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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186)화 (186/234)

나를 바라보는 금안이 농염한 빛을 띤다. 마치 연인들 간에 은밀한 비밀을 속삭이는 듯한 분위기다.

“아니……, 그게 맞긴 한데, 맞는 말이긴 한데. 아니. 그게. 전하께선 무슨 말을 그런 식으로 하세요?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어요.”

난 당황해서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자 에녹이 느긋한 걸음으로 멀어진 만큼 가까이 다가왔다.

“오해할 게 있나. 나는 사실만을 말했을 뿐인데.”

그리곤 손을 뻗어 흘러내린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꽂아주었다.

“다 됐다.”

그가 천연덕스럽게 뒤로 물러나며 내 드레스를 가리켰다.

그 여유로움이 불만스럽다. 그에게 동요한 것이 억울해져서 나는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장난치지 마세요.”

“장난이라고 생각한다니 유감이군. 난 늘 진심이야. 그대에게.”

에녹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는 나를 가만히 쳐다보며 말했다.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금안이 나만을 담고 있다.

‘그럼 에녹은 여기서 나가면 가장 하고 싶은 게 뭐예요?’

‘……글쎄.’

‘뭐예요. 잘 생각해 봐요. 저는 성실하게 대답했는데, 그렇게 성의 없이 굴 거예요?’

‘하지만, 마거릿. 내가 제대로 말하면, 그대가 곤란해질 텐데.’

그러고 보니, 에녹은 결국 섬을 탈출하면 하고 싶은 게 뭔지 말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물었다.

“하지만 그때 에녹은 대답하지 않았잖아요. 섬을 탈출하면 하고 싶은 게 뭔지.”

내 물음에 에녹의 눈썹이 까딱 올라갔다. 그는 질문을 곱씹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뒤늦게야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한 얼굴로 나를 봤다.

그래서 나는 그를 향해 재차 물었다.

“대답하면 여전히 제가 곤란해질 것 같나요?”

“그게 아직도 궁금했나 보군.”

에녹이 턱을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그러곤 가만히 내 얼굴을 쳐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나는 그가 어떤 말이든 대답하기를 기다렸다.

“섬을 나가면 하고 싶은 것이라……. 지금 해도 되나?”

“지금요?”

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뭘 할지 몰라 조금 긴장했는데, 뜻밖에도 그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잡아주겠나.”

영문을 몰라 내게 내밀어진 손을 보다가 조심히 그의 손에 내 손을 겹쳐 올렸다.

“이런 게 하고 싶었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숙여 내 손등에 입을 맞췄다. 고작 손등에 키스? 의아함에 그를 바라보고 있는데 그가 허리를 숙인 채로 나를 올려다보더니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이런 것도.”

그가 내 손을 뒤집어 이번엔 손바닥에 입술을 눌렀다. 손바닥의 여린 살에 닿는 부드러운 입술 감촉이 야릇하다. 손가락이 절로 곱아들었다.

그걸 본 에녹이 천천히 손바닥에서 입술을 떼고 느긋하게 허리를 폈다. 뭐야, 끝난 건가?

섬에서 탈출하면 하고 싶은 일이 따뜻한 물로 목욕을 한다든가,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든가 하는 게 아니라 그저 내 손에 입맞춤을 하는 거라니.

“아직 남았어.”

그가 조심히 내 턱을 잡고서 고요하게 나를 직시했다. 나는 마치 거미줄에 사로잡힌 먹잇감처럼 꼼짝도 못하고 그의 얼굴을 마주 봤다.

이윽고 그의 고개가 내 얼굴 위로 천천히 내려온다.

가까워지는 얼굴에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그러나 눈을 감고 한참의 시간이 흘렀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의아함에 천천히 눈을 뜨자 나를 보며 웃고 있는 에녹이 보였다.

그는 달콤한 사탕을 가득 넣은 것만 같은 눈을 하고는 사랑스럽다는 듯이 나를 봤다.

“지금 이게 뭐……!”

“기대하고 있었나.”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그가 물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는 황급히 그에게서 멀어졌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뭐야, 이게 무슨 일이지?’

