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162)화 (162/234)

내 말에 유안나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생각에 잠겨 있던 카이든이 다시 말을 보탰다.

“제나스의 오두막이야 아나타를 봉인시켜서 마력을 사용하는 거지만, 오두막 밖으로 나오면 제나스도 마법을 쓰지 못하는 거잖아.”

카이든의 말에 유안나가 긍정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유안나가 긍정하는 걸 보고 카이든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면 제나스를 밖으로 유인해야겠네.”

그의 말이 맞다. 제나스도 오두막 밖에선 마력을 제한당하고 있었다. 거기다가 어린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여럿이서 그를 밖으로 끌어내기만 한다면, 제압하기 쉬울 것이다.

“팀을 나누는 게 좋겠군. 그 망할 꼬맹이를 유인해서 시간을 버는 팀과 아나타의 봉인을 풀고 그녀를 데려올 팀으로.”

에녹의 말에 모두가 동의했다.

그래서 나와 유안나, 은지가 오두막 안으로 들어가고 나머지 사람들이 제나스를 끌어내기로 했다. 그게 첫 번째 계획이었다.

사실상 첫 번째 계획의 성공 없이는 두 번째 계획(섬을 탈출하는 것)을 실현시키는 건 아예 불가능했다.

우리에겐 섬을 탈출할 방법과 제나스를 대적할 방법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아나타를 통해서 단서를 얻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반드시 첫 번째 계획을 성공시켜야만 해야 했다.

“그런데, 아나타의 봉인은 어떻게 풀어요?”

“음…….”

내 물음에 유안나도 그것까진 모르는지 곤란한 얼굴로 눈치를 봤다. 자리를 정리하고 짐을 싸던 카이든이 슬쩍 한마디 얹었다.

“안 되면 그냥 오두막을 부숴버려.”

그 큰 오두막을……? 그러다가 아나타도 다칠 것 같은데.

내 표정을 봤는지 카이든이 웃음을 지었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아나타한테 물어봐. 그녀라면 뭐든 알 것 같던데.”

“그러죠 뭐. 일단 달리 선택권은 없으니 방법은 가면서 생각해봐요.”

유안나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루제프를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괜찮은 걸까.

* * *

까마귀 마물의 눈을 빌려 오두막 내 마거릿 일행의 상황을 살핀 제나스가 웃음을 지었다.

“이쪽으로 오는 것 같던데. 마중을 나가야 하나.”

제나스가 아나타의 옆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앉아서는 중얼거렸다. 아나타가 짜증스럽게 미간을 찌푸렸다. 물론 아나타의 기분 같은 건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었던 제나스는 웃으며 계속해서 말했다.

“생각해 보면, 이것도 나쁘지 않아. 회귀게이트를 여는 덕분에 우리 후손님도 살아 있잖아.”

제나스는 근래 들어 유달리 말이 많아졌다. 아나타는 그의 말을 듣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말하는 우리 후손님은 아나타의 후손이기도 했다. 카이든 블레이크 로하데를 말하는 거겠지.

“지난 번 회차에서 우리 후손님이 죽어버려서 몸을 빼앗는 건 포기하고 있었는데. 이번엔 쓸 만해져서 돌아왔어.”

제나스가 조그만 손으로 턱을 매만지며 무언가 생각에 잠긴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마지막이라서 기대가 커. 한방에 쓸어버리고 성녀만 남기면 될 것 같아.”

“실험을 한 번에 끝내버린다고?”

“응. 너무 오래 기다렸잖아. 아나타, 성녀가 ‘알레아’가 되겠지? 주사위 놀이에서 벗어난 7번째 행운의 수가 알레아잖아. 마지막에 살아남으면 또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할 텐데 불쌍하네.”

“마지막에 누가 살아남을지 내가 어떻게 알아.”

아나타가 짜증스럽게 대답했다.

“그냥 예측해봤어. 항상 신관들이 마지막에 살아남았잖아. 신의 가호를 받아서 행운을 타고난 족속들 말이야.”

제나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안식의 방문을 열며 아나타를 돌아봤다.

“유안나는 100년 만에 나타난 성녀라고 했으니 엄청난 신의 가호를 받았을 거 아니야. 기대 돼.”

