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163)화 (163/234)

아니, 나는 그렇게 구체적으로 그들에 대해서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사실 의식적으로 그 문제를 피한 것도 있었다. 생존을 우선시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어떤 것도 생존과 탈출보다 우선시되는 걸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죠?”

유안나는 다 이해한다는 얼굴로 내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생각해도 역시 그 문제를 지금 생각하는 건 아닌 것 같다.

나는 여전히 흔들다리 효과를 믿는다. 섬을 탈출한 뒤에도 그들의 마음이 지금과 같을지는 모르는 것 아닌가.

란그리드 제국에서 있을 때만 해도 나를 싫어하던 사람들이다. 그래서 조금 무서웠다. 돌아가면 그들의 마음이 다시 변할까 봐.

탈출하고서 이 감정들이 모두 지워진다면 가슴이 아플 것 같다. 우리 모두가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는 지금 행동을 똑바로 해야 했다.

그러다가 이번엔 유안나가 가진 감정에 대해서도 궁금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그녀가 자신의 이야기를 깊게 털어놓는 걸 보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녀와 내가 부딪힐 접점이 없었던 탓도 있겠지만.

“성녀님은요?”

“네?”

“성녀님은 좋아하는 사람 없었어요? 지금도 없고요?”

유안나는 제게로 같은 질문이 돌아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잠시 당황한 얼굴이 된 그녀가 말끝을 흐렸다. 숨기는 것이 있는데 들킨 표정이 아니라 정말로 예상치 못한 질문에 대한 놀람이었다.

“없어요.”

그러더니 곧 단호하게 대답한다. 너무 단호해서 다시 묻기 민망할 정도였다.

나는 옆 나무에서 여전히 다투고 있는 카이든과 디에고를 바라봤다. 디에고는 유안나에게 호감이 있는 줄 알았는데, 유안나가 전혀 모르는 눈치인 걸 봐서는 아닌가?

고개를 갸웃하다가 곧 신경을 꺼두기로 했다. 그녀가 아니라고 했으니 아닌 거겠지.

우리에게 중요한 건 생존이니까.

나는 찬찬히 주변을 둘러봤다.

반대편 나무에는 에녹과 아스달이 있었고 깨어나지 못한 루제프는 그들의 바로 위층 나뭇가지에 몸이 돌돌 묶여 있었다.

혹시 모를 위험과 공격을 대비해 우리는 불침번을 서가며 잠을 청해야 했다. 그래서 2인 1조로 나무 위에 올라와 있는 것인데, 참 팀 배정이 공교롭게 됐다.

마법사와 기사, 황태자와 왕세자 조합이라니. 하긴, 에녹과 카이든이 한 조가 되어도 문제였지만.

가만히 주변을 둘러보던 나는 다시 유안나를 돌아봤다.

“로하데 남매가 차원의 문을 열고자 하는 목적이 뭔지, 성녀님은 아시나요?”

내 물음에 유안나가 미간을 좁히고는 잠시 기억을 더듬는 얼굴로 눈을 감았다. 한참 동안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저도 정확히는 몰라요. 하지만 분명한 건, 제나스와 아나타의 개인 사심을 채우기 위한 실험은 아니었다는 거죠. 꽤 여러 사람의 개입이 있는 것 같았어요.”

그녀는 미간을 좁히고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사실 저도 궁금한 점이 많아요. 시간을 돌리기 전엔, 그들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할 정신조차 없었거든요.”

나는 그제야 우리가 모두 죽고 혼자 남아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어 하던 그녀의 일기를 떠올렸다.

내가 감히 당시 그녀의 심경을 이해한다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해서 어설픈 위로는 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녀에게 물었다.

“성녀님은 정말 괜찮으신가요?”

“네?”

유안나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한다. 나는 최대한 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 우리 중에 사라진 과거의 일을 기억하는 사람은 성녀님뿐이잖아요. 혼자만 간직한 기억이라는 게 얼마나 힘들지, 저는 상상도 가지 않아요.”

“아…….”

