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175)화 (175/234)

24. 7인의 귀환

란그리드 제국의 중앙 보병대 소속, 노엘 베넌 루티슨은 땅따먹기 같은 이 역겨운 전쟁이 하루라도 빨리 끝나기를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이번 대륙전쟁은 또다시 로말리잔 성역에서 벌어졌다. 로말리잔 1회전을 앞두고 새벽부터 일어난 노엘은 막사 앞에 술을 떠 놓고 기도를 올렸다.

그때, 지나가던 그의 동기 하이젠이 말을 걸었다.

“노엘? 새벽부터 뭐하냐?”

“보면 모르냐, 새끼야. 기도해.”

“내가 모르는 사이에 기도법이 바뀌었나 보군.”

“북방 제국에서 전해져 오는 설화야. 이렇게 기도하면 땅의 신이 기도를 들어준다더라.”

“그런 미신을 믿어? 그거 교황청에 걸리면 끝장이야.”

“교황청하고는 이미 끝장나게 싸우고 있는데 그게 중요해?”

노엘의 반박에 할 말이 없었는지, 하이젠이 결국 입을 다물었다.

그 말이 맞다. 로말리잔 성역에서 벌어지는 이 미친 전쟁은 교황청과 마법사 협회(마탑)을 필두로 란그리드 제국, 헤스티아 왕국, 그리고 북방의 공국과 제국 등 서대륙의 모든 세력이 세력 싸움을 위해 벌인 전쟁이었다.

“실종된 ‘그분’들이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건지, 정말 역사서에 길이 남을 미스터리다. 그분들이 다시 돌아와야 이 거지 같은 전쟁도 끝이 나든 휴전을 하든 할 텐데.”

노엘이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동이 트기 시작하자 분주하게 움직이는 병사들을 둘러보며 하이젠이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진짜로 신께서 데려가신 게 아니라면 그런 대단한 인물들이 어떻게 한날한시에 갑작스레 사라진 건가 싶긴 하다.”

신을 믿지 않는 하이젠이 이런 말을 하다니. 노엘이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네 놈이 웬일로 그런 소릴 하냐.”

“그냥 요즘 정세가 그렇잖아.”

하이젠의 자조 섞인 말을 노엘은 바로 공감하고 말았다.

그 순간, 막사의 입구에서 상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들 보병대 소속의 전투 지휘관 펠데임 경이었다. 완벽하게 무장하고 반듯한 자세로 선 펠데임 경이 노엘과 하이젠을 노려봤다.

“뭐 하는 거지, 경들? 전투 준비 안 하나!”

“아닙니다! 시정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지금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노엘과 하이젠은 헐레벌떡 막사를 뛰쳐나왔다.

그러나 그들은 그날, 로말리잔 성역에서 직접 목도하고야 말았다.

실종된 ‘그분’들이 거대한 신수를 타고 하늘을 찢고 나오는 장면을.

* * *

우리가 섬을 탈출한 지 일주일 가량이 지났다.

전투 한복판에 갑자기 떨어진 우리 때문에 전쟁은 휴전 상태에 돌입했다.

처음엔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 모두 눈을 비비며 눈앞의 광경을 의심하더니 급기야 전투가 중단되었다.

실종되었던 고위급 인사가 한 명도 아니고 한꺼번에 등장했기에 신분을 증명하는 절차는 간결하고 빠르게 진행됐다.

란그리드 제국의 막사로 호송된 우리는 상부의 극진한 보호를 받았다. 협소한 군영 막사지만 문명의 이기를 접하고 수많은 사람이 살아 움직이는 걸 보니, 정말로 탈출했다는 게 실감이 났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유안나와 루제프의 신력으로도 아스달의 오른쪽 눈의 상처는 복구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도 그의 눈을 제외한 모든 상처는 복구했지만.

카이든도 드디어 깨어났으나 그는 깨어난 뒤로 막사 밖으로 나오지 않고 있었다.

나는 내게 배정된 막사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일주일 내내 푹 쉬었는데, 좀처럼 체력이 회복되지 않는다.

사실 우리에게 문제는 겉으로 보이는 상처가 아니었다. 모두 후유증이 짙게 남아 휴식이 절실히 필요했다.

