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녹은 어디 갔나 했더니 내 등 뒤에 있었던 모양이다. 그가 뒤에서 나를 번쩍 안아 올리더니 자리를 바꿔 앉게 했다.
원형 탁자였는데 결국 나는 아스달과 에녹 사이에 앉게 됐다. 카이든이 불만 가득한 얼굴로 투덜거렸다.
“마거릿, 그대는 괜찮은가.”
그때 에녹이 내게 물었다. 나는 그의 질문을 받고서야 내 상태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나는……, 괜찮나?
그의 물음에 갑자기 머릿속이 깜깜해졌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사실 우리 모두 괜찮지 않은 것 같아요. 그게 정상이잖아요. 억지로 괜찮은 척은 하지 말까 봐요.”
내 대답에 에녹은 말없이 나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했고 카이든은 내 옆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조용히 눈치를 보던 아스달이 부드러운 화법으로 분위기를 전환시켰다.
“영애의 말이 맞아. 억지로 괜찮은 척 해봐야 속만 곪지. 모두 이렇게 살아서 나온 게 어딘가. 난 사실 모두 대견해. 생각해보게. 우린 세상을 구했어. 아직은 아무도 몰라서 그렇지.”
의심이 많은 타입이긴 하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 그는 밝고 긍정적인 사람이다.
사실 우리 중에서 가장 억지로 괜찮은 척 하는 사람은, 한쪽 눈을 잃은 그가 아닐까 싶긴 하지만.
그러다가 나는 문득, 나와 카이든은 그대로인데 에녹과 아스달은 옷을 갈아입은 채라는 걸 깨달았다.
“저는 드레스가 없어서 옷도 못 갈아입었는데, 다들 옷은 어디서 난 거예요?”
내 물음에 아스달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남성용 의복은 여벌이 많이 있지.”
“드레스는 공수해오는 중이라고 하니 조금만 참는 게 좋겠군. 참고로 이 보병대에는 여기사가 배치되지 않아서 여기사용 제복을 구하는데도 비슷한 시간이 소요된다. 그럴 바엔 그냥 드레스를 입는 게 낫지 않겠나.”
아스달의 말에 보충되는 설명을 해준 에녹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테이블 옆 선반에서 찻잎을 가져왔고 주전자에 물을 부어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아스달이 옆에서 찻잔을 세팅하기 시작했다.
“드레스보단 바지가 편……. 아니요. 그래요. 드레스 입을게요. 적응해야지. 난 마거릿이니까.”
내 말에 이번에도 세 남자가 말없이 나를 빤히 바라봤다. 어쩐지 동정의 시선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황태자 전하, 말씀하신 차를 준비해왔습니다. 들어가겠습니다.”
나는 막사 밖에서 들려온 소리에 의아해서 아스달과 에녹을 돌아봤다.
에녹은 제가 차를 준비시켰다는 걸 잊고 있었는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찻잔 세트를 들고 들어온 기사는 부산스럽게 차를 만들고 있는 에녹과 아스달을 보고 화들짝 놀란 얼굴을 했다.
“그……. 죄, 죄송합니다. 차가 필요치 않다는 얘기를 따로 듣지 못했습니다. 찻잔 세트는 물리겠습니다.”
기사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횡설수설하며 고개를 조아리자, 에녹과 아스달의 얼굴도 덩달아 창백해졌다.
두 남자 모두 무인도에 오래 있었더니, 뭐든 제 손으로 하는 법에 익숙해진 모양이다. 물론 아스달은 찻잔을 세팅만 했고 정작 차를 내리는 건 에녹이었지만.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던 카이든이 혀를 찼다.
“그냥 내려놓고 가. 저분들이 내린 차보다야 그게 더 맛있을 것 같으니.”
카이든의 말에 어정쩡하게 서 있던 기사가 에녹의 눈치를 살폈다. 에녹이 민망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놓고 가라.”