유안나는 잠시 말문이 막힌 얼굴로 입만 벙긋댔다. 늘 능글맞게 상황을 대처하던 그녀답지 않았다.

“걱정 마세요. 저는 괜찮…….”

그녀를 만난 이후로 이토록 당황하는 얼굴을 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어. 그러니까 괜찮…….”

그녀가 말을 잇지 못하고 같은 말만 되풀이하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때 하늘에서 비가 한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유안나의 눈빛이 세차게 흔들렸다. 그녀의 얼굴이 차차 흐려졌다. 마치 지금의 날씨처럼.

나는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봤다.

“비가 내리네요. 이런 날씨에는 누가 운다고 해도 아무도 듣지 못하겠어요.”

유안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그녀의 코끝이 붉어졌다. 그녀가 미간을 찡그리고는 괴로운 듯 얼굴을 구겼다.

쏴아아-

이윽고 거짓말같이 비가 내렸다. 유안나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그녀가 정말로 눈물을 흘렸는지 아닌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그녀는 그렇게 한참을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비가 그칠 때까지.

* * *

폭풍우가 지나간 뒤의 맑은 날씨는 무척 더웠다. 그럼에도 이 미친 섬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며칠 동안 우리는 마물과 마주치지 않았다. 그래서 이제는 나무 위에서 취침하지 않고 결계를 쳐두고 나무 아래에서 휴식을 취했다.

다행히도 아스달에겐 마력안을 통해 마물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능력이 있었는데, 근방에 마물이 거의 없다고 했다. 진화를 멈추니 개체 수가 눈에 띄게 줄고 있는 것은 맞는 모양이다.

어느새 노을이 지는 늦은 오후가 되었다. 제나스의 오두막까지 이제 절반 정도 온 듯했다. 걸어온 거리만큼을 더 가야 하니 일행에겐 충분한 휴식이 필요했다.

제나스가 마물을 통해 우리의 위치를 특정할 수 없도록 이동할 때 마물을 경계하고 늘 결계를 쳐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우리는 모닥불을 피워놓고 그 앞에 둘러앉아 각자 저마다의 생각에 잠겨 있었다. 긴 침묵이 계속됐다.

“다들 말을 꺼낼 생각이 없는 듯 보이는군. 분위기가 무거워지지 않나. 아무도 말할 생각이 없다면 내 얘기를 해보겠네.”

침묵을 참기 어려운지 말하는 걸 좋아하는 아스달이 입을 열었다. 그는 좌중을 훑다가 팔짱을 끼고는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난 태어나 자라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고귀하지 않은 나를 생각해본 적이 없었어.”

매우 오만한 발언이지만, 아스달은 그럴 만 했다. 그는 적통 왕세자로서 늘 행복하고 아름다운 것만 보며 자라왔을 것이다. 전 부인을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곳에 와서는 태어나 처음 겪는 일들뿐이었다네. 물론 플로네 영애를 제외한 모두가 그랬겠지만.”

아스달이 나를 보며 윙크했다.

“정말 많은 생각이 들더군. 약간의 깨달음도 있었고. 내가 그간 새장 속에 갇힌 카나리아에 불과했다는 걸 알게 됐지.”

카나리아는 너무 비약이 심한데. 하지만 반박하면 귀찮아질 게 뻔하니, 나는 얌전히 그의 말을 경청했다.

“내가 비관주의자는 아니지만, 솔직히 말해서 난 우리 모두가 이 섬을 무사히 나갈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비관주의가 아니라, 그건 사실이었다.

우리가 다 함께 무사히 탈출할 수 있으리란 가정은 애써 무시하고 있었는데.

분위기가 무거워지는 것을 우려해 시작한 말치고는 전보다 더 암울한 분위기가 되어 버렸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스달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러니, 각자 서로 탈출에 성공한 이에게 남길 마지막 말이나 부탁이 있다면, 지금 해두는 게 어떻겠나.”

그는 마치 그 말을 꺼내기 위해 지금까지 기다렸던 듯했다. 본인이야말로 남기고 싶은 말이 있는 모양이다.

