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174)화 (174/234)

* * *

나는 아나타를 제나스의 시신이 있는 오두막 앞마당으로 안내했다.

그곳엔 상처 가득한 제나스의 몸이 피웅덩이위에 쓰러져 있었다. 숨은 이미 끊어진 뒤였다.

제나스를 죽이기는 힘들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그 대단한 마법사도 불완전한 데가 있는 사람이었던 걸까.

아나타는 비척거리는 걸음으로 제나스의 앞에 다가가 주저앉았다. 우리는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정확히는 카이든을 들쳐 업은 디에고를 제외하고는 그녀를 경계한 채 서 있었지만.

아나타의 어깨가 떨렸다. 그녀가 흐느껴 울고 있었다. 한참 동안 그렇게 울던 아나타가 엉망인 얼굴을 하고는 고개를 들었다.

“펜던트는?”

그때 아나타가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펜던트를 꺼내지 않은 채로 대답했다.

“다시 물을게요. 정말 몰랐어요? 탈출문을 열면 안 된다는 사실이요.”

그녀는 대답할 의지를 상실한 사람처럼 힘없이 나를 쳐다봤다. 이윽고 아나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야. 하지만, 내가 아무리 말한다고 한 들 믿을 수 있겠어?”

“……당신이 왜 우리를 도왔는지 납득 가능하면, 믿을 수 있겠죠.”

내 말을 들은 아나타는 디에고가 한 팔로 들쳐 업고 있는 카이든을 쳐다봤다.

카이든은 아까 쓰러진 이후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과도하게 힘을 쓴 탓인 것 같았다.

“나도 내가 인간 말종이라는 거 알아. 하지만 더 이상은 나도 너희를 설득할 자신이 없어. 설득이 되겠니? 내가 이 망할 실험의 설계자인 걸.”

아나타는 해명 같은 건 할 의지도 없다는 듯 죽일 테면 죽여보란 듯이 나를 쳐다봤다.

어쩌면 그녀의 말이 정말로 사실일지도 몰랐다. 제나스라면 아무리 자신의 누이라고 해도 배신한 이에게 자기가 파놓은 함정을 말해주지 않았을 것 같기는 했다.

“그래, 그 말이 설득이 되겠나. 당신이 이 망할 실험의 설계자 중 하난데.”

아스달이 분노에 찬 얼굴 대꾸했다. 그는 티셔츠를 찢은 천으로 눈을 가리고 있었는데, 유안나의 신력 덕에 피는 멎은 것 같았다.

에녹도 여전히 아나타를 향해 검을 뽑아든 채로 살벌하게 말했다.

“내가 지금 그대를 죽이지 않고 있는 건 탈출 방법을 아는 사람이 그대뿐이기 때문이다.”

아나타가 괴로운 얼굴로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그래도 믿어주면 좋겠어. 섬을 설계하고 진행한 건, 나와 제나스지만 우리 둘이 독자적으로 이끌어간 실험은 아니야. 다른 세력과 여러 마법사가 있었어. 함께 섬에 온 다른 마법사들은 버티지 못하고 전부 죽었지만.”

“…….”

그래. 예상은 했다. 이 실험엔 교황청과 로하데 가문이 개입하지 않았나. 우리를 이곳에 보내는 데 협력한 사람들이 또 있을 거라고 예상 못했던 건 아니다.

‘함께 온 사람들은 다 죽었어. 그래서 혼자야.’

꼬마 제나스를 처음 만났을 때, 그가 내게 그런 말을 했었다. 그는 분명 함께 온 ‘사람’이 아니라 함께 온 ‘사람들’이라고 표현을 했었지.

제나스의 오두막은 두 사람이 지내기엔 지나치게 넓었다. 최소 10명은 지낼 수 있을 만한 크기에 방도 지나치게 많았다.

거기다가 한두 명이 아닌, 제법 많은 사람이 지낸 것처럼 너저분하지 않았던가.

“밖에 있는 그놈들은 천년 동안 대대로 이 실험을 후원하며 실험에 반하는 이는 죽이고 이를 아는 사람도 죽이고, 그런 짓을 반복해왔어. 물론 실험의 주도자인 제나스가 그 세력을 모두 관리해왔기에 가능한 일이었지.”

