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177)화 (177/234)

옆으로는 난장판이 된 막사 앞에 넋을 놓고 나를 쳐다보는 기사들이 보였다. 내가 조금 전에 구해준 남자들이었다.

카이든은 이 상황에서 눈치도 없이 계속해서 내 몸에 상처가 없는지 살피고 있었다. 하이젠이 분명 카이든의 상태가 좋지 않다고 했는데 다 거짓말이 확실했다.

“무슨 일인가.”

그때 나를 향해 검을 겨눈 무장한 기사들 사이로 무게감 있는 중저음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러자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치우고 길을 텄다.

모세의 기적처럼 갈라진 기사들 사이로 흑발에 고풍스러운 제복을 갖춰 입은 남자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딱딱한 동작으로 걸어 나온 남자가 무심한 얼굴로 좌중을 훑었다.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무장 기사들을 단숨에 압도하고 긴장하게 만들어버린 눈앞의 남자가 다소 낯설었다.

“검 내려.”

남자의 살벌한 음성에 기사들이 발을 구르며 절도 있는 동작으로 검을 내렸다.

“황태자 전하.”

내 부름에 그가 나를 봤다. 에녹의 등 뒤로 서 있던 기사들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에녹을 따라 나를 쳐다본다.

그들 대개는 에녹의 날 선 반응과 책망이 이어지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나 역시도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과거의 에녹이라면 마거릿인 내가 그를 부르는 것조차 싫어했을 테니, 기사들의 그런 반응도 이해는 갔다.

그러나 에녹은 내 앞에 서서 허리를 숙이더니 손을 들어, 내 뺨을 잡고는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평소대로 에녹이라고 불러. 다친 곳은 없고?”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에녹을 쳐다봤다. 에녹의 말은 사실 잘 들리지 않았다. 그의 등 뒤로 보이는 기사들의 어마어마한 시선이 무척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식은땀이 나네.

“마거릿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치료할 테니.”

카이든이 에녹에게서 나를 떨어트리고는 내 앞을 가로막았다. 에녹을 노려보는 카이든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제국의 군사들 관리나 좀 제대로 해야겠습니다. 지나가던 민간인한테 도움이나 받고, 군기가 이리 없어서야 원.”

카이든이 혀를 차며 내게서 목숨을 구제받은 기사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나콘다 마물을 타고 조명탄을 쏘는 내가 과연 기사들에게 무력으로 밀릴 사람인가 싶긴 했지만, 일단 그 점은 넣어두자.

에녹의 시선이 천천히 움직여 구석에서 눈치를 보고 있는 기사들을 향했다.

그 중엔 노엘과 하이젠도 있었다.

“설명이 필요하군.”

에녹의 추궁에 기사들이 당황해서 허둥지둥하는 게 보였다. 그중 맨 앞에 있던 노엘이 거의 울먹이다시피 하며 말을 더듬었다.

“그, 그게 아니라…….”

“잠시 쉬던 중에 바다악어 떼가 습격을 했습니다. 그때 플로네 영애께서 나타나 악어 떼들을 죽였습니다.”

결국 보다 못한 하이젠이 대신 대답했고 노엘이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마, 맞습니다. 열댓 마리 정도 되었던 것 같은데, 영애께서 신수와 함께 마도구로 악어 떼들을 쏴 죽였습니다. 저희를 공격한 악어 떼들 전부를요.”

노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주변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에녹의 등 뒤로 서 있던 기사들이 당혹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전부를?’

‘마탑주도 있었는데 그게 말이 되나.’

‘조금 전 영애가 쏜 마도구의 위력을 보면 그럴 만하지 않아?’

‘신수가 악어를 먹어 치우는 것도 봤잖아. 말이 아예 안 되는 건 아닌데.’

수군거리는 소리가 점차 커지고 있었다. 나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잠자코 있었다.

우선 내 관심사는 눈앞에 있는 수십 명의 기사가 아니라, 내 험담을 하던 기사들이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노엘과 하이젠이 흠칫 놀라서 시선을 회피한다.

어쩐지 마음이 삐딱해지는 것 같다. 빈정거리고 싶은 기분을 참을 수 없어 나는 결국 그들에게 한마디 했다.

“훈련의 강도를 더 높이셔야겠어요. 귀족 영애 험담이나 하다가 그 귀족 영애에게 도움을 받는 꼴이라니. 기사 체면이 말이 아니잖아요.”

