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164)화 (164/234)

그러자 사람들이 알만하다는 얼굴로 나와 에녹을 번갈아 보았다.

“전해주는 건 내가 잘하는데.”

내 오른편에 앉은 카이든이 상체를 눈에 띄게 기울이고는 나와 에녹을 빤히 쳐다봤다. 또 시작인가 싶어서 적당히 넘기려고 했는데 카이든이 뒷말을 덧붙였다.

“내 마지막은 너와 함께 할 건데, 다른 사람에게 양보할 순 없지. 그게 그 사람의 마지막일지라도.”

카이든이 덧붙인 말에 에녹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조금 복잡한 심경으로 그의 말을 곱씹었다.

나는 마지막을 논하는 게 싫었다. 정말로 그게 마지막이 될 것 같아서. 그래서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 유안나가 내게 물었다.

“마거릿은요?”

에녹을 빤히 보던 카이든마저 다시 나를 돌아봤다. 내게로 이목이 집중되었고 나는 머저리처럼 눈만 깜빡였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마거릿?”

유안나가 의아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하며 나를 불렀다.

“……저는 없어요. 아시잖아요. 제 상황.”

“아…….”

유안나가 뒤늦게 내가 하는 말의 의미를 알아들었다. 그녀의 얼굴 위로 나를 향한 미안한 감정이 차차 번졌다.

그리고 부연 설명을 하지 않아도 내게 다른 쓸데없는 질문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 이해와 침묵이 어쩐지 불편했다.

나는 마거릿인데, 마거릿이 아니다.

존재 자체도 애매해서 나를 누구라고 소개해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마지막 말을 어떻게 전하겠는가.

결국 나는 끝까지 침묵했다.

* * *

그 후로 우리는 이틀 정도를 꼬박 걸었다. 그리고 한밤중에서야 제나스의 오두막 앞에 도착했다.

오두막 근처로 안개가 자욱할 거라고 생각했다. 전에는 오두막 근처로 오지 못하게 하려고 안개로 우리를 혼란에 빠트렸으니까.

하지만 오두막 앞은 뜻밖에도 안개 한 점 없이 시야가 깨끗했다. 마치 우리가 오길 기다렸다는 듯이.

아스달의 말에 의하면 근방으로는 제나스가 눈을 빌릴 만한 마물이 없다고 했다. 마물의 모체를 봉인한 효과가 확실히 있기는 한 모양이다.

안개가 끼던 반경으로 봤을 때, 아나타의 마력은 오두막 반경 30m내로만 효과가 있는 걸로 추정된다.

하여 우리는 마력이 미치지 않을 만한 거리의 장소에 자리를 잡고 만발의 준비를 했다. 가져온 물건을 다시 한번 점검한 뒤, 오두막 근처에 숨어 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혹시 근처에 마물이 다가오지는 않는지 아스달이 계속해서 확인했고 카이든도 방어 결계를 쳐두었다.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모닥불은 피우지 않았다. 수풀 사이로 자리를 잡은 우리는 불침번을 정해 서며, 밤을 보내기로 했다.

첫 번째 불침번은 나였다.

일행이 모두 잠든 고요한 밤.

찌르르-

풀벌레 소리만이 숲 속에 가득했다. 나는 제나스의 오두막 불빛을 가만히 노려보다가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는 별이 눈에 담겼다. 아름다운 밤하늘이었다.

한국에서는 이런 하늘을 보기 어려웠지.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한국이 잠시 그리웠다.

그때, 누군가가 풀숲을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돌렸는데 그 자리에 카이든이 서 있었다.

“마거릿. 놀랐어? 미안해.”

그가 멋쩍은 얼굴로 사과하며 조심스레 내 옆에 앉았다.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그를 봤다. 카이든의 화려한 은발이 달빛을 받아 예쁜 색으로 빛났다.

“안 자고 있었어? 내일을 위해서 쉬어야지.”

카이든은 잠시 말없이 나를 쳐다봤다. 섬뜩하리만치 붉은 눈동자가 고요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하긴, 카이든은 늘 그랬다. 도무지 속을 알기가 어려웠다.

한참 동안 나를 보던 그가 피식, 웃음을 터트리고는 고개를 돌렸다.

“잠이 안 오네.”

그 기분은 나도 이해했다. 원래 시험 전날, 면접 전날 등등, 큰일을 치르기 직전엔 잠이 오지 않는 법이니까.

