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본인에게 불리한 계약 내용이니 제나스가 실험에 가담한 세력들을 찾는 데에 협조적으로 나오지 않을 것이 뻔했다. 그래서 만든 게 마지막 조항, ‘거짓을 고할 수 없다.’였다.
“말할 거야. 그런데 지금은 아니야. 마거릿 놀라잖아.”
제나스가 죽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하면 마거릿이 얼마나 절망스러워할지 눈에 선했다. 그래서 카이든은 그녀가 섬을 탈출한 후유증만이라도 극복하고 그 사실을 고백하고 싶었다.
[그게 정말 그녀를 위한 거라고 생각하나? 어리석군. 뒤늦게 알면 분명 더 절망할 거다. 자책할지도 모르겠군. 내가 알 바는 아니지만.]
조금 괜찮아졌는지, 제나스가 다시금 카이든에게 충고어린 말을 했다. 카이든은 가만히 누워 그의 말을 듣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발현.”
[크흑-!]
제나스의 고통에 찬 신음이 머릿속에 시끄럽게 울렸다. 잠을 자기는 그른 듯싶다.
게다가 수면 상태에 접어들면 제나스가 종종 그의 몸을 차지하려고 했다. 제나스가 카이든의 몸을 차지해봐야 종속 계약 탓에 카이든의 의지나 행동 패턴의 틀에서 벗어나는 짓은 할 수가 없을 텐데, 노력이 참 가상했다.
카이든은 피곤한 얼굴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아무래도 제나스가 힘도 쓰지 못할 정도로 인장을 내리찍어줘야겠다. 그가 마음 편히 잠들기 위해선 그 수밖에 없었다.
* * *
오랜만에 황실에서 티타임이 열렸다.
주최자는 황후였고 흉흉한 전쟁 분위기 속에 사치를 자제하던 이들이 너도나도 티타임에 참석하고자 안달이 났다.
이니스 벨그라임 플로네. 플로네 가문의 후계자이자 마거릿의 언니, 이니스는 평소보다도 더 들뜬 기색의 귀부인들과 영애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상석에 앉아 있던 황후는 가장 가까이 앉아 있는 이니스의 안색을 빠르게 살피고는 미소를 지었다.
“축하합니다, 플로네 영애. 오늘 이 자리는 영애를 위해 마련한 자리에요. 모두 그 의미는 아시겠지요.”
황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모두가 박수를 치며 이니스에게 축하의 말을 건넸다.
“드디어 동생을 찾으셨다지요. 지금 란그리드 군사들과 함께 로말리잔 성역에서 보호를 받고 계시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네. 저도 들었습니다. 축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이니스는 최대한 살가운 얼굴을 하고는 대답했다. 망나니인데다가 골칫덩어리지만, 마거릿은 그래도 제 동생이다. 실종된 동생이 돌아왔다는 데 어찌 기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플로네 공작 부인과의 친분을 고려해도 황후가 이렇게 이니스만을 위한 성대한 티타임까지 마련할 줄은 예상치 못했다.
마거릿과 같은 백금발을 깔끔하게 틀어 올린 이니스는 멋쩍게 뒷목을 매만졌다.
“하늘을 열고 나타났다면서요?”
“신수를 타고 등장했대요. 에녹 황태자 전하와 헤스티아 왕세자 저하께서도 함께 계셨다던데요?”
그런데 영애들은 그들의 안위에 대한 걱정보다는 황태자와 왕세자, 두 남자와 함께 등장한 마거릿에 대한 부러움이 가득해 보였다.
“어머. 그런데 황태자 전하께선 플로네 영애를 싫어하지 않으셨나요? 그동안 함께 계셨다니 끔찍…….”
대화를 듣던 한 영애가 놀란 듯이 말을 꺼냈다. 그러자 옆자리에 앉은 영애가 황급히 그녀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꾹꾹 눌렀다. 그제야 당황한 영애들이 이니스를 바라봤다.
이니스는 별다른 대꾸 없이 침묵했다. 에녹이 마거릿을 끔찍하게 여긴다는 건, 부정할 것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분들은 그동안 대체 어디에 계셨던 걸까요.”
어색한 분위기 속에 한 귀부인이 의문을 표했다. 그 의문을 들은 황후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신께서 잠시 데려가셨던 것은 아닐까요. 그분들은 이 세상의 평화를 위해 신께 선택받으신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밖에는 설명이 불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어느 귀부인의 말에 영애들이 호들갑을 떨며 신의 계시에 대해 논하기 시작했다. 황후가 그 모습을 보며 미세하게 미간을 구기는 것을 이니스는 예리하게 포착했다.
“글쎄요. 한 나라의 권력, 아니 나아가 대륙의 판도를 쥐고 있는 분들이 한날한시에 함께 사라지다니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질 않긴 합니다.”
황후는 직접적으로 모함을 하지 않고 모호하고 의미심장한 말로 의문을 제기했다. 잔잔한 수면에 돌을 던진 것과 같은 여파가 일었다.
이니스는 그제야 황후가 이 자리를 마련한 이유를 눈치 챘다. 뭐라도 꼬투리를 잡고 싶었던 거겠지.
현재 로드반 폐태자가 죄를 감면받은 뒤, 복권하여 전쟁을 진두지휘할 수 있게끔 그를 전적으로 지지한 이가 황후였기 때문이다.
로드반 폐태자가 비어 있는 에녹 황태자의 자리를 차지하고자 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돌아오면 가능한 일이긴 했다. 그때까지 에녹이 실종된 상태로 있을 거라는 전제하에.
“하지만, 진실과 관계없이 모두 살아있다는 게 얼마나 기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여 황태자께서 귀환하시는 대로 성대한 귀환 파티를 열기로 했답니다.”
