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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181)화 (181/234)

기사들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더니 막사 밖으로 사라졌다. 나는 기사들을 몰아내는 에녹의 뒷모습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카이든은 제나스에 대한 얘기를 에녹에게도 하지 않은 것 같았다. 본인이 먼저 꺼내지 않은 이야기를 내가 할 수는 없는데…….

‘왜 얘기하지 않았을까. 그래도 너무 오래 지나기 전에 모두와 공유는 해야 할 텐데.’

아무래도 그 문제와 관련해서는 카이든과 이야기를 나눠봐야겠다.

카이든은 제나스가 영원히 그에게 종속되어 고통받을 테니, 걱정할 것 없다고 했다. 하지만 내가 걱정되는 건 카이든이었다.

그는 정말 괜찮은 게 맞나?

기사들을 전부 물리고 돌아온 에녹이 내게 사과했다.

“기사들의 일은 사죄하지. 불쾌했다면 미안하다.”

그래도 황태자인데 에녹은 사과를 참 잘 하는 것 같다. 내게만 그러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내 안색을 살피던 에녹은 그제야 나를 찾은 용건을 밝혔다.

“아직 저녁을 들기 전이라면 함께 식사하겠나. 로드와 왕세자도 참석할 거다. 아, 주교도 있군.”

동생을 만나러 서쪽 군영으로 갔다던 디에고를 제외하고는 모두 모인 모양이다.

“아스달이 모란 꽃 문양을 찾은 것 같더군.”

모란 꽃 문양을 벌써 찾았다고?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에녹을 쳐다봤다.

에녹은 내 침대가 자신의 침대인 것처럼 누워 있는 유안나를 가만히 노려보고 있었다. 눈치를 주는 것 같았다. 유안나는 개의치 않은 얼굴로 태연하게 침대에 누워 에녹을 향해 인사했다. 아무래도 여기가 섬이 아니란 사실 같은 건 상관도 하지 않는 듯했다.

나는 두 사람의 신경전을 뒤로하고 에녹에게 물었다.

“지금 바로 가면 되나요?”

어쨌든 모란꽃에 대해선 다 함께 모여 있을 때 제대로 듣는 게 낫겠지. 그리고 식사가 끝나면 카이든과도 따로 대화를 나눠봐야겠다.

내 물음에 에녹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수 내 겉옷을 챙겨주었다. 항공 점퍼를 내게 입혀준 그가 지퍼를 채우는 것을 나는 조금 멋쩍게 바라봤다.

“제가 할 수 있어요.”

“내가 해주고 싶어서 그래.”

에녹이 거절하면 상처라도 받을 것 같은 눈망울을 하고는 나를 올려다보는 바람에 나는 결국 얌전히 옷 시중을 받았다.

유안나가 그 모습을 보고 기겁하며, 내게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황태자가 저리 요망한 남자라는 거 우리밖에 모르겠죠?”

“다 들린다. 성녀의 무례를 내가 언제까지 참을 것 같은가.”

“네네. 사람들 앞에선 조심할게요.”

“사람들 앞이 아니라, 내 앞에서 조심하게. 마거릿이 있어서 그냥 넘어가는 걸 고맙게 생각해.”

유안나는 카이든과 천적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에녹과도 천적이다. 그러고 보니 아스달과도 티격태격했는데, 그냥 모든 남자와 사이가 좋지 않은 걸까.

“아. 그리고 마거릿, 그대의 가문에서 이런 편지가 왔더군.”

에녹이 품 안에서 편지봉투를 꺼냈다. 봉투엔 이미 누가 뜯어서 읽은 흔적이 있었다.

“내게로 온 편지라서 먼저 읽었다.”

그가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그의 말대로 발신자는 내 언니인 이니스였고 수신자는 에녹이었다.

편지의 내용은 대략 란그리드 제국의 총지휘관은 로드반이었고 그가 군사를 이용해 우리에게 무력을 행사할 것 같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귀환 전에 에녹을 처리하겠다는 뉘앙스를 풍겼다는 내용도 적혀 있었다.

나는 놀라서 에녹을 올려다봤다.

