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반이 그런 계획을 세웠다고만 들었지 바로 오늘, 그것도 곧 들이닥친다는 얘기는 지금 처음 듣는다. 나는 놀라서 에녹의 얼굴을 쳐다봤다.
“네? 그게 정말이에요? 방어할 계획이 있으신가요?”
“계획은 있으니 걱정할 것 없다. 날벌레 하나 들어왔다고 생각하도록.”
에녹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날벌레가 지나치게 큰 것 같은데요.
에녹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아스달이 웃으며 대꾸했다.
“그래, 반황 걱정은 정말 쓸데없는 걱정일세. 그가 누구에게 당할 위인이던가?”
아스달의 말에 나는 그제야 안도했다.
“자, 그리고 이렇게 모여 함께 식사하자 한 것은, 벌써 아나타가 말한 문양을 발견했기 때문일세. 그 왜, 거미줄에 걸린 모란꽃 말이야.”
아스달이 기품 있게 미소를 지으며 우아하게 포도주를 마셨다. 그 폼이 매우 격식 있어서 이제 조금 진짜 왕자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스달이 말하기로는 오늘 아침에 헤스티아 왕국에서 그를 데리러 사람이 왔었단다. 그런데 그를 데려가기 위해 파견된 기사 중 한 명에게 그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그자는 다름 아닌 애버딘 크리스틴이었다.
애버딘이라면 일전에 유언을 남길 때, 그를 찾아 후사를 맡기라고 했을 정도로 아스달이 믿고 있던 사람이 아니던가.
아스달이 죽으면 왕실을 이을만한 후계는 그밖에 없다고 했었던 것 같은데.
“그 아이의 목 뒤에 그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네. 나는 그 녀석이 실험과 연관이 있을 거라고 의심을 해본 적이 결단코 없었는데 말이야. 내가 인정할 정도로 아주 훌륭한 아이라고 생각했네만…….”
아스달의 낯이 급격히 어두워지더니 한숨을 내쉬면서 와인 잔을 한 번에 비워버렸다.
“내가 아직 왕으로서의 자질은 부족한 모양이지. 마력안을 가질 자격이 없다. 아, 이제는 마력안도 하나뿐이니 진짜 자격이 없을지도 모르겠군.”
아스달이 오른쪽 눈을 가린 안대를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웃었다.
우리는 모두 차마 어떤 말도 덧붙이지 못하고 침묵했다.
“뭐, 그래도 ‘모란꽃’이란 게 그 계획에 가담한 놈들의 몸 어딘가에 새겨져 있는 문양이라는 정보는 알게 되지 않았나.”
아스달의 말에 잠자코 있던 에녹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보탰다.
“의심 인물을 추려 몸을 수색하는 게 좋겠군. 이 전쟁을 주도한 이들이 배후 세력에 가깝지 않겠나. 그들을 먼저 조사하는 게 좋겠어.”
그러자 루제프가 다소 회의적인 얼굴로 반문했다.
“그렇긴 합니다만, 대대적인 몸수색은 사실상 어렵습니다. 다들 신분이 낮은 이들은 아닐 테니 말입니다.”
“그러게요. 여기가 섬이었으면 그냥 잡아다가 X치면 되는데, 정말 곤란하네.”
고민 어린 얼굴로 미간을 좁힌 유안나가 말했다. 루제프가 성직자가 돼서 말투가 그게 뭐냐고 지적하자 유안나가 못 들은 척 귀를 후볐다. 아무래도 저 험한 말투는 카이든에게서 배운 모양이다.
가만히 대화를 듣던 에녹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그들의 가까운 사람, 혹은 시중드는 이들을 매수하는 방법도 있다. 문양을 발견하면 즉시 그들이 실험에 가담했다는 증거를 찾도록. 혹은 교황청과 로하데 가문과 연관이 있다는 증거도 좋고.”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에녹이 침착하게 뒷말을 이었다.
“알레아 섬으로 정찰대를 보내뒀으니, 그쪽에서 증거를 찾아보는 것도 좋겠군.”
“네? 벌써요?”
나는 에녹의 빠른 실행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그를 쳐다봤다. 아스달이 손가락을 튕기며 격렬히 공감했다.
“알레아 섬에서 다른 증거도 확보가 된다면, 그게 가장 좋겠지. 그들과 실험의 연관성을 보다 완벽히 증명해줄 테니까.”