내 물음에 모두의 이목이 그들에게로 집중됐다. 그러자 노엘과 하이젠을 포함한 험담 기사 다섯 명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몸을 움츠렸다.

그렇게 묻다가 나는 의문 어린 시선이 이번엔 내게 향하는 것을 느끼곤 좌중을 훑으며 설명했다.

“아, 이 고귀하신 기사님들께서 모여 앉아 고작 귀족 영애 하나를 물어뜯으며 험담하고 있더라고요.”

내 뒷담을 했던 기사들이 그저 놀라서 입만 벙긋거렸다. 지레 겁을 먹은 그들이 이윽고 내 앞으로 달려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영애. 무례를 용서해주십시오.”

“기사도에 어긋나는 행동이었습니다. 질타받아 마땅합니다. 그리고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생각보다 상황 파악이 빠른 자들이었다. 내 험담을 하던 기사들 전부 무릎을 꿇고 사과했다.

“무례인 줄 알면 함부로 지껄이지 말았어야지. 마거릿 건들면, 어? 내가 물어뜯어 버릴 거야. 아가리 간수 잘해라.”

삐딱하게 서 있던 카이든이 기어코 무릎 꿇은 기사들을 협박하더니 개처럼 으르렁거리며 물어뜯는 흉내를 냈다.

그러는 사이, 누군가가 기사들 사이를 비집고 나타났다. 화사한 분홍색 머리카락이 먼저 눈에 들어왔고 그다음엔 오른쪽 눈을 가리고 있는 검은 안대가 눈에 들어왔다.

검은 안대를 하고 있음에도 아스달은 매우 기품 있고 우아한 왕자님 같았다. 나는 반가운 얼굴로 그에게 인사했다.

“건빵 왕……, 아니 왕세자 저하! 눈은 괜찮으세요?”

반갑게 마주 인사하려던 아스달이 멈칫하고는 미간을 좁혔다. 그가 주변을 스윽 훑더니 내게로 고개를 기울이고는 작게 속삭였다.

“이보게 영애, 그놈의 건빵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차라리 건방달 소리가 더 낫군.”

“……네? 아, 원하시면 건방달 저하라고 부를게요.”

“아니, 그걸 원한다는 말이 아니라……. 하, 거참.”

아스달이 할 말을 잃고 뒷머리를 긁적인다. 다소 매운맛 같던 성격이 이제는 순한맛이 다됐다. 맹탕 같아지기도 했고. 아무튼 좋은 변화였다.

“아니, 얘기 중에 갑자기 우리 반ㅎ……. 큼. 황태자께서 사라지셔서 따라왔지 뭔가.”

반황이라는 말을 꺼내려다가 살벌한 분위기의 란그리드 기사들을 훑으며 아스달이 호칭을 정정했다.

물론 정작 기사들은 그것보단 다른 데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헤스티아 왕세자가 플로네 영애를 싫어한다는 소문을 들은 것 같은데.’

‘거짓 소문이었나 보네.’

누가 말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간도 크다. 저 소리는 분명 에녹과 아스달도 들었을 것 같은데.

빨리 자리를 좀 피하고 싶다.

그런 내 심경을 알아차린 건지 아스달이 화제를 전환했다.

“두 사람도 우리와 따로 얘기 나누도록 하지. 할 말이 있네.”

아스달이 나와 카이든을 콕 짚어 가리키며 말했다. 카이든은 아무렴 좋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이상하게 자꾸만 그에게서 기시감이 느껴진단 말이지.

“경들은 처분을 기다리게.”

에녹은 매서운 얼굴로 내 험담을 하던 기사들을 향해 말하곤 등을 돌렸다. 에녹의 말을 들은 기사들이 겁에 질린 얼굴로 바들바들 몸을 떨었다.

노엘과 하이젠은 내 눈도 쳐다보지 못하고 죄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다른 기사들이 내 험담을 할 때, 두 사람은 나를 두둔했다. 그건 나도 안다. 하지만 일단 그 자리에 있기는 했으므로 그들의 편을 들어주긴 힘들었다.

그렇게 나는 그들을 등지고 에녹과 아스달을 따라나섰다. 우리가 멀어지고서야 시립해 있던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흩어지는 게 보였다.

카이든이 군기가 없다고 말한 게 여간 빈정이 상한 게 아니었는지 합을 맞추어 절도 있게 움직이는 모습들이 로봇 같기도 했다.