“로드반 폐태자, 아니 황자가 지금 지휘관이었어요?”

로드반은 에녹의 배다른 형으로 원래는 적통 황태자였다. 무능한 머저리로 유명한 황태자. 가진 거라곤 황후라는 뒷배와 적통이라는 핏줄뿐인 남자. 과거 에녹을 살해하고자 했다가 현장검거 되어 유배되었는데, 에녹이 사라지며 지위가 복권됐단다.

“그렇다더군. 그는 서쪽 군영에 머물고 있다. 종전 협상 건으로 논의를 해야 해서 오전에 만나기는 했는데…….”

에녹이 턱을 쓰다듬으며 곰곰이 생각에 잠긴 얼굴로 말이 없었다.

유안나는 편지 내용이 궁금한지 연신 우리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이건 섣부르게 언급하기 민감한 내용이라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우선 다른 분들이 기다린다는 식당으로 가시죠.”

내 말에 에녹도 그제야 상념에서 벗어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에녹과 유안나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인다.

* * *

휴전상태지만, 어찌 되었든 이곳은 전쟁터다. 게다가 군영의 막사는 열악해서 귀족들이 지내기 적합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마물이 우글거리는 외딴섬에서 살다 온 우리에게는 군용 막사도 환상적인 안식처나 다름없었다.

식사가 마련된 막사의 천을 걷고 안으로 들어가니, 루제프와 카이든이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야, 따까리. 성기사단은 전부 퇴각 중이라던데, 넌 안 꺼지냐?”

“당신은 신께 버림받은 마법사 군영으로 안 꺼지고 뭐하십니까?”

서로의 멱살을 쥐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옛날 생각이 나서 새삼 감격스러웠다. 모두 무사히 살아서 탈출을 했다는 게 정말 실감이 났다. 나는 루제프를 향해 달려갔다.

“주교님! 몸은 괜찮으세요?”

뒤늦게야 나를 발견한 루제프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자빠졌다. 나는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놀라는 그를 보고 어이가 없어 그를 멀뚱히 쳐다봤다.

“왜 그래요?”

“여, 여, 영애, 오랜만입니다.”

“네?”

오랜만이라기엔 아직 일주일밖에 안 지난 것 같은데? 우리가 게이트를 열고 전투 중에 난입한 건 정말 얼마 되지 않은 일이었다. 너무 얼마 되지 않아서 적과의 휴전 협상도 채 끝마치지 못한 상황 아닌가.

“매일 보던 사이였으니, 일주일 정도 못 봤으면 오랜만인 것 맞죠.”

나는 도착하고 거의 사흘은 내리 기절하듯이 잠만 잤으니까 더 얼마 안 된 것처럼 느껴지긴 했다.

게다가 오며 가며 안부인사 정도는 했던 유안나와 달리 루제프는 나를 피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마주치기가 어려웠다.

다른 사람들에게 듣기는 했지만, 나는 그에게 직접 묻고 싶었던 바를 물었다.

“원혼들은 정말 사라졌어요?”

“성불했습니다. 원하는 것을 이루고 모두 떠난 것 같습니다.”

루제프가 내 시선을 회피하며 대답했다. 이상하네. 왜 이래? 나는 테이블 앞에 서서 루제프가 나를 피하지 못하도록 직시하며 물었다.

“주교님, 왜 자꾸 저 피해요?”

“네? 제, 제, 제, 제가 언제……!”

“하……. 저 머저리.”

루제프를 보며 카이든이 혀를 찼다. 그리고는 루제프를 대신해서 내게 그의 상태를 설명했다.

“얘가 너한테 죄책감을 갖고 있더라.”

“네? 저한테요?”

“영애께선 절 믿고 원혼들을 봉인하는 일을 맡겨주셨는데, 저 때문에 섬을 탈출하지 못할 뻔 했잖습니까. 영애께서 그 망할 마법사에게 납치도 당하시고…….”

루제프는 말하다가 서러움이 복받쳤는지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는 고개를 숙였다. 아이고.