카이든은 이제 내 옆에 가만히 앉아 제나스의 오두막을 넌지시 바라봤다. 나도 그와 함께 조용히 불빛이 어른거리는 오두막을 보았다.

“마거릿, 내가 왜 비혼주의자인지 알아?”

카이든이 나직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그에게선 어울리지 않게 진중한 분위기가 흘렀다.

‘그러게. 그 생각을 못 했네. 마거릿, 너 약혼 같은 거 할 거야?’

‘살아 돌아가면 아마도 하게 되겠지?’

‘약혼하지 마. 나랑 그냥 비혼으로 살자.’

나는 전에 그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사실 그 대화가 아니더라도 그가 실험을 당한 여파로 비혼주의자가 됐다고 알고 있었는데.

“나는 가정을 꾸릴 수 없어. 아이를 갖기 어렵거든.”

“아…….”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나는 차마 거기서 어떤 말도 보탤 수가 없었다. 카이든은 그런 내 반응을 이해한다는 얼굴로 웃었다.

“여러모로 이 실험에 굉장히 유감이 많아. 게다가 지금까지 나는 삶에 그다지 미련 같은 건 없었거든.”

그가 고해성사를 하듯이 조곤조곤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평소와 다르게 매우 정돈되고 차분한 목소리였다.

그 말을 가만히 듣고 있는데 심장이 불안함으로 울렁거린다. 불길하게 왜 자꾸 그답지 않은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차라리 아무 말도 말았으면 좋겠는데.

우리는 모두 무사할 거다. 분명.

그러나 내 바람과 다르게 카이든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처음으로 너와의 미래는 기대하고 싶어지더라. 그래서 더더욱 화가 나.”

카이든이 고개를 돌려 이번엔 내 얼굴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의 시선에 나 역시 그를 마주봤다.

카이든의 붉은 눈이 내 얼굴을 꼼꼼하게 훑는다. 기억에 선연히 담겠다는 듯이 말이다.

“내가 혹시 잘못되면 슬퍼해 줘. 나는 그래줄 사람이 없거든.”

그 말을 듣는 순간, 어쩐지 목구멍에 무언가 턱 걸려 숨을 쉬기 어려웠다. 나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그의 얼굴을 홀린 듯이 바라봤다.

“하고 싶은 말은 그것뿐이야.”

카이든은 내 반응은 살피지 않고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너도 쉬어.”

“슬퍼해 줄 생각…….”

돌아서던 카이든의 발걸음이 멎었다. 나는 울음을 삼키고는 말을 이었다.

“슬퍼해 줄 생각 없어. 다 잊어버릴 거야. 그러니까 무사해야 해. 아파도 내 앞에서 아프라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나는 결국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발등 위를 눈물방울이 적셨다. 카이든이 걸음을 멈춘 채로 가만히 있었다. 나는 한참 동안 코를 훌쩍이다가 입을 열었다.

“미안해. 사실은 엄청 슬퍼할 거야. 일상생활도 하지 못할 거야. 폐인처럼 살 거라고. 그러니까 그런 말 하지 마.”

“고마워. 마거릿. 난 역시 네가 너무 좋아.”

그가 다정하게 내 머리를 토닥이고는 군말을 더 보태지 않은 채, 자리로 돌아갔다.

가슴이 답답했다.

왜 우리가 이런 일을 겪어야만 하는 걸까. 카이든의 말대로 무척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제나스가 눈앞에 있다면 당장에 그의 심장에 칼이라도 꽂고 싶은 분노가 일렁였다. 나는 두 손에 얼굴을 묻고 뜨거운 숨을 토해냈다.

내일이 어서 와서 탈출을 했으면 좋겠다는 기대감과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두려움이 내 안에 공존했다.

그때 비어있는 내 옆자리에 다른 누군가가 앉았다.

고개를 드니 에녹이 있었다.

눈이 충혈되어 있을 텐데. 나는 황급히 얼굴을 정리했다.

“안 잤어요?”

내 물음에 에녹이 말없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인다. 그는 엉망인 내 얼굴을 보고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카이든 때문에 감정이 격해진 상태여서 누구든 옆에 있어 주는 것이 차라리 나을지도.

우리는 나란히 앉아 한참 동안 제나스의 오두막을 바라보며 침묵했다.

오랜 고요 끝에 에녹이 입을 열었다.

“내가 탈출하지 못한다면……, 그대에게 남기고 싶은 말이 있어.”

‘그러니 남기고 싶은 말은……. 직접 전하겠다. 직전에.’