어린 소년으로 보이는 기사는 제가 실수를 한 줄 알고 바짝 긴장한 얼굴로 손을 덜덜 떨며 우리 앞에 찻잔을 내려놨다.
그리고는 군기가 바짝 들어간 동작으로 절도 있게 바로 서더니, 에녹에게 우렁차게 인사를 하고는 막사 밖을 나갔다.
“풉.”
기사가 나가자마자 나는 참았던 웃음을 터트렸다. 얼마 만에 이렇게 시원스럽게 웃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척 재미있는 상황이었다. 우리끼리만 공감할 수 있는 그런 유대감도 있었다.
“아직은 적응이 필요해 보이는군.”
아스달도 멋쩍은 얼굴로 따뜻한 차를 마시며 대답했다. 나는 너무 웃어서 흘린 눈물을 훔치며 아스달과 에녹을 향해 물었다.
“아무튼 그래서 할 말이라는 건 뭐예요? 그렇지 않아도 저도 물어볼 게 있었거든요.”
내 물음에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아스달이 먼저 입을 열었다.
“물어볼 것?”
“실종된 동안의 행방에 대해서 다들 뭐라고 하셨어요?”
내 물음에 역시나 이번에도 아스달이 대답했다.
“납치였다고 사실대로 밝히는 게 이득일세.”
“공개수사를 하자는 말인가요?”
“공개수사? 처음 듣는 용어지만, 그 말이 맞아. 알다시피 대륙 전쟁이 일어날 정도로 판이 커지지 않았나. 지금 이 사건을 온 나라가 주목하고 있어. 공개수사를 진행하면 배후들은 어떻게든 움직이려 할 걸세.”
“반대로 쥐 죽은 듯이 있을 수도 있고.”
아스달과 에녹은 서로의 말을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주면 더 고맙지. 방해 없이 알레아 섬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
“알레아 섬이라뇨?”
내가 의문을 표하자 잠자코 아스달의 말을 경청하던 에녹이 입을 열었다.
“아스달의 말대로 공개적으로는 배후 세력을 찾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수사를 진행할 거다. 그러나 우리가 그보다 먼저 해야 할 건, 파괴된 알레아 섬을 찾는 거야.”
“네? 잠깐만요, 알레아 섬은 다른 시공간에 있는 섬이 아니었나요? 어. 그러니까 저는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섬이라고 생각했는데요?”
나는 에녹의 말에 조금 이해할 수 없어서 되물었다. 게다가 알레아 섬은 완전히 파괴되지 않았던가.
“영애, 우리가 통과한 워프 게이트 기억하나?”
아스달이 내게 물었다. 은지를 타고 벗어났던 그 탈출 게이트 말하는 모양이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옆에 앉아 있던 카이든이 입을 열었다.
“그건 차원의 문을 열거나 다른 시공간에 존재하는 곳으로 향하는 워프게이트가 아니었어. 란그리드 제국 남부 해안가로 좌표가 찍혀 있더라.”
“그럼…….”
“제국의 남부 해안가 어디에 알레아 섬을 구축하고 시공간을 비튼 거지.”
카이든의 말에 에녹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섬은 파괴됐지만, 잔재는 분명 남아있을 거다. 실험의 배후들보다 알레아 섬을 우리가 먼저 찾아서 증거물 확보를 할 생각이야.”
‘너희는 모두 너희와 가까운 이들에게 배신당해 이곳에 온 거야. 뭐, 꼭 그렇지 않은 이도 있지만.’
‘섬에서 나가면, 거미줄에 걸린 모란 꽃 문양. 그걸 찾아. 그게 그 세력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증표니까.’
아나타가 분명 그런 말을 했었지. 나는 에녹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실험의 배후는 아나타 말대로 교황청과 로하데 가문 말고도 더 있는 거죠?”
내 물음에 아스달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더 있어. 이 전쟁과 연관이 있거든. 빌터하임 가문이 그 세력에 대해 아는 게 있는 것 같더군.”
