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기랄. 마거릿, 조심해.”
“위험하면 무조건 도망쳐라. 그대가 더 중요하니까.”
카이든과 에녹이 걱정된다는 얼굴로 당부를 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파급력이 큰 조명탄을 들고 있는 내가 앞에서 은지와 함께 길을 텄고 유안나가 뒤에서 오는 잔챙이들을 처리했다.
간간히 위험할 때면 아스달이 석궁으로 도움을 주었고 에녹과 카이든도 한손으로 검을 든 채 싸우며 뛰었다.
그렇게 힘들게 사투를 벌인 끝에, 우린 다행히도 아스달이 있는 곳에 간신히 도달할 수 있었다.
아스달의 뒤로는 동굴 안으로 들어가는 듯한 길이 나 있었는데 그가 우리에게 손짓하며 그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우리가 그 좁은 길로 들어가자마자 귀신같이 입구가 무너져 내려 길이 막혔다. 다행히도 더는 마물에 쫓기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시름을 덜었다.
“길이 짧아서 금방 나갈 수 있어요. 조금만 더 가면, 밖이에요.”
유안나가 아스달과 함께 앞장서서 어두운 동굴 속을 헤쳐나갔다.
우리는 그녀 말대로 머지않아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밝은 빛이 쏟아지자마자 나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우리가 오는 길에 봐둔 오두막이 있는데, 그곳으로 피신하는 게 좋겠어.”
아스달의 말에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함께 움직였다.
* * *
서로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다시 만난 감회를 나눌 새가 없었다.
1층짜리의 좁은 오두막에 들어와서 우리는 디에고와 루제프의 상태를 먼저 살폈다. 그들이 여전히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중 복부를 관통당한 디에고의 상태가 가장 위중했다.
뒤이어 부상을 당했다는 아스달도 살폈는데, 그도 제법 많은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그러나 디에고를 치료하는 데에 내 마력을 모두 소진한 바람에 아스달에게는 카이든의 치료 마법을 쓸 수 없었다.
나는 카이든이 챙겨온 배낭에서 구급약통을 꺼냈다. 아스달의 상처를 치료할만한 약품들을 골라내고는 그의 상처를 자세히 살폈다. 긁히고 찢긴 상처가 가득했다.
“뼈가 부러졌다고요? 아니 뼈가 부러진 거면 그 높이에서 떨어지는 나를 받아낼 수가 없었을 텐데?”
내 물음에 아스달은 살포시 미간을 찡그렸다가 느긋한 미소를 지었다. 이런 심각한 와중에도 기품을 유지하고자 애쓴다니. 왕자님답다.
아스달이 슬그머니 셔츠를 걷어 피멍이 든 갈비뼈를 보여주며 말했다.
“이전에 영애가 다쳤을 때와 비슷한 증상인 것 같던데. 금이 갔다고 했던가.”
하지만 내가 의사도 아닌데 겉으로만 봐서 어떻게 알겠는가. CT를 찍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상처가 금방 낫는 모양인지, 눈에 띄게 회복이 되긴 하더군. 영애 말대로 영애를 받아내느라 상태가 좀 악화되긴 했다네.”
아니, 그럼 그렇게 아픈 와중에 석궁을 쏘아대며 우리를 도운 거라니. 어떤 의미에선 아스달도 정말 대단하고 독했다.
상처를 살짝 눌렀을 때의 반응을 보아선 뼈에 금이 간 것이 맞는 것 같다. 뼈가 부러졌다면 아마 움직이는 것조차 어려웠을 테니 말이다.
고통스러운 신음을 뱉던 아스달이 잠시 심호흡을 하며 내게 말했다.
“직접 겪어보니 알겠더군. 그간 미안했다. 고생 많았어.”
나는 그의 상처에 약을 바르다가 고개를 들었다. 너무도 의외의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아스달도 민망했는지 슬쩍 시선을 회피했다. 늘 능글맞게 굴던 그가 민망해하는 것도 처음 본다.
“그래도 부디 이해해주게. 나를 희생하며 다른 사람의 입장을 고려하는 인생 같은 걸 내가 살아봤어야지.”
나는 그 말에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제라도 알아주셔서 감사하다고 해야 하나요?”
“감사할 것까지는 없는데.”
“반어법 모르시나 봐요.”
“꼬인 인생을 산 적이 없어서 꼬아하는 말을 잘 이해 못 해.”
