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185)화 (185/234)

“그동안 많이 힘드셨을 것 같습니다.”

하이젠도 노엘의 말에 공감하며 나를 동정했다. 나는 황당한 얼굴로 그들을 보다가 웃었다.

“그렇게 제가 불쌍하면 소문이나 내주세요.”

“네?”

“제가 여기서 당신들을 어떻게 구했는지, 제가 얼마나 착한 사람인지, 소문 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자고로 이런 말을 할 때는 뻔뻔해야 한다. 나는 아주 태연한 얼굴로 인자하게 웃으며 그들을 쳐다봤다.

노엘과 하이젠은 당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반쯤 농담 삼아 말을 덧붙였다.

“아니, 그렇잖아요. 제가 그렇게 불쌍하고 가여우면 말로만 동정하지 마시고 행동으로 보여주세요. 제게는 그게 보답이 될 것 같네요.”

내 말에 노엘과 하이젠은 잠시 혼란스러운 얼굴을 하다가 이내 굳은 결심이 서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영애께 받은 은혜, 꼭 보답하겠습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영애.”

어느 정도는 의도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그 말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파장을 일으킬 줄은.

* * *

성기사단의 군영.

베나트리에 교황은 제 앞에 앉은 여자를 멀거니 노려봤다.

여자, 그러니까 이 세상의 유일한 성녀이자 신의 선택을 받은 여인인 유안나는 그 누구보다도 악랄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다시 봐서 너무 반갑다, 그렇죠? 교황 성하께서 친히 이 전쟁터까지 내려올 줄은 몰랐는데. 하긴, 사라진 이들이 다시 나타났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엉덩이에 불나도록 달려와야지, 안 그래요?”

“어허, 성녀님.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베나트리에 교황의 옆에 서 있던 린네하온 대주교가 유안나를 다그쳤다. 그러자 유안나의 옆에 서 있던 루제프가 와락 인상을 구겼다.

“닥치십시오. 당신도 공범인 거 다 압니다.”

“이보시오, 루제프 대주교. 어디서 교황 성하 앞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게요!”

“그 입 닥치라고 했습니다, 린네하온. 내 성격을 모르는 게 아니라면 두 번 말하게 하지 마십시오.”

루제프의 살벌한 시선이 린네하온 대주교의 얼굴에 닿았다. 루제프의 까칠하고 지X맞은 성격을 교황청 내에 모르는 자가 없을 테다.

린네하온은 베나트리에 교황을 슬쩍 보고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내가 실종된 걸 빌미로 시작한 전쟁 아닌가? 그러니 종전 선언에 동의하세요. 성녀가 기껏 돌아왔는데, 그래야 모양새가 좋잖아.”

유안나가 베나트리에 교황을 보며 미소 지었다.

“동의 안하면 나도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는데. 동의하시면 얌전히 있어 드리지요.”

그녀의 협박이 아니더라도 전세는 이미 기울었다. 성녀도 돌아온 마당에 신을 모시는 교황청에서 전쟁을 계속하는 게, 그녀 말대로 좋은 모양새는 아니었다.

베나트리에 교황은 이를 까득 갈았다. 대체 어떻게 돌아온 건지 모르겠다. 알레아 섬으로 향하는 워프게이트도 망가지고 제나스와는 연락이 닿질 않았다.

망할 마법사.

베나트리에는 제나스를 싫어했지만, 그의 능력만큼은 믿었다. 무려 천년 동안 이 위대한 실험을 진행해오던 마법사가 아니던가.

그런데 성공을 목전에 두고 일이 어그러지다니.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결국 이를 갈며 유안나의 말대로 일단 종전 선언에 동의하기로 했다.

유안나와 루제프가 막사를 나가자마자 베나트리에는 들고 있던 찻잔을 매섭게 집어 던졌다. 린네하온 대주교가 허리를 곧추세우고 바짝 긴장했다.

“모란꽃이 다시 화합을 해야겠군.”

베나트리에의 말에 린네하온이 놀란 얼굴을 했다.

“예? 하지만 모란꽃은…….”

린네하온은 말끝을 흐렸다.

모란꽃 세력은 천년 동안 서로 비밀리에 협력하며 실험을 진행해왔다. 그러나 본디 그들은 각기 대립하는 위치에 있는 권력자들이었고, 그런 위치에서 완벽한 화합이란 존재할 수 없는 개념이었다.

그러니 실험의 성공이 목전이라는 제나스 남매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이 서로의 뒤통수를 친 게 아니겠는가.

