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반이 당황한 얼굴로 말을 잇지 못하고 입만 벙긋대며 에녹을 쳐다봤다.
“황후 폐하께서도 동일한 마력석을 가지고 있는 겁니까.”
“내, 내가 어떻게 알아?!”
“그럼 형님께선 이 마력석을 어디서 구한 겁니까.”
“그건…….”
“솔직히 말씀하시면, 형님의 죄를 정상참작 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형님께선 이용만 당하신 것 아닙니까. 말씀하십시오. 누가 이 마력석을 주었는지.”
그러나 에녹의 말에도 로드반은 대답 없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에녹의 회유에도 그는 끝끝내 누구에게서 마력석을 받았는지 말하지 않았다.
사실 그가 마력석을 누구에게서 받았는지는 뻔했다. 황후밖에 없겠지. 그러나 로드반은 에녹보다도 황후가 더 두려웠던 모양이다.
로드반을 당장 이 자리에서 고문할 수도 없으니, 더는 추궁해 봤자 시간낭비다.
에녹이 옆에 선 기사를 향해 고갯짓을 했다. 그러자 기사가 다시금 로드반의 입에 재갈을 물렸다.
에녹이 우리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대로 수도에 입성하면, 지난번처럼 유배로 끝나지는 않을 거다. 아마도 그래서 이런 짓을 벌인 것 같군. 군부대 전체를 위험에 빠뜨리며 혼란을 야기해, 제게로 쏠릴 시선을 분산시키는 편이 낫다고 판단한 모양이지.”
로드반의 그간 입지를 생각해보면 이렇게 뻔하고 다급한 수나마 썼을 가능성도 있을 것 같았다.
지금 로드반은 수세에 몰려 있는 상황이다. 이대로 에녹에게 붙잡힌 채로 란그리드 제국까지 항하면 그는 더 이상 지위를 복권할 구실도 여지도 없었다. 지위 복권뿐이 아니라 목숨을 부지하기도 어려워 보이는 상황인데, 뭐.
“증거를 찾는 것과 별개로 마력석 파괴는 반드시 해야겠군.”
에녹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팔뚝으로 꼬물꼬물 기어 올라온 은지를 쳐다봤다.
“로드반 전하께서 너무 허술하신 덕분에 알아가는 게 많네요. 계획을 다시 세워보도록 하죠.”
내 말에 에녹은 한숨을 내쉬었고 카이든도 로드반을 한껏 비웃었다.
이렇게 마물 떼 습격 사건은 우선 일단락이 됐다.
그리고…… 뒤늦게서야 난 알게 되었다.
란그리드 제국 군 사이에서, 내가 신수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지옥 같은 전쟁을 끝낸 영웅이라고 소문이 퍼지고 있는 줄 말이다.
* * *
로즈메리는 아침부터 무척 분주했다. 오늘 오후에 마거릿이 있는 군부대가 수도 버네튼에 입성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마거릿을 마중나가는 건 아버지와 이니스가 하기로 했으니 로즈메리는 어머니를 도와 마거릿을 맞을 준비를 했다.
마거릿이 돌아오면 어떻게 인사를 나누어야 할까. 로즈메리는 속으로 수십 번 연습했다.
그래도 우선 살아있어 줘서 고맙다는 말을 먼저 해야겠지?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묻는 건 그 다음이다.
“우리 망아지가 돌아온다니, 정말 꿈만 같구나.”
로즈메리의 어머니, 플로네 공작부인은 계속해서 흐르는 눈물을 손수건으로 찍어 눌렀다.
로즈메리는 마거릿의 방을 점검하고 식사 메뉴를 체크한 뒤, 저택의 로비를 둘러보다가 제 뒤를 졸졸 쫓아오며 눈물 흘리는 어머니를 다소 질린다는 얼굴로 돌아봤다.
기백이 남달라서 플로네 가문의 가주는 공작이 아니라 공작 부인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의 인물이었다. 그런 어머니였는데 자식 얘기 앞에선 장사 없었다.
“부인, 왜 여기서 울고 있는 게요.”
그때 곱슬한 장발을 하나로 묶은 한 떨기 백합 같은 중년 남성이 로비 계단을 내려왔다. 플로네 공작이었다.
플로네 공작은 눈물을 흘리고 있는 공작부인을 보고 놀란 얼굴을 했다.