“정치하시는 분이 큰일이네요.”
“그리 걱정해주다니, 기쁘군. 영애가 참 그리웠어. 빈자리가 굉장히 크게 느껴졌지 뭔가.”
아스달은 정말로 내가 반갑다는 듯이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참 여전히 김 부장이 생각나게 할 정도로 넉살은 좋아 보인다.
“저는 별로 그립진 않았어요. 오히려 잘됐다 싶기도 했거든요. 그러니 있을 때 잘하지 그러셨나요. 지금도 도움 안 되면 여기에 저하를 버리고 갈 거예요.”
“이런, 그건 안 될 말이지. 어떻게 여기까지 영애를 찾아왔는데. 앞으로 잘 하겠네.”
아스달은 여전히 정말 말이 많았다. 나는 늘상 그래왔듯이 그가 하는 말을 대충 한귀로 흘렸다.
우리의 주위를 에워싼 일행은 서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유안나와 오랜만에 만났으니 안부인사라도 할 법한데, 모두 내가 먼저 말문을 트기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에녹, 카이든. 이리 와 봐요. 상처 보여주고.”
뒤이어 나는 에녹과 카이든의 상처도 봐주고는 구급약통을 닫았다.
에녹과 카이든의 상처를 치료하고 있는 날 보던 아스달이 옆에서 종알종알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영애도 그 옷은 보급품이 있던 장소에서 구한 건가? 언뜻 봤는데 지나치게 야한 것 아닌가? 남사스럽네.”
상처 치료가 끝난 에녹이 참다 못해 짜증스럽게 아스달을 노려봤다.
“장난은 그쯤 해. 일단 그간의 상황을 얘기해보지.”
“반황, 서운하게 그럴 겐가. 조금 더 친근하게 내 안위를 좀 물어주면 좋잖아. 우리 친우인데.”
“이봐 건방달. 좋은 말로 할 때 입 다물고 있는 게 좋을 텐데. 우리가 친우였던 적이 있기는 했던가?”
에녹이 건빵왕자를 부르는 소리도 오랜만에 듣는 것 같다. 에녹에게서 유치한 면모를 끌어내는 유일한 이가 건빵왕자라는 것도 변함은 없었다.
아무튼 우리는 자리를 대충 정리하고 디에고와 루제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물의 모체를 몸 안에 봉인했다고요?”
유안나가 심각한 얼굴로 내게 되물었다.
“네. 성녀님도 아시겠네요. 사제라면 모두 알고 있는 내용인 것 같았어요.”
“아, 네. 교리 시간에 배워요. 이론적으로만 배우는 거지만.”
유안나가 긍정하며, 깊게 생각에 잠긴 얼굴로 손등에 턱을 괴고는 기절한 루제프를 쳐다봤다. 우리는 모두 그녀가 다시 말을 꺼내기를 기다렸다.
한참의 침묵 끝에 그녀가 입을 열었다.
“주교님께서 깨어나도 문제일 것 같네요.”
“왜요?”
“몸속에 봉인을 한 거면, 원혼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한 거잖아요. 그렇죠?”
“아……. 그렇죠.”
“마물의 진화를 촉진할 정도의 원혼이면, 분명 이 섬에 거대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존재일 거란 말인데…….”
그녀의 말이 맞다. 제나스도 어찌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존재가 아니었던가.
“마물들이 새롭게 생겨난 것들이 아니라, 섬의 일부인 동물이 진화한 거잖아요? 그런데 그것에 문제가 생긴다면…….”
유안나가 곰곰이 생각하는 얼굴로 턱을 쓰다듬다가 결론을 내렸다.
“섬을 구성하는 조직의 일부가 붕괴될 것 같아요. 섬을 이루는 구성 요소들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요. 하나가 붕괴되면, 연결 고리가 약해져서 나머지도 붕괴되기 쉽죠.”
“그럼 좋은 거 아니야?”
가만히 우리의 대화를 듣던 카이든이 물었다. 유안나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그건 알 수 없죠. 과연 우리에게 좋은 일인지, 제나스에게 좋은 일인지.”
나는 그녀의 말을 듣다가 뇌리를 스치는 생각에 한숨을 내쉬었다.
“제나스에게는 좋은 일일지도 모르겠어요. 마물의 모체를 없애면 마물이 진화를 멈출 거라고 알려준 사람이 제나스였거든요.”
