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168)화 (168/234)

“XX, 너 뭐야.”

카이든은 재빨리 마법진을 구동시켰지만 발현에 실패했다. 마법이 금방 풀려버렸기 때문이다.

귀걸이가 못 버틸 정도로 화끈거렸다. 요란하게 들끓던 마력이 귀걸이가 내뿜는 괴이한 파장에 의해 흐트러졌다.

그렇게 그의 속 안을 거칠게 휘젓는 힘에 휩쓸린 그가 울컥 피를 토해냈다.

쿨럭, 쿨럭.

카이든은 자리에 주저앉아 바닥에 피를 한 덩이 뱉고는 깊게 심호흡을 했다.

그런 그의 앞으로 성인 남성의 것으로 보이는 깔끔한 흰색 신발 한 켤레가 우뚝 섰다.

“그간 고생이 많았다.”

언뜻 쓰러진 그를 격려하는 것처럼 들리는 목소리엔 권태로운 기색이 역력했다.

카이든은 어지러운 정신을 애써 부여잡았다. 이대로 한심하게 정신을 놓아버릴 수는 없었다.

눈이 붉게 충혈된 채 이를 악물며 버티며 그가 고개를 들었다. 귀걸이를 떼어낼 수 없으니, 차라리 귀를 통째로 뜯어내는 게 낫겠다 싶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마력 때문에 튕겨나가 손을 쓸 수조차 없었다.

“나한테 무슨 X수작을 부린 거야.”

“흠. 그 힘을 버텨? 생각보다도 더 대단하네. 우리 후손님, 아주 훌륭하게 자랐어.”

제나스의 감탄에 욕설로 받아칠 힘조차 없었다.

카이든이 기어코 바닥에 쓰러졌다.

그러자 제나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어깨를 발로 밀어 바닥에 누르고는 오만한 얼굴로 웃음을 지었다.

“천년 동안 먹지 않아도 살 수 있고 시간이 흘러도 늙지 않은 몸을 만들기 위해 나는 흑마법에도 손을 댔어. 그 대가로 지금보다 더 큰 마력을 담기엔 육체가 좀 부실해. 그래서 너 같은 젊고 뜨거운 피를 가진 몸이 필요했지.”

제나스는 차근히 카이든의 몸을 훑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마치 상품을 평가하듯이.

“로하데 가문의 핏줄 중, 너처럼 나와 상성이 잘 맞는 아이는 없었다. 마력의 양, 그걸 소화하는 능력, 단단한 육체. 이보다 내가 쓰기에 완벽할 몸이 있을까.”

제나스가 카이든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그가 카이든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카이든을 똑바로 마주 보는 제나스의 붉은 눈동자에 복잡한 마법 수식들이 지나가기 시작했다.

‘XX! XX!!!’

카이든은 제나스의 시선에 온몸이 마비되어 가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든 그에게 지배당하지 않기 위해 버텼지만, 오랜 세월 이 순간을 위해 덫을 놓은 이를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제나스의 몸이 모래알처럼 잘게 부서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곧 바람에 휘날리며 카이든의 몸 안으로 흡수되어갔다.

제나스가 카이든의 몸 안으로 흡수될수록 카이든의 시야도 차차 흐려졌다. 아무래도 그의 몸을 차지하기 위해 영혼을 모래알처럼 조각내어 들어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제기랄, 이 빌어먹을 귀걸이를 선물해준 놈이 누구더라.’

아, 그래. 생각났다. 더러운 핏줄이라며 로하데 가문에서 핍박받던 그의 배다른 형, 헤럴드가 선물한 귀걸이였다.

헤럴드만큼은 로하데 가문 사람들과 관계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내가 안일했군.’

카이든은 이를 악물고 분노를 삼켰다.

‘망할 XX들을 전부 X치기 전엔 절대로 안 죽어.’

반드시 복수를 하고 말 것이다. 그의 인생이 로하데로 시작해서 로하데로 끝나게 만들 수는 없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살 수 있댔어.’

마거릿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그래. 정신만 차리면 된다. 정신을 차리고 방법을 찾자.

어느 순간 카이든의 붉은 눈에서 생기가 사라졌다.

* * *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건, 제나스가 남긴 개소리뿐이었다.

‘본래의 모습으로 너와 대화를 좀 나누고 싶었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네. 우리끼리 따로 좀 빠질까?’

진짜 X자식이 어디서 그런 X수작을.

제나스는 나를 납치했을 것이다. 그럼 나는 지금 그의 오두막 안에 있는 걸까?