바로 그 결과물이 작금의 전쟁이었다. 서로의 파이를 더 크게 챙기기 위한.

그런데 이제 와 다시 협력을 하자니.

‘그래 뭐, 여기서 협력을 하지 않겠다고 하면 어쩌겠어. 천년의 기다림을 허무하게 망칠 순 없겠지. 목적을 달성하기 전까진 잠시 휴전이겠군.’

린네하온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베나트리에 교황도 생각을 정리했는지 그에게 차분하게 지시를 내렸다.

“알레아 섬을 찾아. 은밀하게. 누구보다 먼저 찾아야 하네.”

베나트리에 교황은 목소리를 한껏 낮추고는 엄중한 얼굴로 명령했다.

“천년 동안 모은 마력이다. 그게 그대로 소거되었을 리가 없어. 섬이 붕괴되었든 아니든 그곳에 남아 있을 마력을 우리가 먼저 차지하는 걸세. 그리고 증거인멸을 해야지.”

“명을 받듭니다.”

린네하온은 비장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러나 그들의 계획은 뜻처럼 진행되지 않았다. 직후에 에녹 일행이 세간에 ‘알레아 섬’의 존재에 대해서 밝혀버렸기 때문이다.

* * *

마법사 협회, 군영.

“XX X같은 XX들이. 아주 끝까지 XX발광을 하고 있네. X같이 굴지 말고. 종전해, XX. 혀를 다 잘라버리기 전에. 이 XX XX들아.”

카이든은 그의 배다른 형, 헤럴드의 머리를 발로 지그시 눌렀다.

갑작스레 등장한 카이든에 의해 인질로 잡혀버린 지휘관들은 일제히 공격태세를 갖췄다. 하지만 카이든이 손을 한번 휘젓자 군영 전체에 마법진이 생겨났다.

그 어떤 마법사도 그렇게 광범위한 마법진을 손짓 한 번으로 만들어낼 수는 없다. 카이든을 제외하고는. 그야말로 압도적인 힘이었다.

“다들 뒤지고 싶지 않으면 서명해.”

카이든이 마법사들을 주욱 훑으며 차갑게 명령했다. 마법사들이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선뜻 나서지 않자 카이든이 헤럴드의 머리를 밟고 있는 발에 더욱 힘을 줬다.

“아아악!”

헤럴드의 비명과 함께 카이든이 손가락을 한번 튕기자 군영 전체를 감싼 마법진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진의 인력에 의해 마법사들이 차례로 무릎을 꿇었다.

“내가 이 군영에 있는 마법사들을 전부 죽이진 못해도 너희는 죽일 수 있어. 무슨 말인지 알지?”

카이든은 이 시대 최고의 마법사다. 서대륙엔 총 4개의 마탑이 존재했지만, 나머지 마탑주들의 힘을 합쳐도 카이든의 힘에는 미치지 못했다.

로하데 가문의 일원과 원로 마법사들로 구성된 마법사 협회는 4개 마탑의 균형을 위해 존재했다. 그러나 그들은 카이든의 힘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질 무렵 자신들이 그의 힘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 예견했다. 결국 카이든이 한창 날뛰던 혈기왕성한 시절, 그에게 제약을 걸어 동면 상태로 만들어 버리기도 하지 않았던가.

그런 그가 돌아왔으니.

마법사들은 결국 하는 수 없이 종전 동의서에 한 명씩 서명을 남겼다.

카이든에게 밟힌 채 종전 동의서에 서명을 하며 헤럴드는 이를 악물었다.

‘제기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카이든은 제나스에게 바쳐질 제물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제나스가 그의 몸을 차지하고 차원의 문을 열어 세계를 혼란에 빠트렸어야 했는데,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지금의 카이든은 누가 보아도 카이든 본인이었다. 제나스가 그의 행세를 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럼 제나스는 어디 있는 거지? 젠장,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이 사실을 서둘러 아버지, 로하데 공작께 전해 대책을 세워야 했다. 아무래도 그들이 다시 야합을 해야 할 것 같다. 이대로라면 그간의 비밀이 세간에 드러나는 것은 시간문제다.

알레아 섬을 찾아 증거인멸을 하고 생존자들을 전부 제거하는 것. 그들에게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 * *

드디어 협상이 모두 끝나고 고대하던 종전이 선언됐다.

그와 동시에 ‘알레아 섬’의 존재가 세간에 알려졌다.

협상을 진행하며 에녹과 아스달 및 유안나와 카이든이 퍼트린 이야기 때문이었다.