그가 내게 해줬던 말이 진심이었는지 아니면 정교한 함정이었는지 구별할 능력이 내겐 없다. 피실험자와 실험자의 대화니까. 애초에 시작부터 불공정한 싸움이었다.
“주교님께서 깨어나실 때를 대비해야겠네요.”
내 중얼거림에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앉아 우리의 대화를 듣던 카이든이 끼어들었다.
“따가리 주변으로 결계를 쳐두는 게 좋겠어. 혹시 모르니까.”
“지금은 마력을 전부 소진해서…….”
내가 당황한 얼굴로 말끝을 흐리자 카이든이 놀라서는 손사래를 쳤다.
“물론 당장 하자는 건 아니고. 네 몸이 회복할 때까지 기다려야지. 그 전에 깨어나면 어쩌겠어. 우리 운명이지.”
“참 태평한 말이 따로 없군.”
가만히 우리 대화를 듣던 아스달이 느긋하게 한마디 보태자 카이든이 그를 돌아보며 빈정거렸다.
“그러는 왕세자 저하께선 달리 방법이 있으십니까?”
“…….”
“말이라도 안하면 중간이라도 간답니다.”
“누가 그러나.”
“마거릿이요.”
대화를 듣던 에녹과 유안나마저 나를 쳐다봐서 민망해졌다.
“미안하네, 마거릿. 그대 말에 반박하려던 건 아니었어.”
아스달이 아주 빠르게 내게 사과했다. 이전과는 정말로 확연히 달라진 태도였다.
나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이다가 결국 화제를 전환했다.
“일단 오늘은 하루 휴식을 취하고 체력을 회복한 뒤에 계획을 세우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내 말에 모두가 동의한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부상자인 아스달과 마력을 회복해야하는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돌아가면서 불침번을 서기로 했다.
유안나도 부상자인 아스달도 불침번을 선다는데 나 혼자 잠을 자는 건 무척 미안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내게 잠이나 자라고 말했다.
결국 우리는 오두막에서 하룻밤을 지내기로 하고 잠자리를 만들었다.
“플로네 영애.”
내가 누울 곳에 나뭇잎을 깔다가 나는 고개를 들었다. 연갈색 단발머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유안나가 살포시 고개를 기울이고는 나를 보며 눈웃음을 지었다.
“다시 봐서 반갑네요. 보고 싶었어요. 우리끼리는 따로 할 말이 많죠?”
나는 그 말의 의미를 너무도 명확히 알았다. 이건 회귀 전의 마거릿을 향해 하는 소리인 게 분명했다.
“성녀님. 마거릿한테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 마.”
카이든이 유안나를 경계하며 내 옆에 바짝 섰다.
“플로네 영애와 할 말이 있는데 비켜주시겠어요? 거슬리네요.”
물론 유안나는 보통 성격을 가진 여자가 아니다. 웃는 얼굴로 지지 않고 카이든에게 대거리한다.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은 동족 혐오를 하듯 서로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나는 유안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기억하고 계신가요? 전부.”
내 물음에 유안나는 동요 없는 얼굴로 미소 지었다.
“전부 기억난 건, 최근인데. 지하 벙커에서 ‘그걸’ 보셨나 보군요. 영애는 그럼 제가 아는 플로네 영애가 맞나요?”
“잠깐만, 두 사람 질문과 대답이 왜 그 모양이야? 암호 주고받나?”
아스달이 상황파악을 못하고 우리의 대화를 끊었다. 그러자 카이든이 혀를 찼다.
“모르겠으면 그냥 조용히 입 닫고 계십쇼. 초 치지 말고.”
카이든의 말에 아스달이 불만을 토로하다가 에녹에게 추가로 한소리를 듣고 입을 다물었다.
“마거릿은 맞는데, 마거릿이 아니에요.”
이 정도만 말해도 유안나는 알아들었을 것이 분명했다. 내 대답에 유안나가 알 수 없는 얼굴을 하고는 잠시 나를 빤히 바라봤다. 이윽고 그녀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마치 울음을 참아내듯이.
“그래서 결론은 마거릿이라는 거죠?”
“네. 마거릿은 맞는데…….”
유안나가 대뜸 나를 끌어안았다.
“고마워요. 무사히 돌아와 줘서.”
목소리에 옅게 울음기가 묻어 있었다. 나를 끌어안은 그녀의 등이 파르르 떨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