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161)화 (161/234)

나는 그녀에게 안겨 얼떨떨한 얼굴을 했다. 아스달이 한량처럼 비스듬히 누워 우리를 빤히 쳐다보았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아는 사람 있나?”

물론 그의 말에 에녹도 카이든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들도 내게 상황을 전해 듣기는 했으나 더 자세한 건 유안나를 통해서 들어야만 했다.

아스달이 대충 좌중을 훑으며 눈치를 살피더니 불쌍한 척을 했다.

“또 나만 아무것도 모르는군. 성녀님, 그렇게 안 봤는데 굉장히 야박해. 내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어.”

물론 아무도 그의 말에 대답을 하지는 않았다.

“두 사람, 간만에 만나서 할 말이 많은 건 알겠어. 그런데 일단 한숨 자고 내일 하지.”

가만히 있던 카이든이 끼어들어 나와 유안나 사이를 갈랐다. 그리고는 딸을 챙기듯 살뜰하게 내 안색을 살피며 나를 잠자리에 눕혔다.

“마거릿은 쉬어야 해.”

다른 사람들의 반응이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한마디 끼어들었어야할 루제프가 조용하니 조금 마음이 울적해졌다.

‘저는 사실 사람을 싫어해서 성직자가 됐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깊이 있는 관계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성직자가 되고서 성가신 인간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없어 편했죠. 그런데 교리에서는 그러더군요. 인간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베풀라고.’

‘사실 이 섬에선 그런 척을 하지 않아도 돼서 편합니다.’

분명 그렇게 말해놓고선 모두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다니.

스스로 아니라고 부정하지만, 그는 누구보다 성직자란 이름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다.

‘얼른 루제프도 디에고도, 깨어났으면 좋겠어.’

나는 다른 사람들이 불침번 순서를 정하는 소리를 들으며 눈을 깜빡였다. 눈꺼풀에 무거운 추를 단 것만 같았다.

그렇게까지 힘들진 않다고 생각했다. 유안나에게 아직 물어볼 것이 많은데…….

마력을 너무 많이 소진해서인지 나는 어느 순간 잠들어버렸다.

* * *

고소한 냄새가 코를 간질거렸다. 달짝지근한 향이 산딸기 냄새 같기도 하고…….

“거기 왕자님, 요리 너무 못하시는 데 그냥 조용히 찌그러져 계시죠.”

“찌그……. 뭐? 이봐, 성녀님.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닌가. 그래도 뭘 좀 도와보겠다고 노력하는데 성의라도 알아주면 어디가 덧나나.”

“이런 빌어 처먹을. 이보세요들. 조용히 안합니까? 마거릿 깨겠습니다.”

“나 혼자로 충분하니, 전부 비켜 있었으면 좋겠군. 거슬린다.”

슬며시 눈을 뜨니 오두막의 벽난로 앞에 남자 셋과 여자 한명이 옹기종기 모여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게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남섬에서 지내던 날들이 떠올랐다. 마음에 평온이 찾아왔다. 다들 무사해서 다행이다.

‘아니, 아니지. 디에고랑 루제프는?!’

퍼뜩 든 생각에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괜찮으십니까?”

옆에서 누군가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몽사몽한 정신으로 고개를 돌리니 디에고의 얼굴이 보였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디에고 경?! 괜찮아요?!”

내 외침에 벽난로 앞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나를 돌아봤다.

“마거릿, 잘 잤어?”

“영애, 좋은 아침이에요.”

나는 벽난로 앞에 앉아 나를 향해 아침 인사를 하는 이들을 멍하니 본 다음, 다시 내 옆에 앉아 있는 디에고를 돌아봤다.

스스-!

은지가 디에고의 무릎 위에 떡하니 앉아서 나를 불렀다. 꼬리 끝을 강아지처럼 살랑살랑 흔드는 게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아니, 쟤는 저기가 어디라고 앉아 있는 거야?

디에고가 내심 뿌듯한 얼굴로 은지의 비늘을 쓰다듬는 게 보였다.

은지가 곧 디에고의 품에서 내려와 내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깨어난 것을 반기듯이. 나는 은지의 비늘을 살살 쓰다듬으며 디에고에게 물었다.

“괜찮으세요? 상처는…….”

나는 고개를 슬쩍 내려서 디에고의 복부를 쳐다봤다. 기사단복의 복부 쪽이 완전히 찢어져서 그의 탄탄한 복근이 드러났다. 상처가 있던 부위였다. 나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잠시 그의 배에 상처가 남아있는 건 아닌지 살폈다.

