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나스가 천천히 앞으로 걸어와서 쓰러진 로드반 앞에 섰다. 그리곤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로드반의 멱살을 쥐고 끌어내리더니, 쇄골에 찍힌 문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거미줄 문양, 그리고 거미줄에 걸린 모란꽃이 눈에 들어왔다.
역시 로드반은 모란꽃 세력이었던 모양이다. 로드반 같은 작자가 혼자 힘으로 모란꽃 일원에 포함됐을 리는 없을 텐데, 어쩌면 황후의 도움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황후가 배후라면, 그들의 목적은 ‘황위’였겠지.
그러나 제나스의 목적은 세계를 망가트리고 권력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그걸 이자들은 몰랐던 걸까?
아마도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이렇게 너도나도 콩고물이라도 얻겠다고 하이에나처럼 붙어 있지.
“확인했나?”
제나스는 그것으로 제 소임을 다했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실험에 가담한 이들을 가려내야 하거든. 하……. 건방진 것. 내가 무슨 사냥개도 아니고.”
제나스는 짜증스럽게 혀를 차고는 갑갑한지 쇄골이 보이도록 셔츠를 풀어헤쳤다. 아마도 저 ‘건방진 것’이란 말은 카이든에게 하는 소리 같았다.
다시 바닥에 내팽개쳐진 로드반이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의 발밑에 있던 검은 그림자가 그의 몸을 타고 올라가 밧줄 모양으로 변하더니, 그를 꽁꽁 묶었기 때문이다.
다들 그제야 카이든의 모습을 한 제나스를 알아차린 모양이다. 한껏 날을 세운 얼굴로 제나스를 경계하자 그가 한숨을 내쉬면서 테이블 앞에 다시 앉았다.
“제약 때문에 뭘 할 수가 없다. 말하기도 입 아프니 그냥 들어가겠다.”
그러더니 얌전히 테이블 위에 엎드려 눈을 감았다. 그렇게 그는 깨어나지 않았다.
아스달이 다가가 숨이 붙어 있는지 확인하고 그를 흔들어 보았지만 미동도 없다. 제나스가 사라지고 온전히 술에 취한 카이든만 남아있는 것 같았다.
그때 막사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에녹이 고갯짓을 하자 기사 한 명이 막사 입구를 가린 천을 걷어냈다.
란그리드 기사 제복을 입은 두 남자가 누군가를 제압해 바닥에 내리누르고 있었다. 곱슬거리는 금발과 짙은 남색 머리카락. 노엘과 하이젠이었다.
“무슨 일인가.”
입구에 서 있던 기사가 묻자 노엘과 하이젠이 제압한 남성을 데리고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절도 있게 에녹을 향해 인사했다.
“막사 안을 계속 기웃거리던 남자입니다. 첩자인 것 같았습니다.”
내내 나를 졸졸 쫓아다니며 기웃거리던 둘이 마침 첩자를 발견하고 잡아 온 모양이다.
그들이 잡아 온 남자는 신원을 파악할 길이 요원한 옷을 입고 있었고 인상 또한 흐릿했다. 가만히 바닥에 포박된 남자를 살피던 에녹이 노엘과 하이젠을 향해 물었다.
“그대들은 어떻게 이자를 발견하고 잡은 거지.”
“그게…….”
에녹이 의심스러운 기색을 표하자 주변에 있던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빼어들어 노엘과 하이젠을 향해 겨누었다.
노엘과 하이젠이 빠르게 상황 파악을 하고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실은 플로네 영애께 사죄드릴 것이 있어, 막사 앞에서 영애를 기다리던 중이었습니다.”
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나는 과한 이목을 받고는 당혹스러워서 눈만 깜빡였다. 강아지 같은 눈망울을 하고 울먹이며 나를 올려다보는 노엘과 눈이 마주치니 조금 측은한 마음까지 들었다.