“부인이 우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구려.”
“우리 망아지가 살아서 돌아온다는데 어찌 침착할 수가 있나요.”
“그래도 웃으면서 맞이해 줘야지. 우리 귀여운 망아지가 얼마나 놀라겠소.”
그러자 플로네 공작부인이 대뜸 화를 터트렸다.
“그게 당신이 할 소리인가요! 우리 귀여운 망나니 열심히 찾아볼 생각도 안 하고 침상에 누워서 일 년 내내 울기만 하던 인간아!”
망나니가 아니라, 망아지…….
로즈메리는 어머니의 말을 정정해주고 싶은 걸 애써 참았다. 사실 저가 보기엔 그게 그것인 것 같았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당신은 어찌 딸 잃은 슬픔을 그리 매도하는지……. 내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져 살 수가 없었소. 살아도 사는 게 아니었단 말이오.”
“망나니 안 죽었다고요! 이보세요! 살아 돌아오잖아요! 그 아이가 어떤 아이인가요! 억척같고 아주 징글징글한 아이 아니던가요?! 난 포기하지 않았어요! 우리 망나니 살아있을 줄 알았어!”
로즈메리는 점차 언성이 높아지는 공작 부부의 대화에 질린 낯짝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일단 ‘귀여운 망아지’라는 애칭부터가 괴상했는데, 이어지는 내용도 과연 마거릿을 아끼는 건지, 헐뜯는 건지 알 수가 없을 지경이다.
‘하여간, 저러니까 마거릿이 삐뚤어졌지.’
로즈메리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보다 당신은 황성에 가셔야죠! 이니스는 벌써 출발했는데, 당신은 지금 뭐 하고 있는 건가요?”
로즈메리는 한숨을 내쉬고는 부부싸움을 하는 공작 부부를 대신해서 야무지게 마거릿의 귀환파티를 준비했다.
* * *
우리는 드디어 란그리드 제국에 입성했다.
수도 버네튼의 서문을 지남과 동시에 수도 사람들이 전부 나와 우리를 환영하는 모습이 보였다.
승전을 한 것도 아닌데도 이런 환대라니.
중간중간 ‘대륙의 평화를 이룬 황태자 전하 만세!’ 같은 현수막이 보이는 걸 보아, 아무래도 평화롭게 협상이 끝나고 종전된 것을 기뻐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곧장 황궁으로 향했다. 역시나 황궁에서도 환대가 이어졌다.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마차 창문 밖을 기웃거렸다.
“신기해?”
그런 나를 보면서 카이든이 귀엽다는 듯 웃음 지었다. 민망해서 나는 창문에서 고개를 떼고 바로 앉았다.
환대의 길 끝에는 화려한 황성이 있었다. 나는 에녹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서 내리며 고개를 들었다.
황성의 입구까지 황제와 황후가 친히 마중 나와 있었다. 은지가 눈치껏 드레스 주머니 안으로 들어갔다.
황제는 무뚝뚝한 인상에 다소 무서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황후는 그보다 열 살은 어려 보였는데, 마거릿의 기억보다도 더 온화한 인상이었다.
그러나 로드반이 모란꽃 세력이라면 높은 확률로 황후가 뒷배일 것이다. 그렇기에 인자하게 미소 짓고 있는 황후가 다소 껄끄럽게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분명 로드반의 소식을 들었을 텐데,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이 저런 다정한 어머니의 모습을 연출하다니. 보통 사람은 아니다.
황후는 우리를 보자마자 입구의 계단을 내려와 에녹의 두 손을 잡았다.
“무사했구나.”
에녹의 손등을 토닥인 황후가 이번엔 나와 카이든을 돌아봤다.
“로드와 플로네 영애도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순간, 아주 찰나였지만 분명 나는 보았다.
카이든을 지나 나를 스윽 훑는 황후의 눈빛에 언뜻 혐오의 감정이 스쳐가는 것을 말이다.
겉으로는 티 내지 않았지만 알레아 섬으로 납치당하기 이전부터 황후는 나를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다.