나는 조용히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심장이 주체를 못하고 뛰었다. 도무지 진정이 되질 않는다. 지금까지 섬에서 이것보다 더한 신체접촉도 많이 했는데 왜 갑자기…….

내 몸에서 일어난 이상반응에 혼란스러운 것도 잠시,

“하고 싶은 게 더 있는데.”

에녹의 시선이 내 입술 위에 내려앉는다. 그 노골적인 시선에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바짝 긴장이 되어 나는 혀로 메마른 입술을 축이며 그가 다가오지 못하도록 손을 뻗었다.

“아, 알겠어요. 굳이 행동으로 보여 주지 않아도 이해했어요.”

“이해? 이해하긴 아직 일러, 마거릿.”

에녹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내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궁금해도 참도록. 천천히 하겠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조금 아쉽기까지 해서 더더욱 혼란스러웠다. 그렇게 긴장해서 어깨를 움츠리고 있는데, 에녹의 손이 어깨에 닿았다.

“어깨는 펴는 게 좋겠군. 턱 끝은 아래로. 그렇지.”

에녹은 자연스럽게 내 자세를 귀족답게 교정해주었다. 나는 조금 민망해서 시선을 회피했다.

마거릿으로서의 자아를 깨달았음에도 몸은 여전히 이진주로서의 습관에 익숙하다. 이래서 귀족 세계에 어떻게 적응하지.

그러나 에녹은 조금도 개의치 않은 얼굴로 내게 손을 내밀었다.

“이제 가지. 집으로.”

나는 내게 내밀어진 그의 손을 가만히 보다가 조용히 그 손을 잡았다.

집으로. 돌아간다.

눈물이 나올 것만 같은 말이었다.

나는 벅차오르는 마음으로 에녹의 손을 잡고 막사에서 나왔다. 마차들의 행렬과 함께 떠날 준비가 끝난 기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마차에 타야 하는데, 카이든이 통 보이질 않았다.

“카이든은 어디로 간 거지?”

때마침 어딜 다녀왔는지 급히 뛰어온 그가 내 앞에 멈춰 서서 숨을 골랐다.

“기다렸어?”

“어디 다녀와?”

“노인네랑 실랑이 좀 하느라고.”

‘노인네’란 카이든이 제나스를 지칭하는 호칭이었다. 천년이나 살았으니 노인네가 맞지. 외모는 전혀 그렇지 못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웃고 있는 카이든이 내게는 몹시 안쓰럽게 보였다. 그에게 로하데란 이름이 어떤 의미인지 알기 때문에, 제나스를 품고 있는 카이든의 정신건강도 무척 걱정됐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난 괜찮으니까.”

카이든이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퍽 다정하게 말했다. 커다란 손이 따뜻하다. 섬뜩하다고 생각했던 붉은 눈동자가 어쩐지 지금은 루비처럼 반짝이는 것 같았다.

그래.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카이든은 더 강한 사람이다.

“마차에 얼른 타고. 집에 가야지.”

카이든의 말에 나는 결국 먼저 마차에 올랐다. 뒤이어 들어오려던 에녹을 밀친 카이든이 내 옆에 앉았다.

“마거릿 옆은 내 거지. 후, 놓칠 뻔 했네.”

그렇게 말한 카이든이 뻔뻔한 얼굴로 에녹을 보며 물었다.

“안 타십니까?”

에녹이 못마땅한 얼굴로 카이든을 보다가 하는 수 없이 내 맞은편에 앉았다. 좁은 마차 안에서 실랑이를 해봤자 좋을 게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제 진짜 집으로 가는 건가? 다른 일행들하고 아직 작별인사를 제대로 못 나눈 것 같은데. 그래도 곧 다시 만날 수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마차 창밖을 내다봤다.

그러나 막 떠나려는 찰나에 돌연 마차가 멈춰 섰다. 의아함에 마차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살피는데 멀리서 낯설지 않은 무리가 등장했다.

다름 아닌 헤스티아 왕국의 기사들과 아스달이었다.