역시 직접 전하겠다는 그 말은, 나를 말하는 것이었던가 보다.

에녹은 무거운 낯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의 눈빛에는 애틋함이 담겨 있었다. 그는 찬찬히 내 얼굴을 그리듯이 눈에 담더니,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흔들다리 효과라고 했던가.”

“…….”

“그런 걸 아직도 믿는가.”

에녹이 차분하게 내 뺨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주며 내게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내 대답은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그대 말대로 상황이 만든 찰나의 감정일 수도 있겠지. 부정하고 싶으면 부정해도 좋다. 그런다고 우리가 지금까지 함께한 시간이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그 말에 나는 잠시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심장이 어지러울 정도로 울렁거렸다. 뺨이 화끈거리고 머리가 멍했다.

‘우리가 지금까지 함께한 시간이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에녹의 말에 나는 잠시 새로운 충격을 받았다. 그런 식으로 사고할 생각은 왜 못해 봤을까.

그동안 난 그의 마음이 무조건 변할 거라고, 내 멋대로 왜곡하고 있었다.

그래. 그의 말대로 심장은 잠시 착각을 했을지라도 함께 했던 시간과 기억까지 변하는 건 아니잖아.

“고마워요. 그렇게 말해줘서.”

진심이었다. 헛헛해진 마음이 조금은 채워지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제게 마지막 말을 남기시는 거예요? 전하의 곁엔 사람이 많잖아요. 저 말고도 마지막 말을 남겨야 하는 분이 많으실 것 같은데요.”

에녹이 남에게 쉽게 곁을 잘 내주지 않는 타입이라 다가가기 어려워서 그렇지, 그를 따르는 사람이 굉장히 많았다.

그는 빼어난 용모, 적통이었던 로드반 폐태자보다 더 황족다운 인품, 그리고 뛰어난 능력으로 백성들의 신뢰는 물론 귀족들의 신망까지 받는 황태자였다.

“마지막 말이라고 하지 않았나.”

에녹의 목소리가 들려와 나는 다시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네?”

“마지막 말 정도는 좋아하는 사람에게 남기고 싶었다.”

“……아.”

나는 나를 바라보는 에녹의 금안에 사로잡혀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그 순간, 구름에 걷힌 달빛이 에녹의 얼굴 위로 환히 쏟아져 내렸다. 지금껏 경험해본 적 없는 감정들이 달빛과 함께 내게로 쏟아져 내린다.

달빛이 환히 밝힌 건 어쩌면 에녹의 얼굴이 아니라 내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한참 동안 멍하니 에녹의 잘생긴 얼굴을 바라만 보고 있자, 그가 재미있다는 얼굴로 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제대로 된 마음을 전하는 건 무사히 탈출해서 하는 걸로 하지. 그대에겐 그게 더 진정성 있어 보일 테니까.”

“그게 무슨……. 이미 할 말 다 해놓고…….”

“이곳이 내 마지막이 된다면, 내 진심이 그대에게 짐이 될 것이 아닌가.”

에녹이 덤덤한 얼굴로 말했다.

카이든도 그러더니 에녹까지 내게 왜 이러는 거야.

가슴이 복잡하고 답답했다. 떨리는 손을 가슴 위에 얹어 애써 진정하고는 에녹에게 말했다.

“그럴 일 없어요. 같이 나갈 거예요.”

“그래. 그럴 일은 없을 거야.”

내 말에 에녹이 나를 안심시키듯이 단호한 어조로 대답했다.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에녹은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그는 내 불침번 순서가 끝날 때까지 내 옆자리를 묵묵하게 지켜줬다.

* * *

다음 날, 아침.

우리는 계획한 대로 팀을 나누어 움직이기로 했다.

제나스를 밖으로 유인하고 묶어두는 건 무력을 쓰는 남자들이 맡고, 나와 유안나는 은지를 데리고 오두막 안으로 진입하기로 했다.

오두막에서 머문 적 있는 나와 유안나가 내부 구조를 알고 있어, 아나타를 빠르게 구출하기에 적합했기 때문이다.

우선 작전을 시작하기 직전에 나는 카이든과 함께 오두막 주변으로 결계를 쳤다. 아나타의 마력을 무력화시키는 마법을 걸기 위해서였다.

카이든은 그녀가 가진 마력의 위력이 강하면 일회성 결계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을 전했다.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낫겠지.

제나스를 유인하기 위한 가장 큰 미끼는 카이든이었다. 제나스가 그의 몸에 무척 관심이 있는 것 같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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