나는 갑자기 나온 디에고 가문 이야기에 놀라서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빌터하임 가문이요?”
그러고 보니 디에고가 보이지 않았다. 빌터하임 가문의 사람들이 이 군영에 와 있는 건가?
에녹이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갔다.
“빌터하임 공작 가문이 원래는 실험의 배후 세력 중 하나였던 모양이다. 그런데 디에고 경의 세대에 와서 현 공작 부부가 반기를 들었는데…….”
“맙소사. 그럼 디에고 경이 피실험자 목록에 포함된 것도.”
“맞아. 그들의 보복이지.”
나는 그제야 원혼 나무들이 디에고를 향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쁜 놈들-]
[우릴 죽인 놈들-]
[이놈 핏줄-!! 이 더러운-!!]
분명 그건 디에고를 향해 하는 말이었다.
“디에고의 동생이 황실 기사단 소속인데, 이번 전쟁에 차출되어 출전했다 하더군. 이 군영은 아니고 서쪽 군영에 머물고 있는데, 디에고 경은 거기에 있다.”
에녹의 말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선 디에고가 돌아오면 다시 얘기해봐야겠네요.”
그렇게 나는 ‘디에고가 오기 전까진 그래도 평화롭겠네.’ 혹은 ‘막사에서 뒹굴어야겠다.’같은 태평한 고민이나 했다.
다음 날, 기강이 해이해졌다며 연대책임으로 보병대 전체가 에녹에게 기합을 받는 진귀한 광경을 목격하기 전까진 말이다.
* * *
[당연히 나에 대해 알릴 줄 알았는데, 숨기는 이유가 뭐지?]
카이든이 개인 막사로 돌아오자마자 제나스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카이든은 대답하지 않고 침대 위에 누웠다.
[이봐, 후손님. 대답 안하나.]
가만히 막사의 천장을 올려다보던 카이든이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발현.”
[큭-!]
제나스의 고통에 찬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계약에 묶여 매번 그렇게 낙인이 찍히면서도 나불거리고 싶냐? 끈기는 칭찬해.”
[건방진……! 크흑.]
절대로 기죽는 법이 없는 오만한 제나스의 목소리를 들으며 카이든은 혀를 찼다.
“거기가 편하지? 근데 너는 편하면 안 되잖아, XX야. 계속 그렇게 고통을 느껴야지. 그래야 좀 벌 같잖아.”
나중에야 들었지만, 제나스를 공격한 번개는 역시나 원혼들이었다. 덕분에 카이든은 무사히 제나스를 제압하고 그를 속박할 수 있었다.
첫째, 제나스는 영원히 카이든의 몸 안에 종속된다. 그러므로 그에게 위해를 가하거나 그의 뜻과 의지를 절대로 거스를 수 없다.
둘째, 실험에 가담한 세력을 찾는 것을 돕는다. 그들을 하나씩 처리할 때마다 제나스의 영혼은 한 갈래씩 찢어지는 고통을 맞게 된다.
셋째, 카이든의 종으로서 카이든에겐 절대로 거짓을 고할 수 없다.
제나스의 모래알 같은 영혼을 전부 제거하기 어려웠기에 차선책으로 선택한 영혼 종속 계약 내용이었다.
영혼 종속 계약에는 ‘인장’이라는 게 존재한다. 주인의 뜻을 거스를 시, 가해지는 형벌이었다. 불에 데운 거대한 인장으로 영혼을 찍어 누르는 것인데, 이는 온몸이 타들어가는 끔찍한 고통을 안겨준다.
또한 계약에 따르면 실험에 가담한 세력들을 하나씩 처리할 때마다 영혼 조각이 찢어질 터이니, 구태여 모래알 같은 영혼들을 직접 부수지 않아도 종래에는 카이든 안에 남은 모든 제나스의 잔재를 다 없앨 수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