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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173)화 (173/234)

“말도 안 돼. 그 녀석이 정말로 죽었다고?”

아나타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연신 같은 말을 되풀이하며 고개를 저었다. 제나스가 죽었다는 것이 쉽게 믿겨지지 않았다.

천 년 동안 그들이 어떻게 살아남았는데, 그렇게 쉽게 죽었다고? 그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제나스라면 최악의 순간에도 제가 살아남을 구실 하나는 남겨뒀을 마법사였다.

아나타는 가슴 한쪽이 텅 빈 것 같은 공허함을 느꼈다.

그녀의 최종 목적은 그녀의 후손과 피실험자들을 탈출시키는 것이었다. 그 목적에 제나스의 죽음 같은 건 없었다. 당연히 그가 죽을 리는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나는 정말 괜찮나?’

아나타는 스스로에게 자문했다.

그러나 답은 나오지 않았다.

마지막 피실험자들을 탈출시키려 애쓰며 천년의 계획이 무너지는 것 정도는 각오했다. 그러나 천년 동안 함께해온 동생의 죽음까지 생각한 적은 없어서 더 공허했다.

아니 이건 허무다. 그래. 허무했다.

그녀가 그럴 자격이 없다는 건 알지만, 제나스의 죽음으로 그녀 자신의 존재마저 부정당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제나스의 시신은? 어디 있어?”

아나타가 힘없는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 피로 범벅이 된 아스달이 마거릿 대신 대꾸했다.

“그걸 알면 뭐가 달라지나? 왜, 복수라도 하려고?”

아스달의 말을 들은 아나타가 멈칫했다.

“복수……? 이게 그런 단어 하나로 정의될 감정인가.”

그녀는 허탈한 얼굴로 대답하고는 웃음을 터트렸다. 속이 텅 빈 깡통처럼 헛헛한 웃음이었다.

한참 동안 그렇게 미친 사람처럼 웃던 그녀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나스가 있는 곳에 데려다 줘. 이 문을 여는 게 함정이라면, 문을 여는 다른 방법도 있어.”

“다른 방법이요?”

마거릿이 불안한 시선으로 아나타를 바라봤다. 그러나 아나타는 단호했다.

“제나스에게 데려다 주면, 그때 설명해줄게. 그 방법이면 우리 성녀님도 함께 나갈 수 있을 거야. 제나스가 한 번은 눈속임으로 나를 속였을지 몰라도 두 번은 없어. 이 섬의 시스템을 구축한 건 나야.”

유안나는 아나타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미간을 좁혔다.

“다들 저를 섬에서 탈출시켜주려고 하는 건 고마워요. 하지만, 저 때문에 모두의 탈출이 늦어지게 할 수는 없어요. 이미 각오했던 일이고요.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탈출이 가능한 최선의 방법을 찾아주세요.”

묵묵히 대화를 듣고 있던 디에고가 유안나의 말에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나섰다.

“저는 성녀님을 이곳에 두고 갈 수 없습니다. 성녀님께서 남으시겠다면, 저도 함께 하겠습니다.”

그의 강경하고도 단호한 어조에 유안나가 당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러자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던 아나타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우리 성녀님 살리자고 먼 길 돌아가는 거 아니니까, 그렇게 분위기 잡지 말고.”

아나타의 말에도 유안나와 디에고의 심각한 얼굴은 풀릴 줄 몰랐다.

“좋아요. 그럼 일단 가죠.”

마거릿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에녹의 검 끝이 아나타의 목덜미 앞에 위협적으로 닿았다.

“허튼 수작은 부리지 말도록.”

“어차피 너희도 달리 다른 방법이 없는 거잖아.”

아나타의 대답에 마거릿은 결국 얌전히 그녀를 제나스가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아나타는 마거릿을 따르며 디에고에게 업혀 있는 카이든을 쳐다봤다.

카이든의 귀에 걸린 귀걸이가 찰랑거리며 별스럽게 반짝였다.

모두 다른 데 정신이 팔려 카이든의 귀걸이 신경 쓰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나타는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카이든의 귀걸이가 잠시간 반짝거린 것을 못 본 척 했다.

* * *

깊은 어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심연 속에서 제나스가 눈을 떴다.

제나스는 자신이 눈을 뜬 이곳이 어디인지 알았다. 카이든의 몸 속이다.

마법사들은 육체 안에 영혼이 깃드는 공간을 따로 만들어낼 수 있는 데, 이곳이 바로 그곳이었다.

극히 소량이지만, 그의 영혼 조각의 일부가 카이든의 몸 안에 남아 있었다.