카이든은 참 어떤 의미에선 정말 영향력이 대단한 인물 같다.

우리는 에녹의 막사로 들어왔다.

에녹의 막사에는 원형 회의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에녹은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의자에 걸치며 우리에게 자리를 권했다.

“편히 앉도록.”

에녹은 그중에서도 내게만 특별히 의자를 빼어주는 친절을 베풀었다. 그런데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이든이 뻔뻔한 얼굴로 에녹이 빼준 의자에 앉았다.

에녹이 황당하단 얼굴로 그를 쳐다봤으나 카이든은 개의치 않고 귀를 후비적거린다.

두 남자의 신경전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얼굴로 아스달이 손뼉을 마주쳤다.

“자, 다들 무사해서 다행이야.”

나는 카이든의 옆자리에 앉으며 맞은편에 선 아스달을 쳐다봤다.

오른쪽 눈을 가린 검은 안대가 무척 멋스럽기는 했으나, 신력으로도 치료가 되질 않는다니 안타깝기는 했다.

“눈은 정말 괜찮으신 거예요?”

“왜, 걱정되나? 이거 좀 멋있지 않은가. 아주 만족스럽네. 왕세자의 눈에 안대라니. 사연 있어 보이고 좋지 않나. 적당히 위협적이기도 하고.”

하하하하! 아스달이 사람 좋은 얼굴로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로 그답다.

사람이 마음이 참 그래. 천연덕스럽게 구는 게 섬에서는 그렇게 짜증날 수가 없었는데, 완전한 아군으로 그를 받아들이니 이렇게 또 안쓰럽다.

“무려 제국의 황태자를 구하다 다친 상처니 아주 영광이야! 나보단 반황이 안타깝게 됐군. 평생 내 눈을 보며 죄책감을 가질 것 아닌가? 음. 그건 좀 부담스러우니 죄책감은 적당히 가지도록 하게나.”

아스달이 에녹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속삭였다. 물론 속삭이는 말 치곤 굉장히 커서 우리에게도 다 들렸지만.

유안나와 루제프는 교황청 사람들을 만나러 갔다고 들어서 지금은 우리뿐인 듯했다.

가만히 아스달의 호들갑을 지켜보고 있는데 옆에 앉은 카이든이 내게 말했다.

“마거릿, 걔들이 하는 말은 신경 쓰지 마.”

“어?”

나는 그의 말에 놀라서 그의 얼굴을 한번, 그리고 에녹과 아스달의 얼굴을 한번 바라봤다.

“카이든, 너 아무리 그래도 황태자와 왕세자보고 걔들…….”

“아니, 아까 그놈들 말이야.”

카이든이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리며 대답했다. 그제야 나는 그가 내 험담을 하던 기사들을 말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아……. 어떻게 신경을 안 써. 그게 내 평판인데. 근데 그런 걸로 주눅 든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그리고 내 대답에 투닥거리던 에녹과 아스달마저 나를 쳐다봤다. 갑자기 무거운 침묵이 감돌며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아니, 진짜 난 괜찮아요. 그보다 카이든, 넌 몸은 좀 어때? 나 너 보러 가는 중이었어.”

나는 다시 카이든을 돌아보며 물었다.

제나스에게 몸을 뺏겼던 게 보통 일은 아니지 않은가. 그건 물론 마력 소모를 굉장히 많이 한데다가 정신적인 충격을 상당히 받았을 상황이었다.

카이든은 속을 알 수 없는 고요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그러다가 나를 향해 완전히 몸을 틀어 앉고는 고개를 기울였다.

“괜찮지 않으면, 어떻게 할 건데?”

“어?”

무슨 뜻이지? 의미를 몰라 나는 멀뚱히 카이든의 얼굴을 바라만 봤다.

그러자 그가 내 손을 들어 손등에 지그시 입술을 찍어 눌렀다. 그의 입술이 닿은 손등이 꼭 낙인이라도 찍힌 것처럼 화끈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괜찮지 않다고 말하면, 내 막사로 와서 간호해줄 거야?”

손등에서 입술을 떼지 않은 채, 카이든이 요망한 눈을 하고 나를 올려다봤다.

이건 평소의 카이든이다. 평소의 카이든 맞네, 맞아.

“그만 하지.”

뜻밖에도 에녹이 아닌 아스달이 먼저 카이든을 제지했다. 아스달은 내게서 카이든을 밀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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