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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176)화 (176/234)

“네? 상처는 모두 치료했다고 들었는데요?!”

“아, 상처의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후유증에 시달리시는 것 같았습니다. 계속 이상한 혼잣말을 하신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혼잣말을 한다니, 카이든은 정말 괜찮은 걸까?

걱정에 잠긴 내게 하이젠이 조심스럽게 다시 질문했다.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건지 말씀해주실 수 있습니까?”

하이젠의 물음에 나는 말문이 막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그가 계속해서 내게 질문을 쏟아냈다.

“어떻게 그렇게 감쪽같이 사라지셨는지, 그동안 어디에 계셨던 건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요. 아마 지금 전 대륙인들이 궁금해하는 질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미친 전쟁의 원인이기도 하고요.”

궁금해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럴 거라고 예상도 했고. 하지만 당장엔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아직 알레아 섬 프로젝트의 잔재가 남아있다. 교황청과 로하데 가문, 그리고 그 외에도 다른 세력의 개입이 더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니 나도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한 뒤에 일행들과 입을 맞추는 게 좋겠지. 섣부른 말은 혼란만 야기할 뿐이다.

“제가 그때의 일만 떠올리면……. 아직은 너무 힘들어서…….”

나는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가슴 앞섬을 움켜쥐고 괴로운 얼굴을 했다. 눈물이 흐르지는 않았지만, 손가락으로 눈물을 닦는 척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자 하이젠과 노엘이 당황한 얼굴로 손을 저었다.

“괜찮습니다. 저희가 괜한 말을……!”

“죄송합니다, 영애. 그럼 쉬십시오.”

나는 하이젠과 노엘이 허겁지겁 막사를 나가는 걸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카이든이 쉬고 있는 막사가 어딘지 다른 이들에게 물어봐야겠다.

나는 실뱀처럼 작아진 은지를 항공 점퍼 주머니 안에 넣었다. 호기심이 많은 데다가 뭔갈 구경하는 걸 좋아하는 녀석인 터라 주머니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고 나를 쳐다본다.

그 깜찍한 모습에 나는 웃음을 터트리고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먹지 않은 스튜가 테이블 위에서 식어가고 있었지만, 입맛이 없었다.

일단 카이든의 상태가 걱정돼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아마도 제나스에게 몸을 빼앗겼던 후유증이 강하게 남은 것 같은데.

나는 막사의 천을 걷고 조심스레 밖을 살폈다. 기사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는데 막사 앞을 지키던 하이젠과 노엘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내가 지내던 막사에는 푸른색의 깃발이 걸려 있었는데, 에녹에게 듣기로는 귀빈용 막사에는 저렇게 푸른색의 깃발을 표시한다고 한다.

카이든의 막사에도 푸른색의 깃발이 달려 있을 테니, 그곳을 찾아야겠다.

바쁘게 움직이다 보니 주머니 안에 있는 조명탄의 무게가 묵직하니 잘 느껴졌다. 주머니를 뒤적이며 나는 잠시 조명탄을 손에 쥐어봤다.

크로스백 안에 들어 있던 조명탄의 탄알과 상비약, 그리고 수류탄 등 다양한 현대물품도 함께 이곳으로 넘어왔었다. 하지만 이젠 쓸 일이 없겠지.

‘이곳 사람들이 보면 신기해하겠다.’

나는 피식, 웃음을 지은 뒤에 주머니에서 조심히 손을 뺐다.

군 진영의 막사는 광활한 평야에 세워졌다. 삼면이 탁 트인 평야였고 한쪽으로는 거대한 강이 흐르고 있었다.

너른 하늘이 한눈에 들어온다. 덕분에 해가 지는 모습을 온전히 눈에 담을 수 있었다. 나는 카이든의 막사를 찾다가 노을이 지고 있는 하늘을 가만히 올려다봤다.

아름답다.

그린 듯한 풍광을 지닌 알레아 섬이 훨씬 아름답긴 했다. 하지만 그곳에선 아름다운 자연조차도 아름답다고 여길 틈 없이 힘든 나날을 보냈다.

그래서 이런 일상 같은 하늘이 어쩐지 내 마음에 더 깊이 박혔다.

그때.

“하벨 경, 플로네 영애 봤습니까?”

“이상한 옷 입고 있는 것 말인가? 그 여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이상하긴 하지. 외모가 아깝게.”

“소문을 듣지 못했다면, 저는 첫눈에 반해버렸을 겁니다. 아주 눈이 부시게 아름다우십니다.”