가만히 나를 보던 에녹이 기사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이 자는 심문하여 신분과 진상을 파악하도록.”
“명을 받듭니다.”
노엘과 하이젠 그리고 나머지 기사들이 모두 절도 있게 대답하는 사이에, 막사 안으로 제복을 입은 단아한 인상의 남자가 들어섰다. 그의 등 뒤로는 디에고가 따라 들어왔다.
그제야 나는 먼저 들어온 남자가 디에고의 동생이었음을 알아차렸다. 디에고와 그의 동생이 에녹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함께 인사를 했다.
“란드리드 제국의 작은 태양,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그들의 인사를 받은 에녹은 주변 기사들에게 고갯짓을 했다.
“끌고 가도록. 향후 처우를 논하기 전까진 물도 주지 마라.”
“이거 놔! 놔! 이보시오! 마르셀 경! 뭐라고 말 좀 해보게! 지금껏 나와 함께 이 전쟁을 이끌어오지 않았던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디에고의 동생, 마르셀이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로드반을 돌아봤다.
“함께……? 저희가 함께 전쟁을 이끌었습니까? 전하께서 한번이라도 전략 회의를 제대로 귀담아들은 적이 있으십니까? 제 기억엔 저 혼자 모든 책임을 짊어졌던 것 같은데.”
마르셀은 말수가 적고 우직한 디에고와 다르게 똑 부러지고 화술도 능란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편히 마르셀 경이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로드반이 끌려 나가고 식탁이 정리되는 동안 마르셀은 우리와 차례로 인사를 나누었다.
이윽고 식탁이 치워지고 자리에 모두 착석했다. 제 자리에 앉은 마르셀이 테이블에 미동도 않고 잠들어 있는 카이든을 발견하고 놀란 얼굴을 했다.
“이분은…….”
“란그리드 제국의 마탑주입니다.”
“아, 로하데 가문의…….”
“신경 쓰지 마십시오. 잠든 것뿐입니다.”
술 먹고 뻗은 거라고 솔직히 말하긴 조금 부끄러웠으니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자. 내 대답에 마르셀이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께 이야기를 듣고 급히 방문했습니다. 무례를 너그러이 용서하십시오.”
“우리가 자네를 찾은 건 빌터하임 가문에 관해 듣기 위해서다. 자네가 아는 게 있는가.”
에녹의 물음에 마르셀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르셀은 기사들이 전부 물러난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한 뒤에 목소리를 낮췄다.
“네. 형님께서 실종되시고서 아버지께 가문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선대까지만 해도 빌터하임 가문 역시, 알레아 실험의 배후였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공작 위에 오르며 실험에 반대를 하셨고, 그로 인해 형님이 실험체로 납치된 것 같다고 합니다.”
마르셀과 디에고가 착잡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마르셀이 이어 말했다.
“제가 이 전쟁에 자원한 것 또한, 형님의 행방과 모란꽃 세력의 계획 및 동향을 파악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모란꽃 세력? 알레아 섬의 배후를 그렇게 부르는가 보다.
가만히 듣던 아스달이 마르셀에게 물었다.
“모란꽃 세력을 구성하는 자들이 누구인지 자네와 공작은 아는 것인가.”
“아버지께서도 다 알고 계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그 중 몇몇은 알고 있으니, 그들의 움직임을 파악하면 더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마르셀은 생각을 더듬는 얼굴을 하곤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실종된 분들께서 돌아오셨으니, 마지막 실험이 실패했다는 걸 그들도 알 겁니다. 지금쯤 마법사 남매의 생사 여부를 파악 중일 겁니다. 혹은 알레아 섬을 찾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도 초조한 거죠.”
그 말을 듣던 우리의 시선이 모두 카이든에게로 향했다. 마르셀과 디에고만이 영문을 모른 채 우리를 따라 카이든을 바라봤다.
마르셀은 눈치를 보다가 우리가 아무 말이 없자 다시 말을 이었다.