“괜찮습니다. 로드께서 영애의 마력으로 치료를 해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점잖은 얼굴로 대답한 디에고는 정말로 혈색이 좋아 보였다. 그는 나를 향해 고개를 숙여 감사인사를 전했다.

“감사합니다, 영애. 가슴 깊이, 진심으로.”

그러고선 무언가 복받쳐 오르는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무는 게 보였다.

모르긴 몰라도 마물의 모체에게 붙잡혀 간 뒤로 제법 고생을 했을 것 같다. 동굴에서 그를 처음 만났을 때의 몰골을 생각해보면 말이다.

“다들 식사하세요. 이제부터 탈출 계획을 세워야죠.”

유안나가 우리를 향해 말했다. 나는 디에고와 함께 벽난로 앞에 모여 있는 이들에게로 다가갔다.

카이든과 에녹이 자신들 사이로 나를 앉혔다. 그 모습을 보더니 아스달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누가 보면 어미 새와 아기 새인 줄 알겠어.”

“질투해도 마거릿은 안 보내줍니다.”

카이든이 내게 코코넛 그릇에 담긴 산딸기 스튜를 건네주며 말했다.

“질투라니, 무슨 말을…….”

아스달이 민망했는지 뺨을 긁적이며 흘끗 나를 봤다.

나는 코코넛 그릇을 입술 위로 기울여 스튜를 마시다가 의아한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나와 눈이 마주치가 아스달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뭐야, 왜 저래.

나는 아스달에게서 시선을 거둔 뒤에 유안나를 바라봤다.

“저, 성녀님한테 궁금한 게 있어요.”

“할 말이 많으시겠죠. 이해해요.”

그녀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았다.

정말 회귀를 한 게 맞는지. 회귀 전에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회귀 후에도 모든 걸 알고 있었던 건지, 제나스와 아나타의 목적이 무엇인지, 그들이 우리를 납치한 이유가 정말 우리를 죽여서 마력을 갈취하려고 하는 건지, 차원의 문이 의미하는 건 뭔지.

사실 가장 묻고 싶었던 질문은 정말로 그녀는 이 섬을 못 나가는지에 대해서였다.

하지만 그 질문을 이 자리에서 하면 그녀가 곤란해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 수많은 질문을 제치고 내가 먼저 그녀에게 물었던 건,

“저희, 탈출할 수 있는 건가요?”

였다.

“할 수 있어요. 제가 그렇게 만들 거예요.”

유안나는 마치 다짐을 하듯이 그렇게 확고히 대답했다.

“어떻게 할 수 있다는 건지 궁금한데.”

산딸기 스튜를 한입에 털어 넣은 카이든이 유안나를 향해 물었다.

유안나가 들고 있던 코코넛 그릇을 내려놓고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이윽고 그녀가 익숙한 열쇠 하나를 꺼냈다.

Return이라는 글자가 적힌 열쇠였다. 그리고 그 위엔 란그리드 제국어로 [출구 열쇠]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지.

“이 섬을 설계한 마법사 남매가 있어요. 그들이 지내는 오두막 지하에 ‘문’이 하나 있거든요? 거기가 바로 알레아 섬의 시공간을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예요. 이 열쇠로 그 문을 열 수 있고요.”

그녀의 말에 아스달이 마법사 남매는 뭐고 알레아 섬은 뭐고 질문 공세를 시작했다.

나는 그에게 천천히 답변을 해주는 유안나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역시 Return과 출구 열쇠라는 단어가 같이 적힌 이유가 있었다. 제나스가 그녀에게 준 열쇠가 만능 열쇠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나스는 왜 그런 만능 열쇠를 유안나에게 줬을까. 그녀가 탈출구를 열지도 모르는 일인데.

-차원의 문은 제나스만이 열 수 있어. 그것도 그냥 열 수 있는 건 아니고……. 실험이 모두 끝난 뒤에, 죽은 이들의 마력을 끌어 모아야 가능해. 한두 사람의 마력으로 열리는 문이 아니거든.

-그렇다고 차원의 문을 열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야. 네가 그 열쇠로 회귀게이트를 열면 차원의 문도 열릴 거거든. 마거릿은 그때 내가 데려올게. 제나스는 아직 우리가 결탁한 사실을 모르니까 신속하게 움직여야 해.

나는 회귀 전 아나타가 유안나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리고 황급히 크로스백에서 유안나의 일기를 꺼냈다. 비에 젖고 뜯겨 글씨를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내용을 대충 알고 있어서 읽기 어렵지는 않았다.

