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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180)화 (180/234)

아니겠지. 당연히 아닐 거라 생각하고 내뱉은 질문이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카이든이 긍정했다.

“그래. 너는 나를 알아봐야지. 나를 이렇게 만들어 놓고. 날 못 알아보는 건 말이 안 되지.”

언짢은 목소리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섬뜩했다. 어쩐지 나를 향한 원망과 야속함이 가득 담긴 어조였다.

그는 분명, 카이든의 얼굴을 한 제나스였다.

이건 꿈인가……?

믿을 수가 없었다. 대체 카이든은 어떻게 된 거지? 여긴 내가 잠든 막사가 맞나?

내 혼란스러운 얼굴을 가만히 보던 제나스가 자신의 가슴팍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카이든은 이 안에 잠들어 있어. 나는 그가 수면이나 가사 상태에 접어들었을 때만 직접적으로 움직일 수 있거든.”

“어, 어떻게! 카이든은 그럼……!”

나는 정신이 맑게 돌아오자마자 조명탄을 찾아 장전하고 그를 향해 겨누었다.

이럴 수는 없다. 어떻게 그가 살아 있을 수가 있어. 그것도 카이든의 몸에서!

제나스가 침대에서 일어나 한 발자국 물러났다. 나는 천천히 레버를 당겨 내리고는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쳤다.

“그걸로 날 공격하겠다고? 어차피 이 육체는 내 것이 아닌데, 공격할 수 있겠어?”

제나스가 조소를 터트렸다. 나는 여전히 그를 향해 조명탄을 겨눈 채,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우리 후손님은 멀쩡하니까 겁먹을 필요는 없어. 하아…….”

말하다가 자괴감이 들었는지, 제나스가 짜증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망할, 나는 우리 후손님이 할 만한 행동 패턴 안에서 그가 할법한 이야기를 꺼내는 게 고작이다. 그 외에는 전부 제약이 걸려 있거든.”

“그게 무슨 소리야?”

그때 은지가 내 몸을 기어 올라와 팔뚝에 매달렸다. 녀석은 날카롭게 이를 드러내며 제나스를 위협했다.

“감히, 내게 종속 계약을…….”

“종속 계약?”

“내 입으로 말하고 싶지 않다. 후손님한테 물어봐.”

또다시 자괴감 어린 얼굴로 한숨을 내쉰 제나스가 대꾸했다. 그는 내가 물어도 정말 더는 대답하지 않겠다는 얼굴이었다.

“여긴 왜 왔어?”

제나스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살아있다는 걸 너에게 알려주고 싶어서. 어때, 절망감이 드나? 날 죽이는 게 그리 쉬울 줄 알았어?”

그가 나를 한껏 비웃었다. 얼굴을 한 대 쳐주고 싶을 정도였다.

“우리 후손님은 내가 살아있다는 걸 네게 속였지 않은가. 배신감이 들지는 않고?”

“이간질하러 왔어?”

“비슷해. 난 아직도 이해가 가질 않거든. 너 때문에 모든 일이 망가진 게. 그래서 그 이유가 뭔지 좀 알고 싶어. 개인적으로 말이야.”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물론 카이든이 내게 제나스의 영혼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해도 그가 나를 배신하거나 뒤통수를 치기 위해 그런 게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모두 우리를 위해서였겠지.

이간질을 하려면 상대를 봐가면서 해야지. 나는 제나스를 노려봤다.

“카이든은 알아? 네가 여기 온 거.”

“아니. 알면 난리 나겠지. 그러니 마거릿, 나는 네가 우리 만남을 그에게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내가 미쳤니?”

내 물음에 제나스는 대답 없이 그저 내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속을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대체 나한테 뭘 바라고 여기까지 찾아온 건지도 모르겠고.

그러다가 그의 얼굴이 갑자기 굴욕감에 젖어 들었다. 제나스가 짓이겨 씹듯이 말을 뱉었다.

“우리 후손님이 깨어났군, 제기랄. 내가 어쩌다가 너를 만나서 이 지경이 된 건지…….”

제나스가 나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결국 나는 화를 터트렸다.

“아, 그러니까 나를 만나서 뭐! 네 놈이 죽은 게 내 탓이야? 네가 저주받을 인간 말종 쓰레기인 탓이지!”

