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183)화 (183/234)

눈치가 빠른 남자니까 아마도 의도하고 로드반의 속을 긁은 거겠지.

“여기가 란그리드 군영이라는 걸 잊었나 보지?”

로드반이 험악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아스달을 향해 경고하듯 으르렁거렸다. 그러자 상황을 관망하던 에녹이 입을 열었다.

“그러는 형님께선 제가 여기 있다는 걸 잊은 모양입니다.”

로드반을 바라보는 에녹의 눈빛은 아무런 감흥도 없이 고요했으나, 그에게서 풍기는 숨 막히는 위압감이 자못 심상치 않았다.

유안나와 루제프는 남의 나라 싸움 이야기에 눈치를 보며 잠시 멀찍이 떨어져 서 있었다.

나도 카이든을 데리고 뒤로 빠지고 싶었지만 카이든은 테이블에 머리를 박은 채 정말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그래, 에녹. 내 동생.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네가 살아남았다는 걸 믿을 수가 없어.”

‘살아있었다니.’도 아니고 ‘살아남았다니.’라고 한 건가?

역시 에녹을 알레아 섬으로 납치하는 데엔 로드반이 가담을 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네가 무책임하게 사라진 자리를 내가 메우느라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넌 황태자라는 직위를 가질 자격이 없어.”

로드반이 거지 같은 말을 이었다. 난 예전에 에녹이 자신의 트라우마에 대해 고백하며 했던 말을 떠올렸다.

‘어린 시절, 형제들과 치열하게 경쟁을 했을 때에도, 전쟁터에서 동료를 잃었을 때에도. ‘그만하면 됐다. 그러니 멈춰라.’ 그렇게 말해주는 이가 없었다. 어쩌면 내겐 그 말이 필요했는지도 모르겠군.’

그때 에녹과 치열하게 경쟁하던 형제들은 내가 알기로 모두 죽었다. 사람들은 로드반 세력의 짓이라고 추측했으나 증거가 없었다.

거기다가 에녹이 로말리잔 전쟁 지휘관으로 차출되어 출전하게 된 것도 모두 그들의 계획이었다. 자연스럽게 에녹을 눈앞에서 치워버리기 위한.

결국은 죽지 않고 살아 돌아온 에녹에게 열등감을 품고 그를 살해하려다가 벌을 받았지만.

로드반은 무능력하고 멍청한 망나니 황태자였고, 그가 그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던 건 오로지 황후의 힘과 그가 적통이라는 사실 덕분이었다.

나는 차분하게 일행을 살피다가, 테이블 위에 팔을 기대고 두 사람의 신경전을 흥미진진하게 구경 중이던 카이든과 눈이 마주쳤다.

분명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잠들었었는데, 언제 깨어난 건지 모르겠…….

잠깐…….

설마.

나와 눈이 마주친 카이든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검지를 들어 입술 위에 가져다 댄다. 조용히 하란 듯이.

아. 저건 카이든이 아니라 제나스다.

“그래서 내가 동생에게 빼앗긴 자리를 다시 되찾으러 돌아왔지.”

로드반의 괴랄한 소리에도 에녹은 동요 한 자락 없이 덤덤하게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고요한 눈빛이 숨 막히도록 섬뜩하다.

로드반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에녹에게 일침을 날리는 자기 자신’에게 취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에녹, 네게 줄 선물을 하나 준비했어.”

로드반이 에녹을 노려보다가 박수를 쳤다. 그러자 막사의 천을 걷고 무장한 기사들이 무언가를 들쳐 업고 들어왔다. 사람인 것 같았다.

털썩. 기사가 들쳐 업고 있던 사람을 바닥에 내던졌다.

“꺄악!”

피떡이 된 채로 바닥에 쓰러진 사람을 보고 어지간히 깜짝 놀랐는지 유안나가 비명을 내질렀다.

“란그리드 황실의 더러운 가정사 문제니, 다른 분들께는 양해 좀 부탁드립니다. 내 볼일은 우리 아우뿐이니, 걱정 마십시오.”