귀환 파티라니. 과연 돌아온 이들도 그 파티를 즐거워할지 이니스는 의문이었다. 실종된 것이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서였다면, 파티보다는 휴식이 더 절실할 텐데.
“얼른 모두 귀환하셨으면 좋겠어요!”
“덕분에 이 지독한 전쟁이 멈춰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그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하루빨리 듣고 싶네요!”
기대 가득한 목소리로 황후의 말에 호응하는 이들의 대화가 계속 이어졌다.
이니스는 티타임 내내 거북한 얼굴로 앉아 있다가 서너 시간이 지나고서야 겨우 풀려났다.
망할 인간들.
황후가 그녀를 티타임에 초대한 진짜 이유를 알고 나니 사람들의 축하인사가 전혀 달갑지 않았다.
티타임이 끝난 뒤, 황궁 복도를 걸어가던 이니스의 걸음을 붙잡은 이가 있었다.
“플로네 님.”
로드반 폐태자의 임시 보좌관인 듯했다.
이니스가 눈짓하자 이니스의 보좌관 제이든이 한발 앞으로 나아가 그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그리곤 이니스를 대신해서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가.”
제이든은 평생 체력 단련을 해본 적이 없었음에도 기골이 장성하고 풍채가 대단한 인물이었다. 때문인지 로드반 폐태자의 임시 보좌관이 조금 주눅이 들어 눈치를 살피는 게 보였다.
“로, 로드반 전하께서 찾으십니다.”
“지금 전쟁터에 계시는 것 아니었나? 나를 어떻게 찾는다는 거지?”
“영상구로 소식을 전해오셨습니다.”
보좌관의 말에 이니스가 짜증스레 얼굴을 구겼다. 그녀는 성가신 티를 감추지 않고 그에게 화를 표출했다.
“플로네 가문에도 영상구가 있는데 왜 굳이 여기서 내 길을 막는가. 죽고 싶나?”
이니스의 매서운 눈빛에 보좌관이 당황한 얼굴을 했다. 그러자 제이든이 다시 한번 위협적으로 그의 대답을 채근했다.
“플로네 님께서 하문하시지 않나. 대답해.”
“그것이……. 전하께서 황궁으로 연락하는 게 편하시다며…….”
콰득. 이니스의 손에 들린 신분패가 부러졌다.
아주 제멋대로다.
에녹이 사라지고서 다시 복권한 로드반 폐태자는 이니스에게 한눈에 반했다며 접근한 뒤, 끊임없이 추파를 던졌다.
그는 전장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에녹 황태자를 살해하려다가 현장에서 검거되어 자격을 박탈당하고 유배되지 않았던가. 그런 주제에 뻔뻔하게.
로드반은 황태자감이 전혀 아니었다. 생각이 얕고 수가 전부 읽힐 정도로 단순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황후의 입김인지, 황제가 그를 두둔하기 시작하면서 그의 지위와 견고해지고 있었다.
이니스는 이를 바득 갈며 보좌관을 따라 영상구로 로드반 폐태자의 역겨운 얼굴을 마주했다.
[조금만 기다리게. 내 무사히 돌아가서 자네를 내 부인으로 맞이하지.]
“소식 못 들으셨습니까. 황태자 전하께서 귀환하셨다고 하더군요.”
[그건 내가 알아서 해. 여긴 전부 내 사람들로 가득 차 있어. 그게 무슨 말인 줄 아나? 내가 곧 싹을 다 자르고 무사히 황태자위에 앉을 거란 소리지.]
“누가 전하와 결혼한다고 했습니까. 전 플로네 가문을 이을 후계자입니다. 무례는 그만 하십시오. 더 나가신다면 가문에 대한 모욕으로 알겠습니다.”
[하하하하. 이번에는 뭐 때문에 화가 났는가? 화난 얼굴도 아름답군. 그런데 지금은 내가 피곤해서 이만, 조금만 기다리게나.]
이니스는 영상구가 꺼지고 역겨운 얼굴이 사라지자마자 그것을 곧장 바닥에 내던졌다.
‘이 망할 개자식이, 에녹 황태자와 마거릿만 돌아오면 네 멱을 따주마.’
그런 생각을 하다가 이니스는 조금 전에 로드반 폐태자가 ‘여긴 전부 내 사람들로 가득 차 있어. 그게 무슨 말인 줄 아나?’라고 했던 말을 떠올렸다.
하여간 그 멍청이는 조심성도 없다. 그러니 폐태자로 전락하고 유배되었겠지만.
이니스는 서둘러 움직였다. 로말리잔 전투 지역으로 향한 플로네 가문 사람에게 이 소식도 함께 전해야겠다.
이왕 귀환하는 김에 망할 로드반 자식은 싹을 완전히 자르라고 전해야지. 다시는 복권 같은 건 꿈도 꾸지 못하도록.
* * *
한밤중이었다.
깊게 잠들어 있던 나는 얼굴이 간질거리는 느낌에 미간을 좁혔다. 꼭 누군가가 내 뺨을 매만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크흡……. 후우……. 건방진 자식. 온몸을 아주 걸레 조각으로 만들어뒀군.”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번쩍 눈을 떴다. 그러자 시야에 카이든의 얼굴이 들어왔다.
“깼나.”
“카이든?”
“내가 카이든으로 보이긴 하겠군. 안타깝게도 카이든은 아닌데.”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 머리맡에 똬리를 틀고 잠들어 있던 은지가 비몽사몽한 얼굴로 부스스 눈을 떴다.
“너 누구야!”
나는 황급히 랜턴에 불을 붙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눈앞에는 카이든이 앉아 있었다. 은발에 붉은 눈. 오른쪽 귀에 귀걸이까지. 카이든이 분명 맞는데.
“설마…… 제나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