어쩌면 아나타가 봉인되었던 안식의 방에 이번엔 내가 갇혀버린 걸지도 모르겠다.

나는 바닥에 그냥 누워 어두운 천장을 올려다봤다. 사실 시야에 들어오는 저게 천장인지도 잘 모르겠다. 그냥 어둡고 어두운 심연 같았다.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아무래도 마법에 의해 속박을 당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문제를 해결할 의지조차 상실해서 나는 힘없이 누워 있었다.

피곤해.

나는 그저 살아남고 싶었을 뿐인데.

이 섬에서 마거릿의 몸으로 눈을 뜨고 나는 내내 ‘생존’이 내 인생 최대의 목표인 것처럼 행동해왔다.

하지만 이제 와 돌이켜 보면 그것도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남아서 뭐 할 건데?’

모든 게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저항하기 어려운 깊은 무기력감이 밀려와 삶의 의지를 앗아갔다.

유안나가 열쇠를 가지고 있었는데, 아나타는 그 열쇠로 봉인된 문을 열어 탈출시킨 거겠지?

뭐가 됐든 다행이다. 이로써 탈출에 한걸음 가까워졌으니까. 부디 나 하나를 구하겠다고 일이 어그러지는 일만 없기를 바란다.

새액- 새액-

누워 있던 나는 고개를 흘끗 내렸다. 내 배 위에 은지가 똬리를 틀고 잠들어 있었다.

“그 뱀은 아무리 봐도 신기하단 말이지. 인간에게 각인한 마물이라니.”

그때 어둠 속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씨, 깜짝이야.”

목소리가 낯설지 않았다. 그런데 제나스의 것이 아니라, 익숙한 카이든의 목소리였다.

‘어떻게 된 거지?’

뚜벅뚜벅. 내 쪽으로 걸어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제기랄. 오지 마. 오지 마.

“아. 몸이 불편하겠군.”

딱.

누군가가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와 함께 갑자기 바닥에서 불이 화르륵 타올랐다. 내 주변을 에워싸고 양초가 놓여 있었던 모양이다.

“일어나. 이제 그럴 수 있을 거야.”

그 말이 들려옴과 동시에 갑자기 몸이 편안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의 말대로 그제야 팔다리를 제대로 움직일 수가 있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보니, 내가 마법진 위에 누워 있었다는 걸 알게 됐다.

마법진을 둘러싸고 양초가 빼곡하게 놓여 있었는데, 예전에 카이든이 설명해준 안식의 방 묘사와 꼭 같았다.

설마…….

“여긴 안식의 방이라는 곳이야. 아늑하지?”

아늑하긴 개X. 섬뜩하다.

나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 내 눈앞에 선 남자를 쳐다봤다.

당연히 카이든의 목소리를 흉내 낸 제나스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눈앞엔 정말로 카이든이 서 있었다.

“카이든?”

내가 놀란 얼굴로 의문을 표하자 그가 마법진 앞에 의자를 놓았다. 그리곤 다리를 꼬아 앉더니 팔짱을 낀 채로 오만하게 나를 내려다봤다.

“아, 정식으로 다시 소개하지. 나는 제나스 이그란 로하데다. 로하데 가문을 만든 시조이자 천 년 전 이 섬을 만든 대마법사지.”

내가 궁금한 건 그딴 게 아니다.

“카이든을 어떻게 한 거야!?”

“내가 먹었어.”

“뭐?!”

“정확히는 여기 잠들어 있을걸? 아마 깨어나지 못할 거야. 영원히.”

카이든, 아니. 카이든의 얼굴을 한 제나스가 자신의 가슴팍을 손가락으로 꾹 누르며 대답했다.

사고가 정지한다는 건 이럴 때 쓰는 말이 분명했다. 나는 고장 난 기계처럼 손을 떨다가 소리를 내질렀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참지 못한 내가 당장 마법진 밖으로 나가서 그의 멱살을 잡으려고 했으나, 마법진에도 결계가 있었는지 투명한 벽에 가로막힌 듯 나갈 수가 없었다.

쿵쿵-

나는 분노에 차 투명한 벽을 두드렸다. 제나스는 동물원의 원숭이라도 구경하듯이 나를 고요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그의 얼굴이 불빛에 일렁거린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도리가 없었다.

이런 상상 초월의 거대한 섬을 만들어 구축할 정도로 대단한 마법사라는 걸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카이든이 그렇게 쉽게 당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마력도 개방했겠다, 사실 실험을 바로 끝내버릴 생각이었어. 그런데 이대로는 뭔가, 아쉬운 것 같기도 하더군. 우리 대화를 좀 나눠 볼까? 네게 아주 궁금한 게 많아.”