그렇게 마지막까지 제 할 말만 한 그가 사라져버렸다. 혼자 방에 남겨진 아나타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제길, 대체 무슨 생각인거야.’

* * *

우리의 가장 큰 걱정은 루제프였다. 카이든이 내 마력을 써서 치유 마법을 시전해 보아도 그는 깨어나지 않았다.

“숨은 멀쩡히 쉬고 있던데…….”

유안나가 걱정스럽다는 듯이 카이든의 어깨에 들쳐 업힌 루제프를 바라봤다.

“조금 더 두고 보죠. 그래도 아직 무사하잖아요.”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흘끗 그녀가 메고 있는 가방을 쳐다봤다.

보급품 창고에서 있는 대로 털어왔다는데, 생각보다 쓸 만한 게 많았다. 아스달의 석궁은 물론, 새 검 두 자루와 조명탄 탄알도 있었다.

내가 자신의 가방을 보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유안나가 나를 보며 웃었다.

“그런데, 영애. 우리 이제 파트너 하기로 했잖아요.”

“우리가요?”

나는 당황해서 그녀에게 되물었다.

앞서 걷던 카이든이 미간을 좁히고 우리를 돌아봤다.

“이봐 성녀님. 마거릿한테 질척거리지 좀 마.”

카이든이 이런 말을 하면 이쯤에서 루제프가. 너나 잘하라고 한 마디 덧붙여줘야 하는데…….

“그건, 로드가 할 말이 아니지 않나?”

그때 루제프의 빈자리를 채우듯이 뒤이어 걸어오던 아스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이든이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은 것처럼 충격적인 얼굴을 하고는 나를 돌아봤다.

“그게 무슨……! 마거릿, 내가 너한테 질척거렸어?”

나는 카이든의 조급한 다그침에 웃음을 터트렸다. 또 시작이네.

처음엔 귀찮았는데, 이젠 귀여워 보이기도 했다. 희망이 가득 담긴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보는 것도 제법 귀엽네.

나는 가만히 카이든의 잘생긴 얼굴을 감상하다가 그의 어깨에 고이 잠든 루제프를 보았다. 그제야 루제프가 카이든에게 전해달란 말을 떠올랐다.

“아, 주교님께서 너한테 전해달라고 했던 말이 있어.”

“어? 무슨 말?”

카이든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잠시 입술을 달싹이며 망설였다. 왠지 조금 가슴이 아파서.

“자기도…… 쓸모가 있다고.”

그 말을 들은 카이든은 몹시 당황한 것 같았다. 그가 그런 표정을 보이는 것도 처음이었다.

“이야……. 나를 아주 졸렬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네…….”

카이든은 허탈한 얼굴로 말끝을 흐리며 중얼거렸다. 당혹은 여전히 감추지 못한 채였다.

“혹시 원혼 덩어리를 꺼내기 전까지는 주교님이 깨어나지 못하는 것 아닙니까.”

가만히 우리의 대화를 들으며 걷고 있던 디에고가 물었다.

그 말을 들으니 나는 조금 불안해졌다. 정말 그러면 어떡하지?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챙겨 다닐 테니까 걱정 마.”

카이든은 내 마음을 모두 안다는 듯이 내 머리를 토닥이며 위안을 해줬다.

“오늘은 여기서 야영을 하지. 내일 즈음에는 오두막에 도착하겠군.”

맨 앞에서 걷던 에녹이 지도를 보며 말했다.

잠자리는 나무 위에 마련하기로 했다. 아직 마물들이 전부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2인 1조가 되어 나무에 올라가기로 했다. 나는 성별이 같은 유안나와 팀을 이루었다.

내일이면 정말로 제나스를 만나고, 아나타를 구하고…….

만약 계획이 성공한다면, 돌아갈 수 있는 걸까.

기분이 이상했다.

‘정말 성공할 수 있을까?’

나무 기둥 위에 단단히 몸을 묶고 고개를 드니 유안나가 나를 보며 싱긋 미소를 짓는 게 보였다. 나는 그런 유안나의 얼굴을 멀거니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아직 그 질문을 안했는데. 그녀의 영혼이 섬에 묶여 있어서 탈출을 못한다는 얘기.