로드반이 주변을 스윽 훑으며 웃음을 짓고는 다시금 에녹을 바라봤다. 눈을 가늘게 뜬 그가 재는 듯이 에녹의 안색을 살피는 걸 보고 나는 확신했다.

로드반은 아무래도 에녹의 ‘폭주’에 대해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에녹이 아무런 반응이 없자 로드반이 표정에서 차차 여유가 사라졌다.

“……안 놀라?”

로드반은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힌 사람처럼 당황한 얼굴을 하고 에녹을 바라봤다.

“정말 안 놀라?”

로드반이 에녹 가까이로 다가가 그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에녹의 금안이 무심하게 로드반을 훑었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폭주는? 미쳐 날뛰어야 하는 것 아니야?”

로드반이 당황한 얼굴로 횡설수설하며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그와 함께 온 기사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여 그의 시선을 회피했다.

아무래도 로드반은 각국의 주요 인사가 있는 자리에서 에녹을 폭주하게 하고 그를 처벌하는 그림을 만들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에녹이 미쳐 날뛰면 그를 제압해서 영웅으로 칭송받거나 혹은 세간에 알려 에녹의 자리를 박탈하려고 했던 걸까.

에녹의 비밀에 대한 정보를 몰래 입수해서 알게 된 거라면, 나름 성공적인 작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에녹이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전이었다면 그랬겠지.

에녹이 피식 웃음을 짓고는 테이블 위에 벗어둔 장갑을 들었다.

“다 끝나셨습니까.”

“뭐?”

에녹은 느긋한 동작으로 손에 장갑을 끼우며 재차 물었다.

“할 말은 그게 끝인지 물었습니다.”

지독히 낮은 목소리가 위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존대를 하고 있음에도 상대를 멸시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로드반의 얼굴이 굴욕감을 안고 일그러진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너! 너 분명 폭주를……!”

로드반이 비명 같은 외침을 내질렀다. 그에 에녹은 고개를 한쪽으로 슬쩍 기울이고는 로드반을 비웃듯이 바라봤다.

“폭주라니. 그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굉장히 흥미진진하게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데, 아스달이 내 귓가에 속삭였다.

“원래, 싸움 구경이 제일 재미있는 법이지.”

너무 가까이 얼굴을 들이댄 건 조금 거슬렸지만, 그의 말엔 동의하는 바이다. 팝콘이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걸. 상대가 에녹이라서 로드반의 계책 따위는 전혀 걱정이 되지 않았다.

애초에 저 로드반이 계획을 세워봤자 뭐 얼마나 대단한 계획을 세웠겠는가.

수세에 몰린 얼굴로 뒷걸음질을 치던 로드반이 당황한 얼굴로 나와 아스달, 그리고 우리 일행을 훑었다.

고위 인사들 앞에서 개망신을 당하려니 민망하긴 했는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제기랄! 일단 저 녀석을 포박해라, 명령이다!”

막사 안으로 무장한 기사들이 우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그리고 그들은 이내 에녹이 아닌 로드반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로드반이 놀라 소리쳤다.

“뭐, 뭐야. 지금 이게 무슨 짓인가! 내가 아니라 저 반역자를 잡아야지!”

발악하듯이 악을 쓰는 로드반의 외침에도 그를 향해 겨눈 날 선 검들은 미동도 없었다. 로드반이 당황한 얼굴로 움직이다가 이내 자신을 향해 겨눠진 검에 목 끝이 스쳤다.

그가 요란하게 비명을 지르다가 바닥에 엎어져 있는 기사를 밟고 벌러덩 넘어졌다. 물론 나는 넘어진 로드반보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기사가 더욱 걱정됐다.

“아직 숨은 붙어 있는 것 같습니다. 상황이 끝나면 제가 치료를 하도록 하죠.”

내 뒤에 서 있었는지 루제프가 내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그래, 여기 대주교도 있고 성녀도 있는데 무슨 걱정인가.

바닥에 엎어진 로드반을 보며 에녹이 한심하다는 얼굴로 그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에녹이 로드반을 향해 검을 겨눈 기사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자들이 정말 형님의 사람인 줄 알았습니까. 이 군영이, 황태자의 자리가, 란그리드 제국이, 정말로 당신의 것인 줄 아는 겁니까.”