“X수작 부리지 말고 카이든을 돌려내!”

“하여간에 입이 거칠어. 귀족 영애답지 않게. 나 때는 말이야, 귀족이 욕설을 뱉으면 처벌을 받았어.”

“천 년 전 소리는 집어치워!”

“농담인데. 요즘 애들은 정말 버릇이 없구나.”

분노하는 내 얼굴을 본 그의 입가에 비스듬한 미소가 걸렸다.

“아, 그렇지. 너는 진짜 귀족이 아니라서 그런가?”

제나스는 아무래도 내가 다른 차원에 다녀왔다는 사실도 알아챈 것 같았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마력이 개방된 적도 없는데 마력을 쓰는 피실험자가 누군지 무척 궁금했었지. 그게 너인 줄 진작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

그가 흥미롭다는 시선으로 나를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그의 동작과 몸짓 하나하나에 나는 바짝 긴장했다.

“아나타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어떻게 다들 이렇게 감쪽같이 나를 속일 수가 있지? 이러면 내가 서운하지.”

서운?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차원 너머에 다녀왔지?”

제나스가 내게 물었다.

그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미처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서, 나는 대꾸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천 년 동안 차원의 문을 통과한 ‘물건’은 많이 있었어도 ‘살아있는 생명체’가 오고 간 적은 한 번도 없었어. 그걸 해낸 인물이 코앞에 있었는데, 그걸 이제야 알게 되다니, 하……. 미치고 팔짝 뛰겠더군.”

그가 마른세수를 하며 마치 내 모든 것을 파헤치고 말겠다는 듯 나를 차분하게 훑었다. 정말로 실험실의 쥐가 되어버린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소름이 끼쳤다.

내게는 너무도 익숙한,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카이든의 얼굴이어서 더 그랬다.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대체 이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나는 차원의 문을 열고 세계를 망가트릴 거야. 그런 다음 권력을 취하는 거지.”

제나스가 주머니에서 역대 마탑주들의 펜던트를 꺼냈다. 태양 문양으로 세공된 펜던트 중앙에 눈물방울 모양의 자수정이 박혀 있었다.

나는 손톱을 물어뜯으며 머리를 굴리다가 문득, 펜던트의 모양을 눈여겨 살폈다.

그러고 보니 제나스는 왜 태양을 오브제로 펜던트를 만들었을까.

태양은 예로부터 왕권을 상징하는 문양이었다.

마탑의 상징인 눈물방울을 왕권을 상징하는 태양이 감싸고 있다. 마탑을 품은 황실이라는 뜻일까? 이건 무슨 의미일까. 혹시 이 실험에 황실의 개입이 있었던 걸까?

아니면 반대로 제나스가 황권에 도전을 하는 걸 수도 있겠다. 그만한 능력을 가졌으니.

잉그람 왕국이 무너져도 로하데 가문만은 멀쩡히 살아남지 않았던가. 로하데 중심의 새로운 왕조를 건국했어도 됐을 텐데, 당시 그들은 후작 위를 받는 것에 그쳤었다.

차원의 문을 열고 세계를 망가트린 뒤에 권력을 취한다는 말이, 어쩌면 그의 과거와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마거릿, 그 전에 네가 보고 온 그 세계에 대해 소상히 말해줬으면 좋겠어. 그곳에서 넘어온 물건들을 보면 마법이 고도로 발달한 세계 같던데, 왜 차원을 열고 우리 세계를 공격할 생각은 하지 않았을까.”

“……대답을 듣고 싶으면, 카이든을 놔줘.”

“흠. 요즘 애들은 협상을 그런 식으로 하나? 긴장감이 없어서 하품이 나올 지경인데.”

“협상으로 보여? 글쎄. 저쪽 세계에서 넘어온 물건을 봤으면 너도 알겠지. 그 세계는 위험해. 나 없이 차원의 문을 열었다간 천년의 세월이 휴지 조각 되는 거? 한순간이야.”

제나스가 턱을 매만지며 내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한참 동안 대답 없이 나를 보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름 일리가 있는 말이야.”

그가 긍정하더니 느긋한 동작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나를 내려다봤다.

“굳이 네게 답을 들을 필요 없어. 머리를 열어서 과거를 읽어보면 될 것 같은데 내가 너무 쓸데없이 시간 낭비를 하고 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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