‘실종된 우리가 납치를 당했고 우리를 납치한 배후세력이 있다. 전쟁을 선두한 이들을 의심해봐야 한다. 그에 관한 사실 여부는 란그리드 제국 남부 해안에 있을 알레아 섬을 찾으면 밝혀질 것이다.’라는 게 이야기의 주된 내용이었다.

란그리드 군영은 내내 그 이야기로 떠들썩했는데, 아마 지금 즈음이면 대륙 전역에 이 이야기가 퍼졌을 것이다.

모두가 란그리드의 남부 해안을 주시하고 있을 테니, 모란꽃 세력도 먼저 나서서 알레아 섬을 어찌하지는 못할 테다. 이후 그들이 어떻게 움직일지는 계속해서 지켜봐야 했다.

‘그 전에 나는 드레스부터 입고!’

내가 한참이나 드레스를 갈아입는다고 끙끙대고 있자 결국 기다리던 에녹이 막사 안으로 들어와서 드레스 입는 것을 도왔다.

나는 민망해서 변명을 늘어놓았다.

“이왕 드레스 보내주는 거, 도와줄 하녀도 같이 보내줬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에요. 전쟁도 끝났잖아요.”

“열악한 환경이라 그대를 불편하게 했군.”

그가 등 뒤에 서서 드레스 끈을 묶어주며 덤덤하게 대답했다. 왠지 정말로 내가 철없는 귀족 영애가 되어버린 것 같아서 낯부끄러워지는데.

“전쟁터에서 제가 너무 많은 걸 요구했죠. 부끄럽네요.”

“부끄럽긴.”

에녹이 별안간 피식 웃음을 터트리더니 찬찬히 내게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드러난 맨 어깨에 그의 뜨거운 숨결이 닿았다. 반사적으로 놀라 어깨를 움츠렸는데, 귓가에 지독히 낮은 목소리가 닿았다.

“지금은 이런 걸 더 부끄러워해야지.”

그가 내 맨 어깨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순식간에 얼굴로 열이 몰렸다. 지금쯤이면 얼굴이 터질 듯이 붉어져 있을 것이 뻔했다. 등을 돌리고 있어서 에녹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것이 다행이었다.

나는 결국 할 말이 없어 입을 꾹 다물었다.

에녹은 그 뒤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이따금 맨살에 닿는 그의 손길에 나는 흠칫했다. 힘들어도 혼자 할 걸 그랬나.

“이러고 있으니 섬에서의 일이 생각나는군.”

에녹은 먼 추억을 회상하듯 입을 열었다.

섬에서의 일?

그제야 나는 산속 계곡에서 내 드레스의 단추를 풀어주던 에녹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때 우리가 무슨 대화를 했더라.

‘섬에서 나가면 가장 하고 싶은 게 뭔가.’

‘일단 비누로 몸을 씻고 싶어요.’

그 소원은 섬을 나오기도 전에 이뤘다. 유안나가 오두막에서 비누를 찾았었기 때문이다.

‘또?’

‘음, 정찬 요리를 먹고 싶어요. 플로네 저택에서 먹었던 마지막 정찬이 정말 끝내줬거든요.’

그건 아직 이루지 못했다. 그래도 이제 진짜로 집으로 돌아갈 테니 곧 이룰 수 있으리라.

기분이 이상했다. 우리에게 이런 시간이 오다니. 그리고 그와 나의 관계가 이렇게까지 발전하다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이 뒤섞여 벅차오른다.

영문도 모르고 섬에서 눈을 떴을 때의 그 참담함은 다시 생각해도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혼란과 두려움을 이겨내며 서로에게 의지해 목숨을 부지하던 순간을, 나는 아마도 평생 기억하리라.

에녹은 섬에서의 모든 처음을 나와 함께한 사람이다. 그래서인지 그와의 유대감은 다른 사람들과는 조금 달랐다.

“그러게요. 그동안 정말 많은 일이 있었네요.”

내 아련한 중얼거림에 등 뒤로 에녹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의아해서 나는 슬쩍 몸을 돌려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러자 에녹이 내 뒷목을 조심히 쓸어내리며 내게로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의 더운 숨이 얼굴 가까이 간질거리게 닿는다.

“그땐, 내가 그대의 드레스를 벗겨주지 않았나. 이젠 드레스를 입혀주고 있으니 감회가 새롭다는 말이었는데.”

그의 시선이 드러난 내 목선을 아찔하게 훑었다.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천천히 움직이던 에녹의 시선이 다시금 내 얼굴에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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