아스달은 헤스티아 왕국의 군영으로 곧장 가지 않고 구태여 적국이나 마찬가지인 란그리드 제국 군영에 남아 쉬고 있었다. 우리와 나눌 이야기가 많이 남았기 때문이라는데 그 배짱이 정말이지 대단했다. 덕분에 유안나와 루제프도 이곳에 머물 수 있게 됐고 카이든도 남았다.

이 전쟁에서 북방 나라의 연합군을 제외하고는 모든 세력이 서로 대립 중이다.

그러나 헤스티아 왕국, 교황청, 마법사 협회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모두 란그리드 제국의 군영에 남아 있으니 아군과 적군을 구별하는 것이 무의미해졌다.

‘……전쟁이라니.’

설마 했는데, 그 설마가 진짜가 될 줄이야.

아마도 교황청과 로하데 가문, 그리고 마법사 협회가 주도했으리라.

그때 막사 밖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노엘. 잊었어? 소문의 플로네 영애잖아!”

“그게 뭐가 중요해? 이번 일은 역사에 길이 남을 사건인 거 몰라? 소문이야 어쨌든, 저분도 역사에 이름이 남을 거라고. 지금이라도 좀 잘 보여 놔야지.”

“이야……. 내가 다 부끄러울 정도로 단순 무식한 이유다, 이 멍청이가.”

기사들이 잡담을 하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아직 이쪽 세계에선 내가 과거의 그 악독한 마거릿인 줄 알고 있겠구나.’

사실 그 악독한 마거릿도 나였으니, 받아들여야 한다. 할 말은 없었다.

“큼큼. 실례합니다, 플로네 영애.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조금 전에 호들갑을 떨어대던 남자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단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실 입맛은 없었지만, 나는 지금 사람이 고팠다. 내가 무인도를 탈출한 게 진짜라고, 이게 꿈이 아니라고. 계속해서 증명해줄 사람들이 필요했다.

“들어오세요.”

내 대답에 한 남자가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곱슬곱슬한 금발이 눈에 들어온다.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다소 앳되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마거릿 또래일 것 같다.

나는 몸을 일으키곤 침대에 걸터앉았다.

쟁반에 스튜 그릇과 물을 가져오던 남자가 내 차림을 보고 놀란 얼굴로 걸음을 멈췄다. 그가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주춤주춤 뒤로 물러난다.

“아, 저……. 아, 그게……. 죄, 죄송합니다. 준비가 아직 안 되신 줄 모르고……. 이, 이런 무례를…….”

남자는 내 복장을 보고 놀란 것처럼 보였다. 내가 아직도 워커에 카고 바지, 크롭티에 항공점퍼 차림이었기 때문이다.

군영엔 내가 입을만한 옷이 없었다. 그렇다고 귀족 영애가 기사들의 옷을 빌려 입는 건, 그들의 상식선에선 도리에 어긋난 일이었다.

하여 멀리서 옷을 공수해오기로 했는데, 그때까진 영락없이 이 옷을 입고 있어야 했다.

“죄송해요. 놀라셨죠.”

나는 민망한 얼굴로 남자를 보며 말했다. 남자가 엉거주춤 서서 나갈까 말까 매우 고민하는 얼굴로 내 눈치를 봤다.

“식사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손에 들린 쟁반을 넘겨받았다. 그러자 남자가 멋쩍은 얼굴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노엘 베넌 루티슨입니다. 편히 노엘 경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루티슨이라는 이름 어디서 많이 들어봤는데.

‘아. 생각났다.’

란그리드 제국에서 루티슨은 유명했다.

“루티슨이라면, 란그리드의 남부 지역을 주름잡는다는, 루티슨 백작 가문이군요.”

“맞습니다.”

내 말에 노엘이 쑥스러운 얼굴로 웃음을 지었다. 참 무해한 얼굴이다.

“식사는 감사해요. 잘 먹을게요. 그리고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나는 말끝을 흐리며 노엘의 안색을 살폈다. 그는 무엇이든 물어보라는 얼굴로 초롱초롱 눈을 빛내고는 나를 쳐다봤다.

다행히도 그가 내게 가진 감정이, 편견보다는 호기심이 더 큰 모양이었다. 그래서 나는 귀환하자마자 줄곧 묻고 싶었던 질문을 했다.

