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166)화 (166/234)

1층으로 내려온 나는 유안나와 들어왔던 오두막 뒤편의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토독. 톡.

그때 한두 방울씩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오두막 앞이 전투로 소란스러워야 할 텐데 아무런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불길해.

곧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땅을 적셨다.

쿨럭. 빗줄기 사이로 루제프의 기침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곧장 그에게로 달려갔다.

“주교님, 괜찮으세요?”

그를 부축해 일으키며 계속해서 주변을 살폈다. 먹구름이 낀 하늘은 어둑했고 비가 오는 오두막 앞은 몹시 을씨년스럽고 음침했다. 꼭 마치 시한폭탄이 터지기 직전의 고요 같았다.

섬뜩한 기분에 나는 마른 침을 삼켰다. 머리끝까지 바짝 서는 긴장감으로 손이 떨려왔다.

기침을 두어 번 더 한 루제프가 비에 젖은 몰골로 세수를 한번 하고는 고개를 들었다. 마주친 루제프의 회색빛 눈동자가 작게 요동쳤다.

그와 눈을 마주친 순간, 나는 기묘한 감정을 느꼈다. 루제프가 맞는데. 꼭 그가 아닌 것 같았다. 어딘지 조금 변한 느낌도 들었다.

쏴아아-

내리는 빗소리 외엔 적막함만이 감돌았다.

오두막 앞에서 들려야 할 제나스와 에녹 일행의 전투 소리는 여전히 들려오지 않았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다들 신변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니겠지. 초조함에 입안이 말라갔다.

나는 루제프를 간신히 자리에서 일으키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숨을 곳을 찾기 위해서였다. 얼른 자리를 피해 숨어야 했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이렇게 있다가 제나스에게 들키면…….

“아, 여기 있었구나?”

낯설지 않은 앳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심장이 쿵. 하고 땅 끝까지 거세게 떨어졌다. 머릿속이 새하얘져서 마치 발에 족쇄라도 채운 것처럼 굳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돌아보지 않아도 나는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제나스였다.

설마 모두 그에게 당한 걸까?

‘말도 안 돼. 에녹과 카이든이 그렇게 허무하게 당했다고?’

믿을 수 없었다.

유안나가 아나타를 탈출시킬 때까지는 버텨야 하는데. 나 혼자 할 수 있을까? 제나스를 상대로?

암담한 상황에 절망감이 밀려왔다.

홍수처럼 쏟아지는 좌절감을 애써 꾸역꾸역 삼켜내고 괜찮다며 자기 세뇌를 하고 있을 때, 제나스가 재차 나를 불렀다.

“메그. 뭐해?”

겨우 정신을 차린 나는 멍한 얼굴로 내게 몸을 기대고 있는 루제프를 바라봤다.

내가 이러면 안 돼. 여기서 무너지면 안 돼. 나는 굳게 결심하고 천천히 뒤를 돌았다.

가장 먼저 찬란한 은발이 눈에 들어왔다. 곧이어 어여쁜 얼굴과 소름끼치도록 붉은 눈이 시야에 들어온다.

천진한 소년의 얼굴을 한 제나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몸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메그. 말했잖아. 나도 이 섬에선 너희랑 똑같이 마력을 제한당하고 있다고.”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궁금한 건 그런 게 아니다.

“다른 사람들은…….”

“아. 안개를 좀 썼어. 내가 볼일이 있는 쪽은 너희라서.”

제나스의 말이 끝나마자 오두막 앞마당에서부터 퍼져 나온 안개가 우리 쪽으로까지 뻗어 나왔다. 오두막 주변의 안개는 역시 교란 목적의 마법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넓게 퍼지던 안개가 잠시 주춤하면서 흐릿하게 옅어지기 시작했다. 안개가 차차 걷히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제야 카이든이 내 마력을 빌려 오두막 주변에 쳐둔 결계가 떠올랐다.

“흠. 마법을 써뒀네. 어쩐지 아까 마력이 느껴지더라니. 우리 후손님 제법인데.”

제나스가 안개가 맑게 걷혀 가고 있는 걸 보더니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곧 내가 부축하고 있는 루제프에게로 관심을 돌렸다.

“그 사제, 지금 즈음이면 반응이 오겠다. 마침 비도 오고 있고 잘 됐네.”