천년 동안 그런 짓을 해왔다니. 인간의 추악한 욕망, 잔혹함의 가능성이 어디까지인지 새삼스러웠다.

아나타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그들은 제나스를 신처럼 여기고 떠받들었어. 천 년이나 살고 있는 대마법사잖아. 그러지 않고 배겨? 그러나 제나스는 떠받듦에 취해 실험을 성공만 시키면 천년의 세월을 보상받을 수 있다 자신했지만, 내 생각은 달라. 이 실험은 결국 밖에 있는 ‘그놈들’ 좋은 일만 하는 거야.”

“그 세력이 교황청과 로하데 가문인가요?”

내 물음에 아나타가 잠시 곰곰이 생각을 정리하는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한참 뒤에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 외에도 더 있어. 너희는 모두 너희와 가까운 이들에게 배신당해 이곳에 온 거야. 뭐, 꼭 그렇지 않은 이도 있지만.”

아나타가 마지막 말을 하며 나를 쳐다봤다.

아니, 그럼 나는 배신당하지도 않았는데 이 섬에 끌려왔다는 건가? 운도 더럽게 없이?

화가 치밀어서 숨이 막혔다. 지금까지 이 섬에 영문도 모르고 끌려와 한 갖은 고생들이 떠올라서.

“섬에서 나가면, 거미줄에 걸린 모란 꽃 문양. 그걸 찾아. 그게 그 세력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증표니까.”

이야기를 마친 아나타의 시선이 이제 카이든을 향했다. 카이든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이 어쩐지 의미심장하다.

의아해서 그녀를 따라 카이든을 살펴보았지만 특별히 이상한 점을 찾을 순 없었다.

다른 일행들은 모두 아나타의 말에 충격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곧 모두의 시선은 나에게로 다시 모였다. 내가 할 말을 기다리는 듯했다.

나는 다시 아나타에게 물었다.

“……섬을 탈출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뭔가요? 성녀님도 탈출할 수 있는 게 맞죠?”

“섬이 파괴되면, 영혼을 묶는 게 의미가 없어지니 당연히 성녀님도 탈출 가능해. 그리고 탈출 문을 억지로 열고도 워프 게이트가 정상 작동하게 하려면 그걸 능가할 힘이 필요해.”

“잠까만요, 제가 정말, 정말로 나갈 수 있나요……?”

유안나가 끼어들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요란하게 떨리고 있었다. 목이 메는지 잠시 입가를 가린 그녀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아나타를 바라봤다.

아나타가 고요하게 유안나를 응시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갈 수 있어. 그렇게 해줄게.”

멍하니 있던 유안나가 복잡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직도 그 말이 온전히 믿기지는 않는 모양이다.

“애초에 희망 같은 건 갖지도 않았어요. 그러면 나중에 더 힘드니까…….”

나는 옆에 서 있던 유안나의 손을 조용히 잡았다. 나를 바라본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랫입술을 깨문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가만히 우리를 지켜보던 아나타가 입을 열었다.

“주교님이 몸 안에 담고 있는 원혼들, 아직 성불 안 했잖아. 그 원혼들을 꺼내. 그것들이 섬을 파괴하는 걸 도와줄 거다. 나는 펜던트의 봉인을 풀고 워프 게이트를 열어 너희가 섬을 탈출할 수 있게 도울게.”

모두의 이목에 루제프에게로 집중되었다.

루제프는 이 순간을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덤덤히 대답했다.

“……당신이 살기를 바라는 건 아닙니다만, 알고는 계십시오. 아시겠지만 원혼들을 밖으로 꺼내면 그들이 당신을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

“…….”

“그들의 힘은 당신이 아는 것보다 강합니다. 펜던트의 봉인을 풀고 그 마력을 취하더라도 원혼들을 당해내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말했잖아. 내 목적은 너희를 탈출시키는 거야. 실험은 실패했고 나는 어차피 지옥에 떨어질 거야. 배려는 필요 없어.”