[제나스가 안식을 취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줬다. 그리고 그에게서 열쇠를 받았다. 모든 문을 열 수 있는 만능열쇠라고 했다.]

[오늘 제나스가 알려 준 장소를 찾아 떠나려고 한다. 그곳에서 안식을 취할 예정이다. 기록용으로 쓰고 있는 책도 아마 그곳에서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제나스가 유안나에게 알려줬다는 안식을 취할 수 있는 방법. 이건 분명 차원의 문을 여는 방법이었을 거다.

아나타가 차원의 문은 제나스만이 열 수 있다고 분명 그랬다.

실험이 모두 끝난 뒤에, 죽은 이들의 마력으로 여는 문이라고 했으니 유안나가 벙커에서 안식, 즉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실험이 완성 되는 거였다.

그런데 제나스는 왜 직접 가서 차원의 문을 열지 않고 유안나에게 스스로 그 일을 하도록 시킨 걸까.

실험자가 피실험자의 죽음에 개입하지 않는 게 규칙이라면, 유안나를 직접 죽이지 못하고 죽음을 유도했을 가능성이 컸다.

‘그럼 유안나가 목숨을 끊으면, 그때 등장해서 차원의 문을 열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네.’

내가 들고 있는 일기를 보던 유안나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회귀 전 이야기를 조금 해볼게요. 모두가 죽고 나서 저 혼자 죽을 날만 기다리며 지내다가 제나스의 오두막에 거둬졌어요. 그리고 그곳에서 지내며 아나타와 부쩍 가까워졌죠.”

유안나가 슬쩍 내 옆에 앉은 카이든을 쳐다봤다.

“아나타도 후손의 죽음에 많은 충격을 받은 눈치였어요. 그래서 우리는 회귀게이트를 돌릴 방법을 찾았죠.”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를 포함한 모두가 카이든을 돌아봤다. 얌전히 우리의 대화를 듣던 그는 제게로 쏠리는 시선에 관심 없다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유안나가 나를 돌아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저까지 죽으면 마지막 실험이 완성되는 거였어요. 제나스의 목적은 제가 스스로 목숨을 끊게 만들고 차원의 문을 여는 것이었죠. 그래서 저는 그에게 안식을 취할 수 있는 방법을 물어봤어요. 우울한 기색을 내비치며 죽고 싶다고 호소하며 연기했죠.”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회귀 전에 제나스 남매가 자신들의 오두막으로 유안나를 거둔 이유는 마지막 안배였던 걸까.

제나스가 나를 자신의 오두막으로 데려갔던 것처럼 말이다.

“제나스가 옳다구나 제게 벙커의 위치를 알려줬어요. 안식을 취하기엔 그곳이 적당하다면서요. 그 당시만 해도 제나스가 아나타를 굳게 믿고 있을 때라서 아나타가 직접 저를 데려다 준다고 하는 걸 믿었어요. 그는 설마 우리가 결탁해서 회귀게이트를 열어버릴 줄은 몰랐던 거죠.”

이미 내게서 한차례 설명을 들은 적 있는 에녹과 카이든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일이 그렇게 됐던 거군.”

에녹의 중얼거림에 나는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만능 열쇠의 의미는 대체 뭘까요. 단순히 벙커만 열라고 모든 문을 열 수 있는 마스터키를 주진 않았을 텐데.”

“혹시 자신의 계획이 틀어질 때를 대비해서 수를 쓴 거 아니야?”

카이든이 짜증스레 미간을 좁히고는 내게 물었다.

설마, 유안나와 아나타가 회귀게이트를 열지도 모른다는 걸 예측하고 있었다던가…….

“그럼 그 열쇠를 사용해서 ‘뭔가’를 여는 게 함정일 수도 있겠네.”

아니면 진짜 열쇠인지 아닌지 맞춰봐라, 맞으면 탈출하고 아니면 죽고. 뭐 그런 데스 게임이라도 하고 싶었던 걸까.

곰곰이 제나스의 의도를 파헤쳐보려고 했지만, 그 미친놈이 하는 미친 생각 따위를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망할 제나스.

아나타가 제나스를 배신했다고 하지만, 그녀도 지금껏 수많은 사람들을 죽여오지 않았나. 쉽게 믿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선 도움을 요청할 사람이 그녀뿐인 것도 사실이다.

나는 눈높이에 맞춰 아스달과 디에고에게 차근차근 설명을 하고 있는 유안나를 보며 물었다.

“우선 제나스의 오두막으로 가서 아나타를 데려오죠. 그녀라면 탈출하는 다른 방법을 알지도모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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