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187)화 (187/234)

25. 집으로

디에고 형제는 우리보다도 먼저 군영을 떠났다.

그들은 수도가 아닌 알레아 섬을 찾아 남부 해안가로 향할 거라고 했다. 그곳에서 에녹이 보냈던 정찰대와 합류한다고 했던 것 같다.

디에고가 떠나기 전에 유안나와 긴 시간 대화를 나누다가 말다툼이 오고갔다는 얘기를 들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그와 관련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아서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는 알 수 없었다.

‘디에고가 고백이라도 했나?’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던 중에 카이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차 안이 좁은 것 같은데, 마거릿이 불편해하지 않습니까.”

그가 맞은편에 앉아 있는 에녹에게 눈치를 주며 투덜거렸다. 말을 타고 이동하기로 했던 에녹이 함께 마차에 탔기 때문인 것 같다.

“마거릿하고 둘이 오붓하게 있나 했더니.”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앉아 있는 카이든은 굉장히 불량스러워 보였다. 나는 그런 카이든을 가만히 관찰했다.

루비처럼 붉은 눈동자, 달빛처럼 아름다운 은발. 그는 마치 날카로움과 다채로움을 엮어 빚은 하나의 예술품 같다. 단정함보다는 화려함에 가까운 인상이라 작은 동작도 굉장히 동적으로 보이는 사람이었다.

굵고 거친 선으로 이뤄진 용모에 단단하고도 정적인 느낌을 자아내는 에녹과는 완벽히 대비되는 남자다.

더불어 마법사이면서도 괴력의 소유자답게 덩치가 에녹에 뒤지지 않았다. 옷깃 사이로 언뜻 보이는 적당한 근육을 보며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그에겐 마차가 비좁을 만하지.

에녹은 얼마간 그를 무시하며 대꾸조차 하지 않았지만 카이든의 불만이 계속되자 끝내,

“마거릿, 로드의 말대로 마차 안이 좁은 것 같으니 여기 앉는 게 좋겠군.”

라며 내게 자신의 허벅지를 두드려 보였다.

카이든이 분개하며 벌떡 일어났다가 마차 천장에 머리를 부딪히고선 고통스러운 신음을 뱉었다. 나는 에녹을 향해 무심히 대답했다.

“됐어요. 남자 둘과 비좁은 마차에 함께 탄 것도 민망한데 여기서 더 이상한 소문이 나면 어떡해요?”

“마거릿, 그게 무슨 소리야. 너 우리랑 함께 있는 게 사실은 싫었던 거야?”

카이든이 와락 인상을 구기며 물었다.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여긴 섬이 아니잖아. 사회적 체면을 생각해야지.”

“사회적 체면? 하…….”

그가 목을 갑갑하게 죄는 단추를 풀고 쇄골을 매만지며 나를 노려봤다. 고단한 일이 많았던 모양인지 낮게 깔린 저음의 목소리가 탁하게 갈라졌다.

“왜. 소문이 나면 곤란해? 결혼 못 할까 봐? 난 오히려 좋아. 그럼 네가 나랑 평생 살아줄 거 아니야.”

“로드. 그만하는 게 좋겠군.”

“그만은 무슨. 하고 싶은 말을 내가 대신해줘서 사실 기쁜 건 아닙니까? 그리고 나는 마거릿의 사랑을 나눠 가질 생각이 없는데.”

숨이 턱 막힐 정도의 위압감을 풍기는 황금색 눈동자와 섬뜩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적색 눈동자가 불안하게 맞물린다.

“저기, 내가 두 사람에게 사랑을 나눠줄 거라는 말을 한 적은 없는데?”

카이든의 붉은 눈동자가 의중을 살피듯이 내 얼굴을 차분하게 훑는다. 나를 보는 그의 눈동자가 위험하게 반짝였다. 하지만 난 사실을 말했을 뿐이다. 아직 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으니까.

“마거릿, 나 집착 심해. 소유욕도 심해. 저 인간은 아닐 것 같아?”

카이든이 에녹을 가리키며 말하고는 짜증스럽게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래도 참을게. 네가 싫다면, 지금은 참을게. 하지만 제국에 돌아가서도 멀어지려고 거리 두면 가만 못 있어.”

안타깝지만 나는 카이든이 안심할 수 있도록 그들과 멀어지지 않겠다는 말을 해줄 수 없었다. 그건 불가능한 약속이잖아.

당장엔 해야 할 일이 많아서 계속해서 얼굴을 봐야 할 테지만, 그래도 예전보다 거리감은 생길 수밖에 없다. 서로 각자의 집이 있고 각자의 생활이 있었으니까. 섬에서처럼 매일 같이 붙어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설마 깽판이라도 치겠어?’라고 생각했는데 왠지 카이든이라면 미친 짓거리를 서슴없이 벌이고도 남을 인간 같아서 잠시 고민이 됐다.