아나타의 마지막 되물음에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잠시 짧은 침묵이 흘렀다.

천년 동안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갖고 장난질을 친 사람이다. 하여 그녀를 동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시 바라본 아나타의 붉은 눈동자엔 생기가 없었다. 삶의 의지를 전부 포기한 사람 같기도 했다.

루제프의 말대로라면 아나타가 펜던트의 마력을 취하고 마음이 바뀌어 우리를 배신한다 하더라도, 걱정은 없을 것 같았다.

사실 지금은 아나타에게 펜던트를 건네는 것 말고는 다른 수가 없었다.

오랜 고민을 끝낸 루제프가 조용히 펜던트를 쥔 내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쳐 올렸다.

“걱정 마십시오. 원혼들의 분노는 상상 이상이거든요. 그들을 몸 안에서 해방시키면, 곧장 섬이 무너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워프 게이트가 열리면 바로 그곳으로 뛰는 게 좋겠습니다.”

루제프의 말을 듣고 나는 팔뚝에 매달려서 호기심 어린 얼굴로 고개를 기웃거리는 은지를 쳐다봤다. 여차하면 기동력이 좋은 은지를 타고 워프 게이트를 통과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펜던트는 제나스가 아니면 봉인을 풀 수 없는 것 아니었나요?”

“이게 뭔지 알아? 이건 제나스의 ‘육체’가 아니야. 영혼 조각이자, 그가 가진 마력의 일부지. 그의 영혼과 접촉하여 펜던트를 열 수 있다.”

아나타가 제나스의 사체를 가리켰다. 하긴 제나스라면 저 사체가 가짜였다 해도 납득이 가능할 정도니까.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그녀에게 펜던트를 넘겼다.

“다들 물러나.”

펜던트를 받아든 그녀가 속삭이듯 말했다. 우리는 천천히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사위가 고요해졌다.

아나타가 제나스의 피를 찍어 펜던트에 박힌 눈물방울 모양의 자수정 위에 내리눌렀다. 이윽고 펜던트의 위로 새하얀 불빛이 떠오르며 마법 수식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펜던트의 봉인을 해제하는 마법 수식인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본 루제프가 잠시 심호흡을 하더니 눈을 감았다. 몇 마디 입속말을 중얼거리는가 싶더니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이건 원혼들이 루제프의 몸 안에 봉인되던 날, 그리고 오두막 앞에서 봉인이 풀리며 마력이 개방되었던 때와 같은 현상이었다.

번쩍-!

번개가 하얗게 내리쳤다.

루제프의 긴 머리카락이 거센 바람에 휘날렸다. 에녹이 조심스레 나를 잡아당겨 보호하듯 뒤에서 끌어안았다.

이윽고 거센 돌풍과 함께 천둥소리가 들려오곤 다시 한 번 여러 번의 번개가 내리쳤다.

[아아아--!!]

해방을 알리는 커다란 목소리들이 하늘을 웅웅 울렸다. 꼭 마치 수십 명이 동시에 같은 소리를 낸 것처럼 기괴했다.

루제프의 몸에서 새하얀 빛이 뿜어져 나왔고 이어서 하늘에서 내리친 번개가 아나타에게 꽂혔다.

그건 꼭 신벌 같기도 했다.

지지직- 화르륵!

아나타의 온몸이 불에 활활 타올랐다. 그녀가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불길 사이로 사라진 아나타의 얼굴을 더는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아나타를 공격하던 번개가 갑자기 카이든에게도 내리치기 시작했다. 아니, 갑자기 카이든에게는 왜?!

“카이든!!”

나는 황급히 카이든을 업고 있는 디에고에게로 달려갔다.

카이든은 아나타처럼 불길에 휩싸이지는 않았다. 에녹이 나를 대신해서 카이든의 상태를 살폈는데,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아나타와 다르게, 원혼들의 목적이 카이든이 아닌 다른 무언가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기이한 점은 그 번개가 디에고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거다.

“이보게! 게이트가 열린 것 같네!”

그때 아스달이 서쪽 부근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의 말대로 서쪽 하늘에 거대한 돌풍이 불며 꼭 블랙홀처럼 뭔가가 생겨나고 있었다.