그가 자신의 영혼을 모래알처럼 잘게 쪼갠 뒤에 카이든의 육체를 차지했던 덕분이다. 본디 모래처럼 작은 알갱이들을 완벽히 소거하는 건 어려운 일이니까. 어느 정도 기대했던 전개다.

‘남아 있는 힘도 얼마 없는데,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제나스는 그의 마지막 기억을 떠올렸다. 떠올린 기억 끝엔 마거릿이 있었다.

백금발의 찬란한 머리카락, 보석처럼 영롱한 푸른색 눈동자. 신비로운 얼굴.

‘젠장, 아직도 정신 못 차렸군.’

그 기억이 성가시게 어른거렸다.

그의 실험을 망친 원흉이라서 그렇다. 그래서 자꾸만 생각이 나는 모양이다.

“깨어났냐?”

익숙한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제나스는 그제야 어둠 속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의 시야 끝에는 팔짱을 낀 카이든이 가부좌 자세를 하고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카이든은 자신의 오른쪽 귀에 걸린 귀걸이를 가리키며 그에게 말했다.

“네 녀석이 죽었는데도 귀걸이가 계속해서 작동하더군. 뭔가 이상하다 싶었어.”

제나스는 별다른 반응 없이 덤덤하게 그의 말을 들었다. 카이든은 가만히 그의 표정을 살피다가 말을 이었다.

“정말 잘게도 부수어 놨던데. 영혼을 그렇게 작은 단위로 쪼갤 수 있다는 이야기는 태어나서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데…….”

“당연히 들어본 적이 없겠지. 나를 능가할 마법사는 지금까지 없었을 테니까. 네가 조금 전에 밖에서 죽인 건, 내가 쪼갠 영혼 조각의 일부야.”

제나스가 오만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재수없었지만 그가 역사서에 길이 남을 대단한 대마법사라는 건 사실이었기 때문에 카이든은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고요한 얼굴로 제나스를 보던 카이든이 입을 열었다.

“너, 마거릿 좋아하지.”

“……뭐?”

제나스가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그 무구한 표정을 보고 카이든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거 완전 자각조차도 못하고 있잖아?”

이유 모를 조롱에 심기가 뒤틀린 제나스는 입매를 비틀며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어린 것이 건방지게.

“짜증날 정도로 흥미로운 여자지. 그런데 좋아한다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그가 신경질적인 투로 반박했다. 그러자 카이든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젓더니, 마치 떠보듯이 과장된 말로 그를 나무랐다.

“아아, 너도 안 되겠다. 그냥 평생 그렇게 자각 못 하고 살아. 어차피 마거릿은 내 것이니, 관계없겠군. 너 같은 끔찍한 게 마거릿을 좋아한다니, 가당키나 해?”

……마거릿이 자신의 것이라니. 제나스는 결국 카이든의 말에 참지 못하고 말을 얹었다.

“마거릿이 물건도 아니고, 우리 후손님은 좋아하는 상대를 그렇게 물건 취급하나? 그녀가 들으면 불쾌해하겠군.”

“쯧. 불쾌해하는 건 조상님 당신 아니시고요? 좋아하는 거 맞잖아. 넌 마거릿 살리려고 천년의 계획도 포기한 머저리 아니냐?”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영혼을 남기는 데 성공했는데도 계획을 포기한 걸로 보이나. 우리 후손님은 시야가 참 좁군.”

카이든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제나스는 제가 말을 해놓고 돌연, 지금쯤이면 마거릿이 아나타와 함께 있을 거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마거릿은 괜찮을까.

지금껏 그는 누군가 죽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 삶을 살아왔다. 피실험자의 목숨이건 동료 마법사들의 목숨이건, 어차피 전부 그의 계획을 위한 거름일 뿐이었으니까.

그런데 어째서 저는 마거릿의 걱정 따윌 하고 있는가.

제나스는 짜증스럽게 머리를 헤집다가 카이든이 그를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빠르게 표정관리를 했다.

“이봐, 후손님. 넌 날 죽일 수 없어. 순순히 이 몸에서 나가줄 생각도 없고. 방법만 찾으면, 언젠가 내가 네 몸을 차지할 거다.”

지금 당장이 아니더라도 힘을 회복하면 가능할 거다. 제나스는 확신했다. 거기다가 아직 펜던트가 남아 있지 않은가.

“지금 여기 있는 게 자의는 아니지? 수면 상태에 접어든 게 우리 후손님 의도가 아닐 텐데.”

그의 빈정거림에 카이든이 인상을 구겼다. 정곡을 찔린 모양이다.