무슨 반응?

의아함에 눈썹을 치켜떴다가 그가 우리에게로 다가오려는 것을 보고 나는 조명탄을 꺼내어 그를 향해 조준했다. 제나스가 양손을 들어 보인다.

캬악! 내 어깨에 매달려 있던 은지가 날카롭게 이를 드러내며 제나스를 경계했다.

이윽고 은지가 제나스를 향해 불을 뿜었지만, 오두막을 둘러싸고 있는 아나타의 마력 때문인지 제나스는 털끝만큼도 다치지 않았다.

제기랄. 유안나가 아나타를 탈출시킬 때까지만 버티면 되는데, 할 수 있겠지?

“메그, 내가 선물해준 무기로 나를 위협하는 건 조금 너무하지 않아?”

“닥쳐.”

“어차피 섬을 탈출할 방법을 찾을 때까진 죽이지 못할 거면서.”

제나스가 얄밉게 웃었다. 저 망할 XX!

그러나 내가 직면한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바로 루제프의 몸에서 은은하게 빛이 나고 있다는 점이었다.

루제프가 괴로운 듯 얼굴을 찌푸렸다.

“주교님! 괜찮아요?”

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루제프의 안색을 살피고 있을 때 지척까지 제나스가 다가왔다.

“메그, 네 눈엔 저 주교가 괜찮아 보여? 마물의 모체가 됐던 것들. 그거 때문일 텐데.”

그가 기웃거리며 루제프를 가리켰다. 나는 그에게 다가오지 말란 뜻으로 조명탄을 다시 치켜 올렸다. 그러자 그가 다시 양손을 들고는 자세를 바로 했다.

‘지금 즈음이면 반응이 오겠다. 마침 비도 오고 잘 됐네.’

나는 조금 전 제나스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불길했다. 그는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고, 뭘 계획하고 있는 걸까.

“제길. 봉인된 힘이 풀리는 것 같습니다…….”

루제프가 욕설을 뱉으며 가슴 앞섬을 움켜쥐었다.

봉인된 힘이 풀리다니? 설마 마물의 모체? 하필 이 상황에서? 여기서 봉인이 풀려버리면 어떻게 되는 거지?

유안나는 섬의 시스템이 붕괴될지도 모른다고 했다. 아니면, 마물들이 다시 진화를 거듭할 수도 있다.

최악의 상황들만 골라 일부러 시련을 안겨준 게 아닌 이상,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이럴 때가 아니야. 정신 차려.’

어서 루제프를 데리고 제나스의 눈을 피해 다른 곳으로 피신해야 했다.

수풀 사이로 루제프를 안전하게 숨긴 뒤에 나는 제나스를 다른 곳으로 유인하는 거다. 바로 코앞이 숲이었다. 그곳까지만 루제프를 옮기면 된다. 그러면 돼.

크헉.

그런데, 루제프가 갑자기 피를 토했다. 그런 그에게선 조금 전보다 더 큰 빛이 뿜어져 나온다.

젠장.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루제프의 발밑으로 땅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젖은 흙바닥인데도 땅이 쩌억 하고 갈라진다.

“주교님, 저희 일단 자리를 피하는 게 좋겠어요. 뛸 수 있겠어요?”

나는 루제프에게만 들릴 정도로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루제프가 괴로운 얼굴을 하고 힘겹게 얼굴을 들고 나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안개가 걷히면 에녹 일행도 올 거니까, 조금만 버티면 된다.

제나스는 여전히 여유로웠다. 마치 우리가 뭘 하고 있는지 다 예상하고 있다는 듯이. 그리고 뭘 하든 제게는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다는 듯이 말이다.

꼭 독 안에 든 쥐를 바라보는 눈빛이 저러할까.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탈출할 수 있을 거라는 우리의 결의와 희망이 섬뜩하리만치 처참하게 무너져 내린다.

‘아니야. 내가 무너지면 안 돼. 그러면 안 돼.’

나는 애써 감정을 추스르고 루제프를 부축했다. 그리고 크로스백에서 화염 폭탄을 꺼내 이로 핀을 뽑고는 제나스를 향해 던졌다.

펑!