아스달의 말을 듣던 카이든이 카르파초 위에 레몬즙을 뿌리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연관성을 증명하는 다른 방법도 있습니다. 로하데 가문 내에 혈서가 있어요. 실험에 가담한 이들이 직접 피의 계약을 이룬 혈서 말입니다.”
……뭐?
놀란 건 나뿐만이 아니었던 듯했다.
“그걸 로드가 어떻게 알지?”
“로드네 가문 일이잖아요.”
아스달의 물음에 유안나가 대답했다. 그러자 루제프가 의아하다는 얼굴로 반문했다.
“하지만 로드를 제물로 바친 게 로드의 가문 아니었습니까?”
모두들 나름대로 숙덕거리는데, 카이든이 들고 있던 포크를 테이블 위에 탁 내려놓곤 기어코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게 아니라, 내가 몸 안에 제나스를 봉인하고 있어서 그래. 그가 말해줬어.”
드르륵. 드륵-.
그와 동시에 나와 카이든을 제외한 모두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각기 경계 태세를 갖추고 어느새 무기를 빼 들고 있었다. 대체 저 살벌한 무기들이 다 어디서 나온 건지 모르겠네.
나는 카이든의 옆에 멀뚱히 앉아 있다가 나도 뭐라도 들어야 하나 싶어서 주머니에서 조명탄을 슬쩍 꺼냈다. 그렇지 않아도 카이든에게 제나스에 대한 이야기를 일행에게 하지 않을 거냐고 물으려고 했던 참인데 일이 이렇게 돼버렸네.
카이든은 느긋하게 주변을 훑고는 냅킨을 입가를 닦았다.
“괜찮아. 영원히 내게 영혼이 종속되는 계약을 했어. 내 뜻은 절대 거스르지 못해.”
“……그 계약이라면 나도 아는데. 재미있는 짓을 했군.”
아스달이 대꾸했다. 그는 마법사는 아니지만, 마력안이라는 집안 내력 때문에 마력과 마법에 대해서는 전문가만큼의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그럼 ‘형벌’도 내렸나?”
“세력을 찾을 때마다 영혼을 찢길 겁니다. 그리고-.”
카이든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발현.”
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의 붉은 눈이 일순 반짝였다.
“내가 이리 외칠 때마다 그의 영혼에 인장이 찍힙니다. 영혼이 타들어가는 형벌이죠.”
아스달이 흥미롭다는 듯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오. 방금 그럼?”
“인장이 찍혔습니다.”
무자비하게 고문당하는 제나스라니 도무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 내 막사까지 쳐들어온 어젯밤의 제나스는 당당하기 그지없었는데.
저런 식이라면 차라리 아나타처럼 한 번에 죽음을 맞이한 게 다행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어떻게 영혼을 종속시켰지? 제나스는 죽은 줄 알았는데.”
아스달의 물음에 카이든이 차분하게 그날의 일을 설명했다. 그의 몸속에 남아있는 제나스의 영혼 일부와 대치한 이야기, 그리고 갑자기 제나스에게로 내리친 번개. 그 틈을 타 종속 계약을 시행한 일까지 말이다.
“아, 탈출 직전에 원혼들이 자네에게로 번개를 내리꽂던데 그게 그 이유에서였군. 어쩐지 아나타는 불타 죽던데 자네는 멀쩡하다 싶었어.”
아스달이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제나스도 듣고 있나요?”
유안나가 눈을 반짝이며 묻자 카이든이 심드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유안나가 재빨리 그를 향해 빈정거렸다.
“천 년이나 산 마법사라면서 엄청 초라한 최후네. 꼴 좋아, 아주.”
풉. 푸하하하하. 그녀의 말을 듣던 카이든이 웃음을 터트렸다.
마침 그때 메인요리를 든 하인이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막사 내부의 상태를 보고 화들짝 놀라더니 뒷걸음질로 빠르게 사라졌다. 그도 그럴 것이 다들 급히 일어나느라 바닥에 의자가 나뒹굴고 있었고 각자 무기를 든 채 대치 상태로 서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민망한 얼굴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결국 각자 자신의 의자를 챙겨와 다시 앉았다.
“아무튼 그럼 우리는 로하데 가문에 있다는 혈서를 찾아야 하는 건가.”