제나스는 내심 안도했다. 카이든을 조종하는 귀걸이가 아직 정상 작동하는 모양이다. 귀걸이에 연결되어 있는 그의 영혼이 살아있는 한, 그것은 카이든이 죽을 때까지 계속 작동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현재 제 영혼의 기운이 매우 미약하다는 건 느껴졌다. 육체가 없는 영혼 상태라 심장 같은 게 있지는 않을 테지만.

그는 잠시 심호흡을 하고 다시금 카이든을 바라보며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깨어나고 싶지? 그런데 넌 못 깨어나. 내가 여기 있는데 어떻게 육체를 너 혼자 온전히 차지하겠어. 나와 나눠 쓰면 모를까.”

카이든은 예사로운 태도로 제나스를 보다가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인내심 싸움을 하자는 거냐? 영혼 알갱이가 몇 개가 남아 있든 간에, 지금 네 힘을 보니 극히 소량인 건 확실히 알겠어.”

카이든이 두 손을 벌려 마법 수식을 그렸다. 그의 발밑으로 새하얀 빛과 함께 점차 마법진이 생성됐다. 그가 매섭게 날이 선 눈으로 제나스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내 몸 안에 퍼져 있는 네 영혼 조각을 다 없애진 못하더라도 하나를 죽일 때마다 네 힘은 계속해서 감소하겠지.”

그의 말이 맞다. 하지만, 제나스라고 얌전히 그의 공격에 당해줄 생각은 없었다.

“네가 일어나지도 못하게 몇 개든 전부 박살을 내주지. 아니면, 내가 널 먹어치워 내 몸의 일부로 온전히 흡수해버리든가.”

“흠. 그렇게 되면 우리가 완전히 한 사람이 되는 건가? 내가 네 조상이고 넌 내 후손이니 어차피 핏줄도 같겠다, 그것도 나쁘지 않은 결말인데. 그럼 이렇게 싸울 필요가 있어? 이 안에서 싸워봐야, 네 몸에 좋은 일은 아닐 텐데.”

“내가 널 아무런 제약 없이 살려줄 것 같냐? 재기불능 상태로 만들어 계약 마법이라도 하려고 한다, XX야.”

카이든의 발밑에 그려진 마법진에서 거대한 회오리바람이 생성됐다. 그것은 곧 매섭게 요동치며 움직이더니 빠르게 제나스를 집어삼켰다.

그러나 그게 제나스에게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제나스의 몸이 입자가 고운 모래로 잘게 부서지면서 바람처럼 카이든에게로 날아왔다. 카이든의 코앞에서 다시 뭉쳐진 형체가 곧장 바로 앞의 얼굴에 주먹을 내리꽂았다.

“마법 쓸 생각 하지 마.”

제나스는 카이든이 마법 수식을 만들어낼 수 없도록 그의 팔을 누르곤 카이든의 다리 아래로 마법진을 만들어냈다.

“제길……! 이거, 놔……!”

“우리 후손님, 말했잖아. 날 능가할 마법사는 세상에 없다고.”

제나스가 카이든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그렇게 카이든을 속박하려 할 때였다.

갑자기 어디선가 번개가 내리쳤다.

그 번개가 카이든의 몸 속을 관통하고 들어와 그들이 대립 중인 영역까지 침범했다. 날카롭게 벼려진 번개가 제나스에게 내리꽂혔다.

무슨 영문인지 번개는 카이든의 영혼에는 영향을 주지 않고 연속해서 제나스만을 향해 내리쳤다.

“크흑! 이게 대체……!”

안 그래도 미약해진 영혼으로 카이든을 상대하며 한 차례 힘을 쓴지라 의문의 번개 공격은 그에게 배로 큰 타격을 입혔다. 제나스가 결국 고통을 호소하며 쓰러졌다.

그 모습을 보며 카이든은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웃음을 지었다.

밖에서 분명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모양이다.

이 번개,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잘됐네. 넌 이제부터 나한테 종속되는 거야. 네가 대단한 마법사면 뭐하냐. 최후는 이렇게 초라한데.”

카이든이 발을 굴렀다. 그의 발밑과 쓰러져 고통을 호소하는 제나스의 밑으로 마법진이 만들어졌다.

어차피 모래알처럼 조각 난 영혼을 다 소거해 버리는 게 불가능하다면 그의 몸속에서 설치지 못하도록 제 안에 종속시키는 수밖에 없다.

카이든은 짐짓 과장되게 엄숙한 표정을 하고 제나스에게 속삭였다.

“지금부터 계약을 시작한다. 영원히 고통받게 해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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