아스달의 방문으로 에녹, 카이든과 함께 나는 다시 마차 밖으로 끌려 나왔다.

“이대로 헤어지긴 아쉬워서 달려왔지.”

아스달이 웃음을 지으며 에녹, 카이든과 악수를 나눴다.

“영애, 내가 곧 란그리드 제국으로 방문할 터이니 기다리고 있게나.”

그가 나를 보며 윙크했다. 왜 나만 콕 집어서 저런 말을 하는 거야.

“마거릿!”

이번엔 반대 방향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또 다른 무리가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사제복을 입고 있는 남자들과 그 가운데 선 단발머리 여자가 눈에 띈다. 유안나와 루제프였다.

유안나는 한걸음에 달려와서는 나를 끌어안았다. 어깨에 있던 은지가 허둥지둥하더니 내 드레스 주머니로 내려가 숨었다.

숨도 쉬기 어려울 정도로 나를 깊이 끌어안은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내 뺨을 움켜쥐고 얼굴 안색을 이리저리 살폈다.

“정리만 끝나면, 란그리드 제국으로 곧장 갈게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왜 다들 란그리드 제국으로 오겠다고 안달이 나 있는 거야. 루제프까지 내게 달려와 내 손을 두 손으로 꼭 붙들고 울먹거렸다.

“영애, 헤어지기 너무 아쉽습니다. 섬에선 영애 없이 살 수 없었는데, 이제는 영애 없이 어떻게 삽니까?”

“무슨 소리예요. 여긴 섬이 아니잖아요.”

하지만 루제프는 계속 눈물짓느라 내 말을 거의 제대로 듣지도 못한 것처럼 보였다. 유안나가 말로 다 하기 어렵다는 듯 깊은 표정을 하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제 목숨은 마거릿 거예요. 마거릿이 아니었으면 여기 이렇게 살아있지도 못했을 거야.”

입을 다문 그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가만히 우리의 대화를 듣던 루제프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며 말을 보탰다.

“제 목숨도 영애의 것입니다. 저도 영애 아니었으면 진즉에 그 섬에서 비명횡사했을 것입니다.”

아니, 지금 문제는 그런 것이 아니다. 란그리드 제국군에 헤스티아 왕국군, 거기다가 교황청 사람들까지 우리에게로 쏟아지는 사람들의 시선이 굉장했다.

“여러분, 저는 제 목숨 건사하기도 바쁘거든요. 당신들 목숨까지 쥐고 있기엔 무거우니까 저한테 주지 마세요.”

루제프와 유안나가 동시에 내 말에 깊이 감명을 받은 얼굴을 했다. 그러고도 한참 동안 난 유안나와 루제프, 거기에 합류한 아스달의 구구절절한 작별인사를 들어야 했고 결국 보다 못한 아랫사람들의 재촉이 시작되고서야 작별인사가 끝이 났다.

우리는 증거를 모두 수집한 뒤 빠르면 두세 달 내로 다시 모이기로 했다. 아스달이 얼마 남지 않은 내 생일을 언급했다.

“다시 모이는 건 플로네 영애의 생일날로 하지. 생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지?”

“그건 싫은데요.”

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내 생일은 어떻게 알았지?

“그날 파티도 할 거 아니에요? 우리만 초대 안 하려고요? 그러면 서운해요.”

“오랜만에 파티도 즐기고 재밌겠군요.”

유안나와 루제프가 신난 목소리로 맞장구를 쳤다.

아무도 내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에녹과 카이든도 동의하는 얼굴을 하는 걸 보니 이미 결정이 된 것 같다. 이런.

아무튼 지금은 모두 할 일이 많았다. 카이든은 로하데 가문에서 피의 혈서를 찾고 에녹은 알레아 섬을 찾아 수색해야 했다. 아스달도 헤스티아 왕국에서, 그리고 유안나와 루제프는 교황청에서 모란꽃 세력을 찾아 그들의 동향을 파악하고 증거를 수집해야 했다. 교황청은 이미 고위 직급의 사제라면 대부분이 모란꽃 세력인 것 같지만.

그렇게 우리는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잠시 이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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