그러나 내가 뭐라 답을 하기도 전에 내 몸이 들렸다. 에녹이 나를 잡아당겨 자신이 있던 자리에 앉히고선 저가 카이든 옆에 착석했다.

좁은 마차 한쪽에 덩치 큰 두 남자가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은 다소 괴상했다. 보는 내가 다 답답하고 불편해 보였다.

“제기랄, 좁아터지겠다고! 안 비킵니까?”

카이든이 으르렁거렸지만 에녹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때 드레스 주머니에서 잠을 자고 있던 은지가 고개를 내밀고 에녹과 카이든을 향해 이를 드러냈다.

캬악!

화를 낸 은지가 주머니에서 기어 나와 내 무릎 위에 똬리를 틀고 자리를 잡았다. 단잠을 방해받은 것이 짜증났는지 얼굴엔 불만이 한가득이었다.

은지에게 눈총을 받은 두 남자는 그제야 민망했던지 입을 다물었다.

나는 그들에게서 신경을 끄기로 하고 마차 창문을 열어 창밖의 경치를 감상했다.

‘……날씨 좋다.’

란그리드 제국 도착까지 이틀밖에 남지 않았지만 군부대가 함께 머물 마을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결국 오늘 밤도 야영을 해야 했다.

기사들이 야영지를 세우는 동안, 나는 들러붙는 에녹과 카이든을 떨쳐내고 은지와 함께 산책을 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 역시 노엘과 하이젠이 졸졸 따라오는 바람에 온전하게 산책을 즐기기는 어려웠다. 나는 미간을 좁히며 그들을 원망스레 돌아봤다.

“왜 자꾸 따라오시는 건가요? 사과는 이제 그만 하세요.”

내 물음에 노엘과 하이젠이 곤란한 얼굴로 눈치를 살폈다.

“황태자 전하께서 영애를 호위하라 하명하셨습니다.”

에녹의 명이라니. 황태자의 명령이 기사들에게 얼마나 절대적인지 알기 때문에 난 그들에게 호위가 필요 없다고 말하는 건 깔끔하게 포기했다.

섬에서는 늘 혼자 문제를 해결했었다. 도움을 받기보단 오히려 도움을 주는 쪽이었지.

이제 와 연약한 귀족 영애 취급, 엄중한 보호를 받으려니 무척 어색했다.

하지만 제국으로 돌아가면 이런 호위가 일상이 될 테니, 이제 정말 적응해야 했다.

‘나는 고상한 귀족 영애다. 고상한 귀족 영애.’

이제는 비린내 나는 물고기 손질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되고, 혹여 마물이나 산짐승이 나오지는 않을까 정찰을 하지 않아도 되고, 식사거리를 직접 구하러 다니지 않아도 된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드레스 주머니에 넣어둔 조명탄을 꺼내 탄창을 확인했다.

탄알을 가득 채워놓긴 했지만 여분의 탄알이 그리 많이 남지는 않았다. 화염 폭탄도 몇 개 남아 있었던 것 같은데, 이제 필요 없으니 카이든에게 줘 버릴까.

내가 앞으로 계속해서 걸어가자 노엘과 하이젠이 경고했다.

“이쪽은 마물이 자주 등장하는 지역이라 조심하셔야 합니다.”

앗, 은지 먹이로 줄 마물 딱 두 마리만 사냥해 올 생각이었는데. 하지만 노엘과 하이젠이 걱정을 하는 것도 이해는 되니 아쉽지만 그냥 돌아가야겠다.

‘은지야 미안해, 언니가 네 밥을 쟁취하지 못했어.’

팔뚝에 매달려 있던 은지도 매우 아쉬웠는지 혀를 날름거리며 내 등 뒤를 흘끗흘끗 쳐다봤다.

그렇게 마물 사냥은 포기하고 조명탄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을 때였다.

바스락.

어디선가 풀잎을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등 뒤로 스산한 느낌이 들었다. 팔뚝에 매달려 있던 은지가 빠르게 고개를 들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무슨 소리죠?”

나는 놀라서 주머니에서 다시 조명탄을 꺼내 들었다. 노엘과 하이젠이 검을 뽑아 들고 나를 보호하는 자세로 경계 태세를 갖추었다.

으아악!

쿠쿵- 쿵!

멀리서 사람들의 비명이 난무했다. 두 기사와 눈빛 교환을 한 난 재빨리 본진을 향해 뛰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내가 본 장면은, 가히 지옥과도 같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상한 마물들을 상대하느라 본진은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난 예상치 못한 광경에 잠시 넋을 놓았다.

근처에 있던 기사 한 명이 우리를 발견하고 달려와 위험을 알렸다.

“영애, 어서 여길 피하십……!? 크헉!”