“우리 모두 나갈 수 있으니, 그런 가정은 필요 없단 소리는 말게. 현실을 보자고. 물론 모두 나가면 좋겠지만, 만약이란 것이 있지 않은가.”

“좋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남기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잘됐네요.”

뜻밖에도 우리 중 가장 까탈스럽고 비관적인 카이든이 아스달의 말을 먼저 긍정하고 나섰다. 그가 두 팔을 머리 뒤로 벌려 깍지 낀 손바닥에 뒷머리를 기대고는 태연하게 웃었다.

아마 카이든만이 아니라 모두들 남기고 싶은 말은 있을 것이다.

“그럼 내가 먼저 하지.”

아스달이 먼저 운을 뗐다.

“내가 탈출하지 못하면, 헤스티아 왕국에 애버든 크리스틴을 찾아주게. 내 조카거든. 이유는 설명하지 않아도 돼. 아마 내가 그 아이를 찾는다고 하면, 그 아이도 짐작할 걸세. 자기를 왜 찾는지.”

그의 말을 들은 디에고가 의문을 표했다.

“크리스틴 자작 가문이면…….”

“맞네, 내 먼 조카지. 내 뒤를 이을 믿을 만한 후계가 왕실 내엔 없거든.”

“그래도 마지막 남기는 말인데, 혈육에겐 전할 말이 없으신 겁니까.”

이번에도 디에고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그러자 아스달은 지체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없네. 왕족이란 원래 대의를 따라 움직이는 법이고 대의만을 위해 사는 인간들이거든.”

그의 얼굴은 묘하게 후련해 보였다.

아스달의 말을 끝으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사이로 모닥불이 타닥타닥 타들어가는 소리와 함께 풀벌레 소리가 찌르르- 울렸다.

막상 얘기가 시작되고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나만이 아니라 모두 그랬을 것이리라.

이제 우리는 살아남아 탈출하느냐, 죽음의 문턱 앞에서 추락하느냐의 기로 앞에 서 있었다.

“저는……. 빌터하임 공작 가문에 비보를 전해주십시오. ‘당신들은 늘 옳습니다. 존경합니다.’ 그 말을 전달 부탁드립니다.”

디에고의 말이 끝나자마자 카이든이 성의 없는 동작으로 한 손을 듣고 심드렁하게 입을 열었다.

“나는 마탑에다가 소식 좀 전해줘. 계획대로 일을 진행해도 된다고.”

“계획이라니?”

내가 반문하자 카이든이 팔짱을 끼고는 천연덕스럽게 웃음을 지었다.

“여기 오지 않았어도 로하데 가문을 파멸시킬 계획을 구상 중이었거든.”

아……. 카이든의 과거를 떠올려 보면 그런 계획을 세우던 중이란 것도 이상할 건 없었다. 실제로 그가 로하데 가문과 반목하는 건 유명했으니까.

가만히 우리의 대화가 끝나길 기다리던 유안나가 입을 열었다.

“제 차례죠? 저는 딱히 제 소식을 기다리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래도 우리 대단하신 교황 성하께 소식 좀 전해줘요. ‘네 실험을 망가트리려고 내 목숨까지 바쳤어. 결과는 네 패배야. 어떡하니, 호랑이를 키웠네.’라고요.”

유안나의 말에 모두가 그녀를 바라봤다. 제게로 시선이 집중되자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웃음을 지었다.

“왜요?”

그녀의 천진한 물음에 모두가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나는 그녀가 이 섬에 영혼이 묶여 있다는 걸 알아서 그 말이 더 안타깝게 와 닿았다.

그러나 정작 유안나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태연하게 에녹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 다음으로는 에녹이 말할 차례였기 때문이다.

에녹은 조용히 침묵하고 있다가 제게로 이목이 집중되자 한숨처럼 입을 열었다.

“내 보좌관 루드빈에게 작고 소식을 전하면, 이후 처리는 알아서 할 거다. 그러니 남기고 싶은 말은…….”

말끝을 흐린 에녹이 그의 왼편에 앉은 나를 흘끗 쳐다봤다.

“직접 전하겠다. 직전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