“아니 무슨 그런 자책을……. 저한테 미안해할 건 없어요. 그렇게 따지면 지금 우리 모두 서로에게 미안해해야 할 일이 백 가지는 될 걸요?”

내 말에 유안나가 테이블 위에 놓인 쿠키를 먹다가 흠칫하고 동작을 멈췄다. 그녀가 내 눈치를 보더니 얌전히 쿠키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 게 보였다.

“다들 모여 있었군. 역시 주인공은 마지막에 등장하는 법이지!”

때마침 아스달이 요란하게 자신의 등장을 알렸다. 가만 보면, 아스달은 고귀한 왕자보다는 실없는 입담꾼 같기도 했다.

활기차게 걸어 들어온 아스달이 한껏 주눅이 들어있는 루제프를 발견하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주교는 패배자처럼 왜 이러고 서 있어? 로드와 영애는 왜 서 있고? 다들 앉게, 앉아. 내가 마련한 자리는 아니지만, 모두들 편안히 앉게나.”

그가 루제프의 어깨에 팔을 둘러 어깨동무를 하더니 호쾌하게 웃으며 아주 능청스럽게 우리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러고 에녹의 맞은편에 착석했다.

긴 테이블의 양 끝엔 에녹과 아스달이 앉았고 그 사이에 우리가 각기 알아서 자리를 찾아 앉았다.

“아, 영애는 여기 앉게나.”

아스달이 뜬금없이 자신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네? 제가 왜요?”

내 뜨악한 대꾸에도 아스달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능청스러운 얼굴로 나를 보며 의자를 빼주었다. 이 인간이 왜 이래. 뭐 잘 못 먹었나.

“그냥 내가 영애와 친해지고 싶어서 그러지.”

“저랑요? 왜요?”

“지금 헤스티아 왕국에 왕세자비 자리가 비어있거든.”

“쿨럭.”

“XX 이게 뭔 X소리야.”

루제프가 놀라 기침을 했다. 카이든이 당장 의자를 걷어차고 일어나 내게 달려와선 내 손을 잡아끌었다. 에녹도 우리의 앞을 가로막고 아스달을 뒤로 밀었다.

“떨어져.”

에녹의 위협적인 태도에 아스달이 양손을 들어 보이며 뒤로 물러났다.

“여기가 정글이네, 정글.”

세 남자를 보며 유안나가 혀를 끌끌 찼다.

“거참. 농담일세, 농담. 다들 진정해. 그냥 영애와 친해지고 싶어서 해본 말이야.”

아스달이 나를 보며 장난스럽게 윙크했다. 그러더니 박수를 치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우선 자리에 앉게. 식사는 해야지.”

에녹과 아스달이 긴 테이블 양 끝에 앉았고 나와 카이든은 중앙 즈음에, 그리고 우리의 맞은편엔 루제프와 유안나가 앉았다.

전쟁터에서 만찬 같은 건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생각보다 적당히 갖출 건 갖춘 식사가 시작됐다.

에녹과 아스달의 말로는 황족이 출전한 막사는 조금 더 호화롭고 적국과의 협상의 여지를 위해서라도 적당히 갖출 건 갖추어 전쟁을 준비한다고 한다.

아스달이 종을 울리자 식사가 준비되기 시작했다. 앙트레로는 카르파초가 나왔다. 식사가 세팅되는 동안 모두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하인들이 모두 나가자 비로소 에녹이 말문을 열었다.

“현재 란그리드 제국의 지휘 사령관이 로드반 황자더군. 과거 황태자 직위를 박탈당하고 유배 됐었는데, 황제 폐하께서 그의 지위를 복권하신 모양이야.”

나는 이니스가 보낸 편지를 떠올렸다. 로드반이 군사를 이용해 무력을 행사하고 귀환 전에 에녹을 처리하려는 계획을 세웠다고 했었지. 과거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다니, 그 인간은 학습이란 게 안 되는 모양이다.

에녹이 차분한 얼굴로 설명을 이어갔다.

“아마 곧 있으면 이 막사로 들이닥칠 거야. 나를 제거하려는 게 목적인 것 같은데, 모두 양해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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