물론 내 분노어린 외침에 그는 대답을 끝내 할 수 없었다. 그의 눈이 천천히 감겼고 몸이 기울었다. 나는 놀라서 조명탄을 내려놓고 쓰러지는 그의 몸, 정확히는 카이든의 몸을 받았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놀라서 그의 상태를 살피던 중 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이윽고 천천히 눈을 떴다.

“……마거릿?”

이번엔 진짜로 카이든이었다. 그가 잠시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그러다가 곧 상황 파악이 끝난 듯 험악한 얼굴을 했다.

“이게 진짜……. 하…….”

그가 천천히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더니,

“발현.”

그런 말을 중얼거렸다.

“발현!”

잔뜩 화가 난 어조로 외치던 그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발을 굴렀다.

“제기랄! X 같은 노인네!”

그가 머리카락을 거칠게 헤집었다. 나는 가만히 지켜보다가 그를 불렀다.

“카이든.”

그의 동작이 멎었다. 그가 천천히 나를 향해 돌아섰다. 나를 바라보는 붉은 눈동자가 매섭게 떨리고 있었다.

긴장한 것이 한눈에 보일 정도로 굳은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카이든이 그런 얼굴을 보인 적이 드물어서 더 그렇게 느껴졌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마거릿.”

“제나스가 죽지 않았어?”

그가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침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내 손을 잡았다.

“미안해.”

“뭐가 미안해?”

“완전히 죽이지 못해서. 이게 최선이었어.”

미안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는 눈빛이 다소 애처로웠다. 그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나는 잠시 할 말을 잃고 그의 얼굴을 쳐다만 봤다.

제나스를 죽이지 못했구나. 그래서 산채로 자신의 몸 안에 묶어둔 거구나.

가슴이 미어진다.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왜 카이든이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는 걸까. 그가 그간 느꼈을 고통과 절망감에 비하면, 내 감정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네가 나한테 미안해할 이유는 없어.”

“그래도 미안해. 네가 괴로워할 것 같아서 말하지 않았어.”

나보다 이 일을 괴로워할 사람은 카이든이었다. 그는 제나스와 너무도 깊게 연관되어 있지 않은가. 어릴 적 실험을 당했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말이다.

카이든은 그동안 제나스와 했던 계약에 대해 조곤조곤 내게 설명했다.

그러니까 섬을 탈출하기 직전, 원혼들이 카이든의 몸에 번개를 꽂았던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나 보다. 카이든의 몸 안에 제나스가 살아있었기 때문에.

내 흐린 표정을 알아본 카이든이 내 손등에 뺨을 기댄 채로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내 걱정은 마. 내가 죽으면 그의 영혼도 함께 소멸될 거야. 종속 계약이니까.”

나는 가만히 그의 예쁜 얼굴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괜찮아?”

“뭐?”

“너는 괜찮냐고.”

“마거릿, 나는 내 인생이 로하데로 시작해서 로하데로 끝나게 둘 수 없어.”

그가 천천히 손을 뻗어 내 뺨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실험에 가담한 이들을 전부 잡아내야지. 제나스 XX는 절대로 편히 죽게 하지 않을 거야. 영원히 고통 받게 만들 거고.”

나는 그의 손을 맞잡고 그의 붉은 눈을 똑바로 마주봤다.

“맞아. 그것도 중요해. 하지만 카이든. 나는 네가 무사한 게 더 중요해.”

그리고 이어진 내 말에 카이든의 붉은 눈동자가 요동쳤다. 그의 눈동자에 말로 형연할 수 없는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들이 스쳐갔다.

“마거릿, 나는 네가 정말 좋다.”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더니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는 차분하게 나를 침대 위에 눕히고는 이불을 끌어올려 덮어주었다.

눈치를 보던 은지가 재빠르게 내 머리맡으로 올라와 똬리를 틀었다.

카이든은 내 배 위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이제 그만 자. 밤중에 깨워서 미안하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숙여 내 이마에 입맞춤을 남기고는 인사했다. 나는 그가 얌전히 막사를 나가는 걸 지켜보았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제나스를 카이든이 몸 안에 봉인하고 있었다니.

잠을 자긴 이미 틀린 것 같은데.

나중에 듣기로 카이든의 머릿속에서 시끄럽게 굴던 제나스가 카이든에게 하는 내 마지막 말을 듣고 며칠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이유를 우리는 영원히 알 수 없었다.