나는 땅이 거세게 진동하는 걸 느끼며 은지에게 마력을 나눠줬다. 은지의 몸이 차차 부피를 키웠고 이내 거대한 아나콘다의 형상을 갖추었다. 은지의 머리 위로 훌쩍 올라간 나는 일행을 불렀다.

“모두 여기 타요!”

디에고가 아나타의 곁을 떠나지 못하는 유안나를 끌고 오는 게 보였다.

일행들을 은지의 머리 위에 태우고 나는 아나타 쪽을 돌아봤다. 아나타는 여전히 불길 속에 잠겨 있었다.

그때 아나타의 마법 수식 발현이 끝났는지, 불길 위로 떠오른 펜던트에서 마법 수식들이 화려하게 회오리쳤다.

그것들은 곧 이 일대를 장악하며 커다랗게 퍼졌다.

일순 모든 소리가 소거된 상태가 되었다.

잠시 뒤에 거대한 빛과 함께 땅이 진동했다. 정말로 섬이 붕괴되기 시작한 것 같았다.

불길 속에서, 아나타의 꺼져 가는 목소리가 허공을 웅웅 울리며 들려왔다.

[문을 열었으니, 지금 당장 나가. 그리고 우리 후손님한테 이 말만 전해줘.]

은지를 타고 막 떠나려던 찰나 그녀가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살아줘서 고맙다.]

그 말을 끝으로 그녀를 감싼 불길이 더욱 활활 치솟아 올랐다. 요란한 번개들이 연속해서 아나타를 감싼 불길 위로 내리꽂혔다.

번개는 아나타뿐 아니라 카이든에게도 계속해서 내리꽂혔다. 카이든의 앞뒤로는 나와 에녹이 앉아 있었는데 역시 우리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았다.

대체 카이든에게 왜 이러는 거지?

“크흑.”

그때 카이든이 고통스러운 신음을 뱉었다.

루제프 또한 당황해서 번개를 멈추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번개는 집요하게 카이든을 공격했다.

“생명의 지장은 없는 것 같으나, 계속되면 위험할 것 같군.”

에녹이 카이든의 상태를 확인하며 말했다.

“빨리 나가는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루제프의 외침에 나는 은지를 서둘러 재촉했다.

땅이 갈라지며 지진이 일었다. 바닷가 쪽에서는 거대한 쓰나미가 밀려오고 있는 듯했고 땅이 침수되고 있었다.

섬의 서쪽 부근에는 계속해서 블랙홀이 만들어지고 있었는데, 잠시 뒤에 그 앞으로 문이 생겨났다. 워프 게이트처럼 보였다. 우리를 태운 은지가 빠르게 그곳으로 향해 기어갔다.

그러나 게이트로 향하면 향할수록 마력의 파장이 거세졌다. 우리는 모두 온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듯한 고통을 겪었다. 이대로는 워프 게이트에 닿지도 못하고 죽겠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갑자기 은지와 우리를 감싸며 새하얀 보호막이 겹겹이 형성되었다.

“보호 마법이 걸렸네! 저 마법사가 도와주겠다는 약속을 지키는 것 같군!”

뒤편에 앉아 있던 아스달이 나를 향해 외쳤다.

[파괴한다!!!]

신이 난 듯한 원혼들의 광기 들린 목소리를 끝으로 우리는 거대한 모습을 한 은지를 탄 채로 게이트를 통과했다.

그와 동시에 섬이 완전히 폭발했다.

게이트를 완전히 빠져나가고 나자 카이든도 더는 원혼들의 공격을 받지 않았다.

* * *

그렇게 우리는 꿈에도 그리던 란그리드 제국으로 돌아왔지만, 다소 사소한 문제가 있었다.

우리가 떨어진 곳이 하필이면 란그리드 제국, 헤스티아 왕국, 그리고 교황청 세력과 북방 제국들의 전투가 한창 중인, 전장 속이었다는 점이다.

거대한 아나콘다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걸 보고 병사들이 난리가 난 것은 당연히 말할 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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