마지막에 들려온 대답은 조금 전까지 내 막사에 있었던 노엘의 것이었다. 나를 옹호하는 건지 아닌지 모를 노엘의 말을 이름 모를 기사들이 반박했다.

“야, 그럼 뭐하냐. 성격이 이상하잖아.”

“처음 실종 소식이 전해졌을 때, 플로네 영애가 기어코 황태자 전하를 납치했다고 생각 안 해본 사람이 있습니까? 실제로 그렇게 떠들고 다니는 인간들도 있었습니다.”

나는 막사 옆에 서서 들려오는 기사들의 대화 소리를 들었다. 말단 기사들로 보였는데, 네다섯 명이 강가에 모여 앉아 담배를 태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지난 1회전 전투 때 신수를 타고 등장한 거 보셨습니까?”

“그건 좀 압도적이긴 했지 말입니다.”

“그런데, 그럼 그동안 플로네 영애가 그 사라지신 분들과 함께 있었다는 것 아닙니까. 황태자 전하는 무슨 죕니까. 정말 끔찍했을 것 같습니다.”

“끔찍하다는 소리는 조금 과한 것 같은데, 마티스 경. 적당히 하십시오.”

마지막 말은 하이젠의 대답이었다. 잠깐이었지만, 그래도 안면이 있어서일까. 노엘과 하이젠은 내 편을 들어주고자 애썼다.

막사 옆에 서서 뒷담화를 듣고 있으려니 급격하게 목이 탔다. 사교계 영애들 못지않게 아주 시끄럽다.

“어? 잠깐만요. 모두 저기 보셨습니까?”

그때 노엘이 이상한 기척을 감지한 듯 목소리를 낮추었다. 나도 기사들을 따라 노엘이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노엘은 고요하고 잔잔한 강 위를 가리키고 있었는데, 한참의 시간이 흘러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뭐야, 장난해?”

“아, 아닙니다. 분명 움직였는데…….”

“자식, 겁은 많아가지고.”

기사들의 나무람이 계속되는 가운데 나는 가만히 수면 위를 노려봤다.

이건 본능이었다. 반년 넘게 무인도에서 지내면서 생긴 사냥 본능 같은 것.

난 곧바로 조명탄을 꺼내 탄창을 열어 탄알을 확인했다. 2번은 쏠 수 있을 것이다. 주머니에서 고개를 내밀고 혀를 날름거리던 은지가 천천히 내 팔을 타고 나와 어깨 위에 올라왔다.

천천히 조명탄을 장전하고 레버를 내렸다. 그리고 방아쇠를 당길 준비를 하고 강 위를 조준했다.

그러나 정작 기사들은 긴장감 없이 대화를 계속했다.

“아무튼 하이젠 경, 과하긴 뭐가 과합니까. 플로네 영애가 끔찍하게 구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지 말입니다.”

“XX, 야. 누가 끔찍해? 뒤지고 싶냐?”

“으, 으악!”

카이든의 목소리였다.

나는 화들짝 놀라서 들고 있던 조명탄을 내렸다. 그리고 막사 옆으로 조심히 고개를 내밀었다.

아니나 다를까. 카이든이 바닥에 쓰러진 기사의 허리를 발로 꾹 누르고 있었다.

“당신 뭡니……!? 마, 마탑주님?”

주황머리의 주근깨 가득한 남자가 카이든에게 밟혀서는 놀란 얼굴을 했다.

“누가 끔찍해? 마거릿이? 눈깔이 돌았군.”

카이든이 기가 찬다는 얼굴로 주변 기사들을 매섭게 훑었다. 기사들이 담배를 태우다 말고 놀라서 뒷걸음질을 치는 게 보였다.

카이든이 깨어난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다. 다행히도 멀쩡해 보였다. 제나스에게 몸을 빼앗겼던 것의 후유증은 크게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야, 마거릿은 욕을 해도 예쁘고. 세수 안 해서 눈곱 낀 얼굴을 해도 예뻐. 기름진 머리 긁적이면서 사냥감 손질을 능숙하게 하는 것도 얼마나 예쁜데, 너희가 뭘 안다고 X같은 소리를 지껄여?”

……예시가 굉장히 더럽고 구체적이다. 내가 저랬구나. 카이든, 저 X끼 사실 나를 돌려 까고 싶었던 건 아닐까?

착잡한 얼굴로 그들을 지켜보던 나는 앞으로 걸어 나왔다. 애초에 카이든을 찾기 위해 막사를 나왔기 때문에 그와 얼른 안부를 나누고 싶었다.