루제프를 부축하고 있는 탓에 얼마 가지 못하고 폭탄의 여파로 나는 루제프와 함께 바닥을 굴렀다.

삐-

제기랄. 나는 먹먹한 귀를 움켜쥐고 빠르게 정신을 차렸다.

힘겨운 몸으로 루제프를 부축하고 다시 움직였지만, 우리는 얼마 가지 못했다. 루제프가 연달아 피를 토하며 바닥에 주저앉았기 때문이다.

그는 조금 정신이 들었는지 피를 토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힘겹게 내게 말했다.

“미안, 미안합니다, 영애. 제가 또 영애에게 짐이 됐…….”

“아니, 말하지 마세요. 알았으니까 말하지 마.”

정말 조금만 더 가면 되는데. 정말 조금만. 나는 루제프를 부축하고 다시 일어나려고 했다.

팟-!

그의 몸에서 강렬한 빛이 퍼져 나오지만 않았어도 그럴 수 있었을 거다.

눈을 뜨기도 어려울 정도의 빛이 온 시야를 잠식했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쥐어짜내듯 밝아진 빛이 어느 순간 전원을 끈 TV 모니터처럼 빛이 소거됐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내 안에 묶여 있던 어떤 기운들이 요동치며 내부를 배회하는 느낌이 들었다.

눈을 다시 떠 보니 루제프는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주교님!”

숨 쉬는 소리가 미약했다. 나는 다급하게 그를 흔들어 깨웠지만 그는 쉽사리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주교님, 제발 일어나 봐요. 제발…….”

무력감에 머릿속이 새하얘진다. 이대로 루제프가 죽는 건 아니겠지? 아닐 거다. 아니어야만 해.

아직은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지 않나. 제나스가 오두막 쪽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손이 덜덜 떨려왔다. 제나스를 피할 곳을 찾아 어서 움직여야 한다. 어서……. 어서…….

나는 기절한 루제프를 부축해 일으켰다. 하지만 상당한 무게 때문에 몇 걸음 못가고 엎어지고, 또 엎어지고를 반복했다.

그때 등 뒤로 낮은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하아. 드디어 마력이 개방됐군.”

고개를 돌리니 시야 끝에 성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제나스의 모습이 들어왔다.

목 언저리에서 찰랑거리는 은발, 소름끼치는 붉은 눈동자, 커다란 키에 맞게 늘어난 현대복과 화려한 마법사 로브.

뻐근한 듯 뒷목을 매만지며 남자가 매우 나른한 동작으로 나를 봤다. 그의 입가에 느긋한 미소가 번졌다.

“오랜만이야, 마거릿.”

‘……XX.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물론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할 정신은 없었다.

나는 제나스가 나를 향해 손을 뻗어 마법진을 그리는 걸 보고 재빨리 그를 향해 조명탄을 조준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퍼어엉-.

제나스를 향해 날아간 불꽃은 그대로 제나스가 만든 마법진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C발!

내 어깨에 매달려서 눈치를 보던 은지도 제나스를 향해 불길을 뿜었지만, 역시나 소용이 없었다.

“서운하군. 진짜로 쏠 줄은 몰랐는데.”

“내가 날 죽이려는 미친 살인마를 가만 두는 바보인 줄 알아?”

“뭐. 틀린 말은 아니지.”

제나스가 가증스러운 얼굴로 턱을 괴고 중얼거렸다.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지만, 나는 여전히 그를 향해 조명탄을 겨눈 채로 경고했다.

“이 미친 짓거리 당장 그만 두고. 이 섬을 나갈 수 있는 방법, 얼른 말해.”

“그건 어렵겠는데. 그런 방법은 없거든.”

“거짓말…….”

“아. 우리 후손님이라면 방법을 알 수도 있겠군.”

“그게 무슨 말이야? 카이든이?”

“마거릿!”

그때 귀신같이 카이든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안개가 걷힌 뒤 멀리서 에녹과 카이든이 나를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뒤이어 오두막에서 나오는 유안나와 아나타도 보였다.

모두 무사한 건가. 다행이다.

그 모습을 보던 제나스가 혀를 찼다. 아나타를 분명 본 것 같은데 그는 의외로 전혀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쿵!

제나스가 나를 순식간에 안아들더니 자리에서 뛰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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