원래 나의 어머니인 플로네 공작부인과 황후는 제법 친분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황후가 일방적으로 어머니와 친분을 만들고자 했고 어머니는 웃는 얼굴로 거리를 두려고 했다. 황후가 우리 가문의 자매들을 로드반과 엮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마거릿은 눈치 없이 에녹을 졸졸 쫓아다니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에게 힘을 보태려고 했었다. 아마 그래서 날 싫어했을 것이다. 물론 그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점 때문에 에녹도 나를 싫어했었지만.
황후가 로드반과 함께 모란꽃 세력이라면, 나를 알레아 섬으로 보낸 사람이 그녀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나를 내내 방해꾼으로 여기고 있었으니까.
내가 깊이 생각에 잠긴 사이 에녹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가 예를 갖추자 나와 카이든도 그를 따라 무릎을 꿇었고, 뒤이어 시립해있던 기사들이 전부 따라서 무릎을 꿇는 장관이 펼쳐졌다.
“에녹 아스터 클라우스 란그리드. 무사 귀환을 보고합니다. 란그리드의 광영을 위하여.”
“란드리드의 광영을 위하여!”
에녹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기사들이 일제히 따라 외쳤다.
이번엔 황제가 다가와 에녹의 어깨를 두드렸다.
“고생했구나. 그간 있었던 일에 대해 들어야겠군. 나눌 이야기가 많다.”
나는 흘끗 황제와 황후의 뒤를 쳐다봤다. 그들의 뒤로는 제도에서 영향력 있는 가문의 가주들이 전부 나와 서 있었다.
가주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은 나와 카이든에게로 꽂혀 있었다. 에녹을 제외하고는 전부 기사들이었는데, 그 사이에 카이든과 나는 무척이나 튀었기 때문이다.
“로드와 플로네 영애도 무사히 돌아오다니 매우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소.”
황제의 시선이 이번엔 나와 카이든에게로 꽂혔다.
혼자였다면 이런 과도한 관심이 부담스러웠을 테다. 과거의 마거릿도 황제를 이렇게까지 가까이서 마주한 적은 없는 것 같고.
하지만 지금의 나는 혼자가 아니었고, 운명공동체로 엮인 내 ‘전우’들이 모두 사회적으로 대단한 인물들이었으니 어쩌겠는가. 앞으로 이쯤은 아무렇지 않게 견뎌내야 한다. 나는 긴장으로 마른 침을 삼키고는 고개를 숙여 대답했다.
“폐하의 배려와 환대에 감사합니다.”
다행히 황후와 달리 황제는 내게 큰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신은 전해 받았다네. 그동안 그대들이 실종상태였던 이유가 모종의 세력에 의해 ‘납치’를 당했기 때문이라고 말일세.”
술렁.
소문을 들은 사람들의 술렁거림이 점차 커지자 황제가 한 손을 들었다. 그러자 술렁임이 딱 멈추었다.
황제가 조금 더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는 에녹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숙이고는 우리에게만 들릴 정도로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알레아 섬이라는 곳을 찾기 위해 정찰대를 보냈더군. 잘했구나. 그 누구보다 우리 제국이 먼저 섬을 찾아야 한다. 란그리드의 남부 해안을 다른 놈들이 들쑤시는 걸 가만 두고 볼 수는 없느니라.”
“저희가 먼저 찾아낼 것입니다. 걱정 마십시오, 폐하.”
에녹이 고개를 숙이고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그런 그를 빤히 내려다보던 황제가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다.
“로드반 황자의 소식 또한, 전해 들었다. 그의 처분은 조금 기다리도록.”
그리고는 천천히 물러나 좌중을 훑었다. 나는 다소 묘한 기분이 되어 황제를 쳐다봤다.
황제는 에녹의 편인 걸까, 로드반의 편인 걸까. 아니라면 누구의 편도 서고 싶지 않은 걸까.
황제의 뒤에 선 황후 또한, 태연한 얼굴이어서 도무지 속을 알 수가 없어 보였다.
황제가 커다란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무엇보다도 실종되었던 이들이 무사히 돌아온 것에 매우 큰 기쁨을 느끼는 바, 귀환한 이들을 위한 파티를 준비했다. 시일은 나흘 뒤니, 모두 충분한 휴식을 취한 뒤 파티에 참석하도록.”
겨우 나흘 가지고 충분한 휴식이라고? 귀환 파티는 대체 누구를 위한 귀환 파티란 말인가.
나는 벌써부터 한숨이 터져 나오는 걸 가까스로 참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