로드반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좌중을 훑었다. 내가 다 민망하고 창피했다. 조금 안타까울 지경인데.

“이 군영에 있는 대부분의 기사들, 아니 란그리드 제국의 기사들 대개는 수년간 나와 함께 전투를 치러 온 나의 전우입니다, 형님.”

로드반이 그제야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붕어처럼 입만 벙긋거렸다. 그러더니 와락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에녹을 노려봤다. 치밀어 오르는 화를 이기지 못하고 몸을 부들거리는 꼴이 아주 우스웠다.

“형님의 지위가 ‘임시’로 복권된 이야기는 저도 들었습니다. 폐하께선 형님이 이 전쟁에서 승전을 하고 돌아와야 정식 황자로 다시 인정을 해주겠다고 하셨다던데…….”

에녹이 뒷짐을 지고 잘못한 학생을 나무라는 태도로 로드반을 오만하게 내려다봤다.

“안타깝게 됐습니다. 전쟁은 이대로 종전 협상을 진행 중이고 제가 돌아왔으니 제국엔 형님이 더는 필요치 않을 텐데.”

그가 피곤한 얼굴로 이마 위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다.

“여전히 이렇게 멍청해빠져서야. 헤스티아 왕국의 왕세자 저하와 성녀님도 계신 자리입니다. 이게 무슨 추태입니까.”

와. 에녹이 저렇게까지 노골적이고 신랄하게 누군가를 비난하는 건 처음 본다.

에녹의 말에 우리를 돌아보는 로드반의 얼굴이 붉게 변했다. 새하얗게 질렸다가 붉게 변했다가, 아주 바쁘다.

“제국으로 돌아가면, 오늘의 이 행동 문책토록 하겠습니다. 증인이 이리 많은데 이의 있으십니까.”

“이……!”

“기사들에게 폭주하는 저를 제압하고 공격할 것을 지시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죽여도 괜찮다는 지시를 내린 것을 증언할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니 형님, 이번엔 유배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제국으로 돌아가는 즉시, 폐하께 형님의 처분을 요청하겠습니다.”

에녹이 로드반을 향해 검을 겨눈 기사들에게 고갯짓을 했다.

“포박해.”

“가까이 오지 마! 내가! 내가 가만히 있을 것 같으냐! 제길, 이럴 순 없어. 내가 이 더러운 전쟁터까지 어떻게 왔는데!”

비명을 내지르며 저항하던 로드반이 갑자기 내게로 기어왔다. 물론 내게 닿지는 못했다. 그를 향해 검을 겨눈 기사들 때문이었다. 로드반이 매우 추한 몰골로 나를 올려보며 애처롭게 부탁했다.

“프, 플로네 영애. 영애라면 내 손을 들어줄 수 있지 않소.”

“네? 제가요?”

“영애의 언니와 결혼할 사람입니다, 이 내가.”

나는 황당한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이니스는 플로네 가문의 후계자입니다. 황태자비나 황자비가 될 수 없는 건 둘째 치고 뭐가 아쉬워서 폐위된 황자와 결혼을 한단 말이죠?”

“푸흡.”

그때 테이블 의자에 삐딱하게 앉아 있던 카이든, 아니 카이든의 몸을 한 제나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로드반은 제나스의 웃음소리도 듣지 못한 채로 나를 향해 역정을 냈다.

“이게 오냐오냐 했더니 건방지게!”

오냐오냐라니? 우린 공식적으로는 초면인데요.

로드반이 내게 달려들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였다.

갑자기 그의 발밑에 원형의 검은 그림자가 생기기 시작했다.

제나스가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바닥을 발로 꾹 눌러 옆으로 밀자, 로드반의 발밑에 있던 그림자도 따라서 옆으로 쭈욱 밀렸다. 그 서슬에 로드반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너야말로 누구한테 건방지게 소리를 질러.”

모두가 제나스를 돌아봤다. 그가 어깨를 으쓱이고는 말했다.

“내가 우리 후손님과 약속을 해서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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