“새로 가담한 세력이 얼마나 더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로하데 후작 저택에 초기 참여자들의 혈서가 보관되어 있다는 건 압니다. 그걸 찾는 게 가장 중요할 것 같습니다.”
그 말이 맞다. 혈서, 즉 참여자 리스트를 확보해야 실험에 가담한 세력이 얼마나 되는지 규모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지 않겠는가.
마르셀이 카이든을 보며 말했다.
“가능하다면 그 일은 로드께서 전적으로 맡아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저희는 알레아 섬을 그들보다 먼저 찾는 게 중요하겠습니다.”
“임시 정찰대를 꾸려 이미 알레아 섬의 남부 해안으로 보냈다.”
에녹의 대답에 마르셀이 감탄사를 터뜨리며 신뢰가 가득 담긴 얼굴로 에녹을 쳐다봤다.
“알레아 섬 정찰에 대해선 제게 맡겨주십시오. 직접 전두지휘 하여 진상을 파악하고 증거를 확보하겠습니다.”
“저 역시 마르셀과 함께 하겠습니다.”
디에고가 마르셀을 따라 에녹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에녹은 디에고 형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럼 자네들에게 그 일을 맡기겠네.”
디에고 형제는 영광이라는 듯 충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스달의 먼 조카인 애버딘 크리스틴과 로드반 황자. 애버딘은 당장엔 처리할 방법이 없어 지켜봐야 했지만, 로드반은 확실히 처리가 가능한 상황이었다.
모란꽃이 실험에 가담한 배후들의 몸 안에 새겨진 문신이라는 것. 그리고 로하데 가문에 피의 혈서가 보관되어 있다는 것. 또한, 모란꽃 세력이 알레아 섬을 찾으러 떠날 것이라는 정보까지 모아졌다.
이제는 우리도 움직여야 했다.
* * *
군영에 남은 란그리드 기사들은 귀환 준비를 서둘렀다. 종전 협상이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틀 뒤에는 제국 향발 마차에 오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스달과 유안나, 그리고 카이든이 각 세력으로 돌아가 협상에 가담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일행들이 모두 협상 지역으로 떠나버려서 나는 막사에 홀로 남겨졌다.
막사에 빈둥거리며 혼자 있다가 심심해서 잠시 밖으로 나왔다. 산책이라도 할까 했는데, 기다렸다는 듯이 노엘과 하이젠이 나타났다.
“아, 깜짝이야!”
뭐야, 아직도 그놈의 사과를 하고 싶은 거야?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막사 앞에 무릎을 꿇고선 내게 고개를 숙였다. 지나가던 기사들이 우리를 흘끔흘끔 쳐다보는 게 보였다.
“영애께, 지난 일을 제대로 사과를 드리고 싶습니다. 말씀드릴 시기를 놓쳐 계속해서 영애를 쫓아다닌 점도 사죄드립니다.”
노엘을 따라서 하이젠도 내게 같은 말로 사과를 건넸다. 그들이 사과할 타이밍이 없기는 했다. 악어 떼들을 해치우고 나는 바로 에녹 일행과 함께 사라졌고 그 다음날에도 에녹 일행과 함께 있었으니 말이다.
“진짜 사과를 해야 할 사람은 경들이 아닌데요?”
“아……. 그게 그들은…….”
“됐어요. 애써 변명해주지 않아도 돼요.”
나는 노엘과 하이젠의 얼굴이 일순 안타까움으로 흐려지는 걸 보았다.
그들의 눈빛은…… 뭐랄까, 나를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여기는 것처럼 보였다. 굉장히 안타깝게 여기는 것 같기도 했다.
노엘이 한탄하며 입을 열었다.
“역시 영애에 관한 못된 소문은, 영애의 아름다움을 질투하는 누군가가 낸 소문이 맞는 모양이군요.”
응? 잠깐, 그 핀트가 엇나간 이상한 오해는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