“우리 가족은……. 그러니까, 플로네 가문의 사람들은 모두 무사한가요?

노엘의 얼굴이 일순 흐려졌다. 그는 매우 안타까운 얼굴을 하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거릿에 대한 평판은 알지만, 일단 ‘실종되었다가 막 돌아와서 상황 파악을 못 한 것 같은 마거릿’은 불쌍히 여기는 것처럼 보였다.

“플로네 가문은 무사히 건재합니다. 백방으로 영애를 찾고 계시는 것 같았습니다. 영애가 사라지고서 지금까지 계속해서 말입니다.”

그 말에 나는 안도했나?

사실 모르겠다. 이건 보다 복잡한 감정이다.

마거릿의 가족은 단란한 편이었다. 이진주로서의 내가 지금껏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종류의 그런 따뜻함이다. 하여 그 간극에서 오는 충돌은 내게 혼란스러움을 더했다.

“아. 플로네 공작께선 병중이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네? 아버지께서요?!”

내가 놀라서 되묻자 노엘이 당황한 얼굴로 내 눈치를 봤다.

“그, 그게……. 영애께서 실종되시고 나서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앓아누우셨다는 소문만 들었습니다. 실제로 황궁에 입궁도 하지 않고 공작저에만 칩거하신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지 말입니다.”

플로네 공작, 그러니까 아버지가 앓아누웠다는 말은 어쩌면 소문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마음이 여리시고 다정한 분이라 더더욱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오히려 대장부 같은 어머니와 언니들이 눈에 불을 켜고 나를 납치한 범인을 찾아내고 있을 것이다.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고는 웃음이 나와서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말았다. 노엘이 그런 내 얼굴을 신기한 듯이 빤히 바라봤다.

“왜 그래요?”

“아, 아닙니다…….”

그가 당황한 얼굴로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 스튜가 식겠습니다. 얼른 식사하십시오. 저는 그럼 이만…….”

노엘은 많이 당황했는지 계속해서 허둥지둥하더니, 식사나 하라며 테이블 위에 올려둔 쟁반을 가리키고는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아니, 왜 뒷걸음질로……?

그런데 그가 막 막사를 나가려는 찰나에 그의 발밑에 걸리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실뱀의 모습으로 돌아온 은지였다.

“이게 뭐……. 으, 으악……!!”

은지가 똘망똘망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일입니까!”

막사 앞에 대기하고 있었던 건지 짙은 남색 머리카락의 기사 한 명이 막사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영애! 괜찮으십……!?”

그는 곧, 바닥에 쓰러진 노엘을 발견하고는 한심하단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그리고는 각 잡힌 동작으로 절도 있게 내게 고개를 숙였다.

“실례했습니다, 하이젠 버든 퍼레스입니다. 제 동료의 무례는 너그러이 용서해주십시오. 저 녀석은 어떻게 이 험한 전쟁터까지 끌려왔는지 모를 정도로 간이 콩알만 합니다.”

단정한 외모의 남자, 하이젠은 군더더기 없는 동작과 깔끔한 화법으로 내게 양해를 구했다.

“하이젠 너……!”

노엘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손가락질하는 걸 보니, 두 사람이 친구인 모양이다. 그 사이 호기심 많은 은지가 그들 앞을 기웃거리다가 흥미가 떨어졌는지 내게로 쪼르르 기어 왔다.

표정 없는 얼굴로 덤덤하게 서 있던 하이젠도 조금 놀란 듯이 은지를 바라봤다.

“혹시 그 뱀이 영애께서 타고 왔다던 신수인 겁니까?”

하이젠의 물음에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은지가 신수라니, 마물이면 몰라도. 하지만 구태여 쓸데없는 말을 덧붙일 필요는 없어서 나는 그저 웃기만 했다.

내가 말을 아끼자 그들도 더 물어보기는 민망했던지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혹시 카이든……, 아니 로드는 어느 막사에 있나요?”

나는 은지를 어깨 위에 올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대답한 건 하이젠이었다.

“아, 함께 돌아오신 란그리드 제국의 마탑주님을 말씀하시는 게 맞습니까? 그분이라면 지금 만나지 않으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왜죠?”

내 물음에 이번엔 노엘이 곤란한 얼굴을 했다.

“그게……. 상태가……. 좋지 않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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