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159)화 (159/234)

)23.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희생

쿠르르릉-

번개가 내리친 탓인지 동굴이 무너지며 빛이 새어 들어왔고 하늘이 보였다. 여전히 밖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크와악-!

그리고 우리의 주변으로는 기다렸다는 듯이 엄청난 수의 마물들이 몰려들었다.

마물의 모체를 없애면 다 끝나는 줄 알았는데, 말 그대로 진화만 멈추게 하는 걸까?

아직 마물의 모체, 그러니까 원혼 덩어리를 봉인한 루제프가 깨어나지 않았으니 마물들의 마지막 발악일 수도 있다.

에녹과 카이든이 각각 디에고와 루제프를 업은 채로 뛰었다. 나는 그들의 뒤를 따라 달리며 조명탄을 장전했다.

그리고 해머를 당겨 내린 뒤, 몰려드는 마물을 돌아보며 방아쇠를 당겼다.

피슈웅- 펑!

우리들을 향해 달려들던 마물이 터져나가는 것을 보고 나는 다시 탄알을 넣어 장전했다. 여분의 탄알이 거의 떨어져 가는데 큰일이다.

내 몸에 감겨 있던 은지가 지척까지 다가온 마물을 향해 불을 뿜었다.

화르륵-

쿠웩!

기괴한 형태의 마물 두어 마리가 떨어져나갔다. 나는 은지에게 고맙단 인사를 하고 다시 앞을 향해 달렸다.

그나마 도움을 주던 반딧불이 벌레들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달려도 끝이 보이지 않는 공터만 우리를 반겼다.

‘근데 난 메그가 살아남았으면 좋겠다. 일종의 도박? 재미라고 해두자. 좀 힘내 봐. 여긴 알레아 섬이잖아.’

알레아 섬.

애초에 동물이나 마물 같은 건 알레아에 해당되지 않는다. 알레아의 의미가 그랬다. 도박이나 행운은 인간에게만 해당되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이 섬에 마물이 돌아다니는 건 알고 있지?’

‘걔들이 처음부터 있었던 건 아니야.’

‘……뭐?’

‘처음엔 다들 평범한 생명체였어. 그런데 점점 진화를 하더라.’

‘마물이?’

‘응.’

그래서 제나스가 마물의 진화를 어찌하지 못했던 것 같다. 마물이란 것도 제나스의 말에 의하면 알레아의 시스템에서 변이된 것이니까.

그렇다면 원혼들은 어느 정도 원하는 바를 달성한 게 아닐까. 게다가 원혼이 마물을 진화시키기까지 했다니. 정말 얼마나 한이 많이 쌓였으면.

‘하긴 천년동안 쌓인 한이라면 가능할지도.’

대체 이 실험의 최종 목적이 뭘까. 카이든의 어린 시절 실험 얘기를 생각해보면 단순히 제나스와 아나타만이 계획한 실험은 아닐 것 같다.

목적도 제나스의 개인의 이익을 위한 건 아니었을 것 같고.

나는 그런 생각을 하다가 다시 조명탄을 장전했다. 그런 뒤, 해머를 내리고 방아쇠를 당겨 지척에 다가온 마물들을 향해 쐈다.

퍼엉-!

“제길, 길이 보이지 않는데.”

카이든이 조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머리 위에선 동굴이 무너지며 거대한 돌덩어리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크와악!

우리는 끝내 마물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대체 어디서 나온 건지 죽여도죽여도 끝이 보이질 않았다.

“마거릿, 조심해.”

디에고를 어깨에 들쳐 업은 에녹이 나를 자신의 등 뒤로 밀어 넣으며 말했다.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았다.

나는 남은 탄알을 살폈다. 한 열다섯 발 정도 남았으려나.

“마거릿 뒤로.”

디에고를 바닥에 내려둔 에녹이 장검을 뽑아들고는 마물들 사이로 걸어 들어갔다. 카이든도 마찬가지로 루제프를 바닥에 내려놓은 다음 단검을 꺼내들었다.

“여기 지켜줘.”

그 역시 단검을 들고 마물을 상대했다.

내 허리를 휘감고 바닥으로 내려온 은지가 루제프와 디에고 앞을 경계하며 마물이 다가올 때마다 불을 뿜었다.

