 사용인들은 바짝 긴장을 한 채였다.
“아가씨가 살아계신 건 너무 좋은 일인데, 다시 돌아오신다니 무서워.”
분주하게 파티 준비를 하던 동료 하녀 하나가 입을 열었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하녀들이 하나 같이 동조했다.
“맞아. 코제트 가문의 영애처럼 가학적인 체벌을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아가씨께 머리 뜯겨본 애들은 좀 있지 않니?”
“야, 근데 걔들은 그럴 만하지 않았어? 로지는 아가씨 보석을 훔쳤잖아. 힐다는 아가씨 손등에 뜨거운 커피를 흘리는 바람에 아가씨께서 화상을 입을 뻔했는데 그럼 머리채 안 잡게 생겼니?”
“야, 아무리 그래도 세상에 화가 난다고 대뜸 머리채부터 잡는 귀족이 어디 있어?”
“그래. 우리 마거릿 아가씨는 유독 귀족 아가씨답지는 않았지.”
“그러니 별명이 망나니 아니겠어. 공작 부부께서도 망나니라고 부르시잖아.”
“망나니 맞지. 그래도 나름 귀여운 걸 뭐.”
키득키득.
“지금 이게 무슨 소리지?”
그때 등 뒤로 들려온 바네사의 목소리에 하녀들이 화들짝 놀라 자지러졌다.
“너희가 미쳤구나.”
바네사가 엄중한 표정으로 수다를 떨던 하녀들을 훑었다. 바네사의 눈초리를 받은 하녀들이 바들바들 떨었다. 바네사는 플로네 공작 아가씨들의 전속 하녀다. 하급 하녀인 그녀들과 달리 당연히 직급도 높으며 입김도 강했다.
“시, 실언이었어.”
“실언은 무슨, 너희가 했던 이야기는 하녀장님께 그대로 전달할 거야. 그런 줄 알아.”
바네사의 냉정한 말에 하녀들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마도 바네사가 하녀장에게 곧장 고한다면, 하녀들은 벌을 면치 못하리라.
* * *
나는 아버지, 그리고 이니스와 함께 수도에 있는 플로네 저택으로 향하는 마차에 올랐다.
아버지와 이니스가 나란히 앉았고 나는 그들의 맞은편에 어색하게 앉았다. 아버지는 연신 눈물을 훌쩍이며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이니스는 그런 아버지를 보고 못 말리겠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고는 나를 쳐다봤다.
“괜찮니?”
“으응?”
나는 조금 멋쩍게 반문하고는 도로 입을 다물었다. 어색함을 참을 수 없었다.
그들이 내 가족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내가 마거릿인 것 또한 명백한 사실이고. 그래서 그들을 대하는 게 어색하지 않다는 점이 오히려 내겐 어색하게 느껴졌다.
내가, 내가 아닌 것 같은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그때였다. 드레스 주머니에서 부스럭거리던 은지가 ‘까꿍’ 하고 고개를 내밀었다.
“으악!”
아버지가 경기를 일으키며 놀라다가 마차 창문에 머리를 박고 신음을 흘렸다. 놀란 아버지와 달리 동요조차 없이 차분한 얼굴로 이니스가 은지를 쳐다봤다.
“이게 혹시 소문의 그 신수?”
은지가 이니스의 말에 화답하듯 입을 벌리고 손가락만 한 불을 뿜었다.
“악! 이, 이게 신수란 말이냐! 그냥 배, 뱀으로 보이는데?”
아버지의 호들갑에 은지가 불만스럽다는 듯이 콧김을 씩씩거렸다. 어쩐지 아버지 얼굴에 루제프가 그려지는 것 같은데, 내 착각이기를 바란다.
가만히 은지를 관찰하던 이니스가 은지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은지가 흘끗 이니스를 올려다보며 눈치를 봤다. 그러다가 기분이 좋았는지 눈을 감고 이니스의 손바닥에 얼굴을 비비적거리며 애교를 부렸다.
딱딱하던 이니스의 뺨이 발그레 붉어졌다. 그러고선 저도 민망했는지 헛기침을 하며 손을 거둬갔다.
“흠. 귀엽네.”
은지가 강아지처럼 꼬리 끝을 살랑거리며 흔들었다. 말똥말똥한 눈으로 이니스를 쳐다보자 이니스의 얼굴이 점점 더 붉어진다.
“얘는 어떻게 만난 거야?”
“납치당했던 섬에서 만났어. 떠돌아 다니다 알을 주웠는데, 거기서 부화했지. 얘가 날 엄마로 알고 졸졸 쫓아오더라고.”
내 말을 들은 이니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이내 얼굴이 험악하게 구겼다.
“잠깐, 그래. 납치를 당했다고 했잖아. 그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무슨 험한 짓이라도 당한 거야?”
“우리 망아지, 대체 이게 무슨 소리냐. 정말로 무슨 험한 꼴을 당한 게냐!”
이니스가 매섭게 추궁하자 아버지마저 화들짝 놀라더니 발작하듯이 몸을 숙이며 내 어깨를 부여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