“궁금한 거 있어요?”

그녀가 느긋하고 여유로운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어느 상황에 닥쳐도 흔들림 없이 곧은 모습을 보이는 그녀도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벙커에서 보았던 회귀 전 영상에서 그녀가 눈물짓던 얼굴이 더 진정성 있게 다가왔다. 그간 그녀를 의심해온 나날들이 조금 미안해졌다.

내가 진짜 마거릿이라면, 나는 그래선 안됐다.

“정말 성녀님은 탈출 못 해요?”

“아…….”

내 물음에 그녀가 곤란한 질문이라는 얼굴로 탄식을 뱉었다.

“안타깝게도. 그렇게 됐네요.”

정말 방법이 없을까? 정말로?

“아나타라면……. 그녀라면 방법을 알 수도 있지 않을까요……?”

내 물음에 유안나가 대수롭지 않은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아무 기대도 없지만 그저 질문을 받았으니 억지로 답을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나무 기둥에 등을 기대고 앉아 하늘을 아련하게 올려다봤다. 말을 고르는지 한참을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가 다시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가 이 섬을 구축하고 ‘알레아’라는 시스템을 설계했다고 했으니까 아마 무언가 알지도 모르죠. 하지만 적어도 제게 알려준 정보 중에 그런 건 없었어요.”

그녀의 말에 나는 놀랐다. 몰랐던 사실이다.

“아나타가 섬을 만들었어요? 제나스가 아니라?”

“제나스는 실험을 기획하고 진행시키는 인물이었어요. 실제로 이 실험의 가장 큰 머리가 바로 제나스니까요.”

역시 망할 제나스.

하느님, 저 그 XX 죽이고 천국 갈래요.

제나스를 향해 이를 갈고 있던 중에 유안나가 내게 물었다.

“이 섬에서 나가면, 시간이 얼마나 흘러 있을 것 같아요?”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그건 나도 궁금한 부분이었다.

“저희가 이 섬에서 보낸 시간만큼 흐르지 않았을까요?”

“어쩌면 전쟁을 치르고 있을지도 몰라요. 각국의 주요 인사들이 없어졌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멀쩡한 게 더 이상하겠죠.”

전쟁이라.

나는 이제 다시 마거릿으로 살아가야 한다. 그러니 그쪽 세계 사람들에게 적응을 해야 하는데, 전쟁까지 터진 상황이라면…….

머리가 굉장히 아파온다.

“저도 모든 걸 다 아는 건 아니에요. 아나타가 제게 말해준 것만을 듣고 믿는 수밖에 선택지가 없었잖아요.”

가만히 나를 보던 유안나가 넌지시 내게 말했다.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해줄 수 없다는 듯이.

그녀 말이 맞다. 그녀도 실험의 피해자인데, 가해자가 해주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때, 디에고와 카이든이 옆 나무에서 다투는 소리가 들려왔다.

“빌어먹을! 여기선 마거릿이 안 보인다니까!”

“이미 로드께서 대부분의 자리를 확보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건 불평등한 자리배치입니다. 제가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카이든이 디에고에게 계속해서 자리를 비켜달라고 하는 모양인데, 덕분에 디에고가 자리를 빼앗겨 그답지 않게 짜증을 내고 있는 상황이었다.

나뭇잎과 나뭇가지에 내 얼굴이 가려져서 카이든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는데, 그게 이 다툼의 시작이었던 듯 했다.

하……. 부끄럽게 왜 저런 주책을…….

나는 카이든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었는데, 그런 나를 보다가 유안나가 물었다.

“마거릿, 저 두 남자 중에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예요?”

“……네? 카이든하고 디에고 경 중에서요?”

그녀의 물음에 놀라서 화들짝 반문한 뒤, 나는 카이든과 디에고 쪽을 쳐다봤다. 그러자 유안나가 손사래를 치며 말을 정정한다.

“아, 디에고 경 말고. 로드하고 황태자 전하 중에. 마거릿이 좋아하는 남자는 누구냐고요.”

“어……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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