코앞에 있던 기사의 배에 무언가가 날아와 꽂혔다. 나는 기사의 배를 관통한 것을 보았다. 검고 긴 다리 같은 것은 소름 끼치는 털로 수북했다.

“크흑. 도, 도망……! 으아아악!”

기사의 배를 관통한 정체 모를 것이 그를 높이 들어 올렸다. 나는 그제야 놈의 정체를 파악했다.

저건 분명 알레아 섬에서 보았던 거대한 크기의 타란튤라 마물이었다.

“제기랄, 대체 이게 뭐……!”

하이젠과 노엘이 검을 뽑아들고 동시에 내 앞을 가로막았다. 타란튤라 마물은 가는 거미줄을 뽑아 기사를 돌돌 감고는 다시 한번 날카로운 다리로 배를 쿡 눌러 찍었다. 우리에게로 곧장 피가 튀었다.

나는 얼굴에 튄 피를 손등으로 닦았다. 섬에서 있었던 끔찍한 일들이 자동으로 떠오르며 손이 덜덜 떨려왔다.

캬아아악-! 팔뚝에 매달려 있던 은지가 날카롭게 반응했다.

지척에서 다른 기사들이 달려와 타란튤라 마물을 상대하는 사이, 나는 멀리 숲속 사이로 몰려드는 또 다른 마물들을 발견했다.

본래도 마물의 생김새는 각양각색이다. 그러나 알레아 섬에서 보았던 것들은 거기서 한 단계 더 진화하여 꼭 외계 생물처럼 더 괴상했는데, 지금 몰려드는 마물들이 그와 비슷했다.

‘설마, 그럴 리가. 알레아 섬은 폭발했는데……?’

혹시 마물의 진화 부작용이 바이러스처럼 내륙으로까지 번지기라도 한 걸까?

게다가 몰려드는 마물들의 움직임이 다소 이상했다. 보통 마물이 떼로 움직일 때는 일정한 패턴을 보이며 이동하는데 지금 모여드는 마물들은 그런 것이 없었다.

나는 당황해서 노엘과 하이젠을 돌아봤다.

“마물의 움직임이 너무 산발적이에요. 이상하지 않나요?”

“그러게 말입니다. 꼭 무언가에 이끌려온 것 같습니다.”

그래도 에녹의 지휘 아래 기사들이 대열을 갖춰가는 것이 보였다. 카이든이 방어 마법진과 공격 마법진을 교차로 펼치는 것까지 보고 나는 은지에게 마력을 나눴다. 이렇게 머저리처럼 겁에 질려 있을 수만은 없었다.

알레아 섬을 탈출하면 더는 조명탄을 쏠 일이 없을 줄 알았지. 내 인생은 왜 이리도 고달픈가.

“어? 영애!”

내가 몸집을 키운 은지의 머리 위에 올라타자, 노엘과 하이젠이 당황한 얼굴을 했다. 나는 그런 그들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함께 가실래요? 도와야죠.”

금방 정신을 차린 기사들이 나를 따라 차례로 은지의 몸 위로 올라탔다. 은지가 조금 더 거대하게 몸집을 키우며 전투 한가운데로 전진했다.

그렇지 않아도 은지에게 내 마력을 나눠주는 게 기력이 빨리는 일이라 힘들었는데. 이참에 마물을 배불리 먹여야겠다. 은지도 신이 난 것 같았다.

캬아아악!

은지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한 뱀의 몸통이 하늘을 가르고 내려왔다.

그 압도적인 형체를 본 마물들이 주춤하는 기색을 보였다.

은지가 야영지를 휩쓸며 마물들만 골라 먹어치우는 사이, 나는 조명탄을 장전하고 마물 떼가 모여 있는 곳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우글우글 모여 있는 마물 사이로 붉은 연기가 사라지더니 수초 후 거대한 불꽃이 되어 터졌다.

펑! 퍼엉-!

마물이 조각나며 하늘에 비처럼 쏟아지는 것을 보고 기사들이 내 쪽을 돌아봤다.

그러나 놀란 기사들을 향해 인사를 해줄 시간도 없었다.

갑자기 땅에서 두툼한 나뭇가지가 치솟아 오르더니 은지의 꼬리를 타고 올라왔기 때문이다.

‘제기랄, 이건 또 뭐야!’

괴상한 나뭇가지 형태를 한 마물이 나와 노엘, 하이젠을 차례로 쳐서 바닥으로 떨구었다. 다행히도 카이든이 멀리서 나를 발견하고 재빠르게 마법진을 펼쳐준 덕에 우리는 다친 곳 없이 바닥에 착지했다.

그러나 문제는 은지였다.

마물이 은지의 몸통에 나뭇가지를 찔러 넣은 것이다.

캬악!

은지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며 몸부림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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