* * *

다음날, 군영 전체가 에녹에게 기합을 받느라고 아침부터 시끄러웠다.

나를 험담한 기사들 때문에 연대 책임을 받는 거지만, 아무튼 나도 관계가 있지 않나. 괜히 눈에 거슬리기 싫어서 나는 막사에 얌전히 처박혀 있었다.

“마거릿, 몸은 괜찮아요?”

교황청 사람들을 만나고 왔다는 유안나는 오자마자 내가 쉬고 있는 막사로 들어왔다.

그렇지 않아도 마음이 복잡하던 찰나에 잘됐다 싶었다.

“주교님은요?”

“본인의 막사로 돌아갔어요.”

유안나의 덤덤한 대답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루제프가 묘하게 나를 피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착각이겠지?

“성녀님은요?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니에요?”

나는 유안나의 손을 맞잡고는 물었다. 그녀가 내 침대 위로 슬금슬금 기어 올라오더니 웃으면서 은근슬쩍 침대에 누워 버린다.

“맞아요, 저 무리했으니까 좀 쉴래요.”

아니, 선생님. 그걸 왜 여기서?

“마거릿도 누워요.”

“아니 전 됐…….”

“에이, 그러지 말고.”

유안나가 내 팔을 당겼다. 나는 멍하니 그녀에게 끌려가 그녀와 함께 침대에 누웠다. 여분의 베개를 베고 누운 유안나가 나를 향해 돌아누우며 천연덕스럽게 눈웃음을 지었다.

“친구가 생기면 이런 것 해보고 싶었어요. 마거릿이 제 첫 친구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언제 친구를 하기로 했던가?

“설마, 마거릿 저 말고 다른 친구 있는 거 아니죠? 친구 있어요?”

“아니요. 없어요.”

“우리 둘 다 서로에게 첫 친구네요.”

그러게 스무 살이 훌쩍 넘도록 친구 하나 없었다니, 나도 나지만, 유안나도 참…….

뭔가 사회부적응자들의 대화 같지만, 그 점은 그냥 무시하기로 하자.

사실 나도 친구들과 하는 파자마 파티에 대한 동경이 있었던지라 이런 것도 썩 나쁘진 않은 것 같다.

“마거릿. 들어가도 되나.”

그때 막사 입구에서 에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거릿 지금 바빠요.”

내가 뭐라 답하기도 전에 대답을 한 건 유안나였다. 목소리의 주인이 유안나임을 알아차린 에녹이 막사 입구의 천을 걷고 들어왔다.

그는 안으로 들어오다가 나와 유안나가 침대에 함께 누워 있는 걸 보고 놀라 굳었다. 그의 얼굴은 마치 아내의 외도 현장을 두 눈으로 목도한 그런 표정이었다.

섬에선 매일 같이 흙바닥에 누워 함께 잠들곤 했지만, 이제 우리는 사회적 예법을 준수해야 했다. 나는 민망한 얼굴로 부산스럽게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유안나는 알레아 섬에서 있을 때와 변함없이 누워 에녹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오셨어요?”

물론 그런 유안나의 인사는 가뿐하게 무시한 에녹이 내게로 다가왔다.

“몸은 괜찮은가.”

담백한 물음이었지만, 내 안색을 살피는 그의 눈길은 세심했다. 나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그리고 내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에녹이 나를 끌어당겨 안았다. 그의 단단한 품에 안겨 나는 멀뚱히 눈만 깜빡였다.

에녹이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젠 제대로 인사도 못하지 않았나. 무사해서 다행이다.”

어제 우리가 인사를 제대로 안했던가? 충분히 한 것 같은데.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그러고 보니 에녹은 카이든의 상태에 대해서 알고 있을까?

알레아 섬이 폭발하고 게이트를 넘어오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에녹과 개인적으로 대화를 나눌 시간이 없기는 했다.

하지만…….

나는 에녹의 등 뒤로 보이는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쳐다봤다. 에녹을 따라온 것처럼 보이는 기사들이 막사의 입구에 서서 입을 떡 벌리고 우리를 보고 있었다.

“저기 에녹……. 일행이 있는데요?”

에녹이 그제야 고개를 들고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막사 앞에 선 이들은 에녹과 눈이 마주치자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했다. 대체 에녹의 표정이 어땠길래.

“할 말 있나. 내가 따라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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