아스달의 말을 듣던 유안나가 혐오스럽다는 듯이 미간을 좁히고 대답했다.
“피의 혈서라니 기가 막히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루제프가 따라서 대꾸했다.
다들 앞으로의 할 일을 머릿속으로 갈무리하고 있는 듯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다음부터는 조용한 식사가 이어졌……을 리가 없다.
메인요리로 나온 양의 허벅다리 구이를 먹던 루제프가 적포도주를 거리낌 없이 들이키는 카이든을 보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로드는 술을 못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의외의 말에 난 놀라서 옆자리에 앉은 카이든을 쳐다봤다.
“나는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카이든. 술 못 마셨어?”
“왜 못 마셔. 마실 수는 있어.”
얘기를 듣고 보니 카이든의 뺨이 벌써 좀 붉어져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마실 수는 있겠죠. 인사불성 되어 업혀나가지나 마십시오.”
“야, 따까리. 너는 그냥 좀 닥치고 있으면 안 되냐?”
“걱정을 해줘도 고마운 줄 모르는 건 역시 더러운 마법사들 특징인가 봅니다.”
사실 저 정도면 루제프와 카이든은 절친한 게 아닐까…….
카이든은 루제프의 도발에 답지 않게 울컥하더니, 들고 있던 포도주를 한잔 쭈욱 들이켰다.
“봐라! 이 정도는 끄떡없어!”
“고작 한잔 아닙니까.”
루제프가 카이든을 비웃으며 포도주 한잔을 더 권했다.
그러나 루제프는 카이든에게 포도주를 채 넘길 수 없었다. 그의 말대로 카이든이 고작 포도주 한 잔을 마시고는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잠들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잠시 모두 침묵했다. 술을 권했던 루제프마저 이 정도일 거라곤 생각 못 했는지 당황한 얼굴이다.
잠든 카이든의 뺨을 꾹꾹 누르던 난 문득 날 찾아왔던 제나스의 말을 떠올렸다. 카이든이 가사상태에 접어들면 제나스가 몸 밖으로 나올 수 있다는.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식사 내내 카이든이 혼잣말로 ‘발현’이란 소리를 중얼거리는 것 같더라니. 아마 제나스의 영혼을 움직일 수도 없게 만신창이로 만들어둔 게 아닐까.
그때.
갑자기 누군가 기별도 없이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이야, 모두 여기 모여 있었군?”
로드반 황자였다.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마거릿의 기억 속 모습 그대로였다.
에녹의 예상은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나는 그의 등 뒤로 함께 들어오는 무장한 기사들을 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가 무척 반가운 얼굴을 했다.
“오! 우리 플로네 영애도 여기 있었군!”
로드반이 성큼성큼 다가와 내 얼굴을 노골적으로 훑었다. 왜 친한 척이야.
“언니와 정말 똑같이 생겼는데, 안타깝군. 그 얼굴로 성격이 아주 괴팍하다지? 미치광이였다는 소문은 잘 들었네.”
뭐래, 이 자식이. 난 섬에서 하던 버릇대로 표정 관리도 못 하고 미간을 좁히고 말았다.
“영애, 참아.”
그때 아스달이 마치 미친개를 진정시키는 모양새로 내 양어깨를 꾹 눌렀다.
“이보게, 황자. 우리 영애는 건들면 사람 배도 뚫어. 건들지 말게나.”
아니, 저기요 왕자님. 이건 마치 우리 개는 건들면 사람을 찢어요. 같은 대사잖아.
게다가 제가 사람을 배를 뚫어본 적은 없는데요. 아무래도 조명탄으로 마물들을 뚫어버린 얘기를 하는 듯했다.
“이게 누구야, 아스달 왕세자. 오랜만이군?”
로드반이 마치 아스달을 매우 잘 안다는 듯 그에게도 친근한 인사를 건넸다. 하긴 로드반도 에녹 이전에는 란그리드의 적통 황태자였으니까 아스달과 아는 사이라고 해도 이상할 건 없겠지.
그러나 아스달은…….
“나는 자네와 별로 오랜만이고 싶지 않군. 제 형제를 죽이려고 했던 범죄자 아닌가? 유배지에서 탈출이라도 했나? 우리도 섬에 있다가 얼마 전에 탈출한 셈인데, 하하하!”
“…….”
주변이 싸늘해지는 농담을 하고는 홀로 웃음을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