그런데 막 카이든에게 인사하기 위해 입을 열었을 때,

“어? 어어?”

“제기랄, 악어 떼다!!”

“공격 준비! 공격 준비!”

소란이 일었다. 조금 전에 노엘이 가리켰던 강의 수면 위로 바다악어 떼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크기도 큰 것이 거의 열댓 마리는 되는 것 같았다.

기사들이 담배를 피우다 말고 허겁지겁 무기를 찾는 사이, 바다악어 떼들이 빠르게 땅으로 기어 올라왔다.

카이든이 팔짱을 끼고 흥미롭게 상황을 지켜보며 두어 발 뒤로 물러났다. 기사들을 도와줄 생각이 전혀 없는 듯 보였다.

뒷담화를 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눈앞에서 그들이 죽어버리도록 내버려 두는 건 다른 문제다. 차라리 내게 도움을 받은 그들이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편이 낫지.

‘그건 좀 재밌겠네.’

나는 다시 조명탄을 꺼내 탄알을 재장전하고 악어 떼들을 향해 조준했다.

조명탄의 불꽃이 물에 닿으면 위력이 떨어질 거다. 나는 침착하게 놈들이 땅을 밟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조준한 조명탄의 방아쇠를 당겼다.

피융-. 펑! 퍼엉!

붉은 연기가 공기 중을 가르고 날아가 악어 떼들 사이에서 요란한 불꽃이 되어 터졌다.

“으악!”

기사들이 혼비백산했다.

등 뒤로 다른 무장한 기사들이 몰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들이 올 때면 늦는다.

“마거릿?!”

카이든이 놀라서 내 쪽을 바라보더니 곧장 내 앞으로 워프해왔다.

“마거릿, 너 괜찮아?”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었지만, 일단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악어 떼들이 기사 무리를 향해 달려드는 것을 보며 나는 은지에게 마력을 나눠줬다.

“나도 너랑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지금은 아니야. 잠깐 비켜봐, 나 바빠.”

나는 카이든을 한쪽으로 치우곤 마력을 먹고 적당한 크기로 커진 은지의 머리 위에 올라탔다.

“마거릿!”

카이든의 안달난 외침을 뒤로하고 나는 다시 조명탄의 레버를 당겨 내렸다. 그런 다음 악어들을 향해 조준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피융-! 펑!

많은 수의 악어가 처치되었으나 살아남은 악어 한 마리가 근처에 있던 노엘의 망토 자락을 물었다.

“으아아악! 사, 살려주십시오!”

노엘이 악어에게 맥없이 끌려가며 공포에 질린 얼굴로 비명을 내질렀다. 제기랄.

나를 태운 은지가 강가를 향해 빠르게 기어갔다. 그리고 노엘이 강에 빠지기 직전, 가까스로 악어를 물어뜯고는 입안에 삼켜 넣었다.

우두둑.

악어를 씹는 소리가 살벌하게 들려왔다.

악어가 망토 자락을 물고 있던 탓에 노엘까지 함께 딸려왔지만 영리한 은지는 악어만 삼키고 입을 딱 다물었다.

은지의 날카로운 이빨에 망토 자락이 걸려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노엘은 은지가 고개를 휘젓자 바닥으로 떨어졌다.

‘후. 큰일 날 뻔 했네.’

나는 뿌듯한 얼굴로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손등으로 대충 닦았다. 그리고 은지의 머리 위에 탄 채로 조명탄의 탄창을 재차 확인하던 중에 주위가 매우 고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뭐지?

그 고요함 사이로 카이든이 요란을 떨며 나를 향해 소리쳤다.

“마거릿! 괜찮아?”

그가 은지의 머리 위로 훌쩍 뛰어 올라오더니 나를 들어 품에 안고는 다시 바닥으로 가뿐하게 내려왔다.

은지가 불만스러운 눈으로 카이든을 노려보다가 혼자 알아서 몸집을 축소했다. 나는 카이든의 품에서 내려와 실뱀이 된 은지를 어깨에 올렸다.

카이든이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연신 내 상태를 꼼꼼하게 체크했다.

“당연히 괜찮을 거라곤 생각했는데, 그래도 놀랐잖아.”

나는 그의 호들갑에 고개를 내저었지만, 평소의 그와 같아 보여서 웃음이 나왔다. 다행이다. 제나스의 일은 완전히 극복한 걸까.

그렇게 웃으며 천천히 몸을 돌린 난 나를 향해 검을 겨누고 있는 수십 명의 무장한 기사들과 눈이 마주쳤다.

……XX, 깜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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