나는 조명탄을 들고 에녹과 카이든을 엄호하며 마물 소탕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마물은 끊임없이 몰려들어서 도무지 끝이 보이질 않았다.

점점 그렇게 힘에 부쳐 지쳐갈 무렵이었다.

끼이익-

머리 위에서 들려온 소리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하늘을 나는 마물이 있었다. 무너지는 천장 사이로 커다란 박쥐 형상의 마물이 날아왔다.

‘젠장, 불길한데……?’

나는 조명탄의 방아쇠를 당겨 눈앞에 날아오는 박쥐를 명중시켰다. 문제는 날아오던 게 한 마리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아니나 다를까. 놈들이 내 허리를 낚아챘다.

“XX……!”

은지가 놀라서 불을 뿜으려다가 내가 다칠까 멈칫하는 게 보였다. 은지와 함께 땅이 순식간에 멀어졌다.

이 말만 몇 번째 하는지 모르겠지만, 마력을 가진 게 죄인가? 마물들은 왜 이렇게 나만 좋아하는 거야!

“마거릿!”

두 남자가 놀라서 내 쪽으로 다가왔지만, 나는 순식간에 그들의 손이 닿을 수 없을 높이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때,

피융-! 푹!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촉이 나를 낚아챈 박쥐의 몸통에 명중했다.

“으악!”

눈을 질끈 감고 추락하는 순간 다행히도 누군가가 나를 받아냈다.

“플로네 영애, 오랜만이로군. 여전히 인사가 화려해.”

낯설지 않은 목소리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남자의 목소리였다.

떨어지는 나를 받아낸 이는 다름 아닌 아스달이었다.

“건빵 왕자님?”

멍한 얼굴로 그렇게 중얼거리자 아스달이 인상을 와락 구겼다.

“괜찮은 모양이군.”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그의 품에서 내려왔다.

아스달은 카고 바지에 검은 후드를 입고 있었다. 곱상한 왕세자 이미지에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을 복장이었는데, 잘생겨서인지 꽤 매력적으로 소화한다.

이 근처에 보급품이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아스달이 찾은 모양이다.

“마거릿!”

그리고 아스달의 뒤편에서 튀어나온 여자가 나를 덥석 끌어안았다. 유안나였다.

아스달과 마찬가지로 그녀는 테크웨어 스타일의 점프수트를 입고 있었다.

“무사했군요! 다행이에요. 그럴 줄 알았지만.”

유안나가 내 양 뺨을 움켜쥐고는 안색을 꼼꼼하게 살피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그녀가 언제부터 나를 마거릿이라고 불렀지?

“마거릿!”

“괜찮아?!”

그때 멀리서 에녹과 카이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물에 둘러싸인 그들은 디에고와 루제프를 보호하느라고 이쪽으로 다가오지 못한 모양이다.

그들을 넌지시 바라보던 유안나가 싱긋 웃음을 지었다.

“나가는 길이 있어요. 그 전에 저분들부터 데려와야겠네요?”

그렇게 말한 유안나가 메고 있던 배낭에서 도끼를 꺼내들었다.

‘……잠깐? 도끼?’

유안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전에도 의문스러운 구석이야 많았지만 늘 한발자국 뒤로 물러난 태도를 취하곤 했는데, 지금은 그 누구보다 적극적이었다.

그녀가 아스달을 돌아보며 당부했다.

“우리 왕자님은 부상자니까 여기 계시고요. 제가 다녀올게요. 석궁으로 엄호만 해주세요.”

부상? 그러고 보니 아스달의 몸에 상처가 가득했다. 자존심이 무척 강한 아스달이 부정하진 않는 걸 보니, 꽤 심각한 모양이다.

아까 내가 떨어질 때 나를 받아들며 더 악화된 거 아니야?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어 나도 그에게 뒤에서 엄호만 해달라며 당부했다.

“같이 가요. 저한테도 무기가 있어요.”

나는 남은 탄알을 다시 확인한 뒤, 조명탄을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유안나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시죠.”

도끼를 휘둘러 마물을 죽이는 건 생각보다 어렵다. 악력이 좋아야 했기 때문이다.

퍽.

나는 유안나가 도끼로 마물의 머리통을 내리찍는 걸 보고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도끼로 마물을 죽이는 성녀라니.

하지만 감상하고 있을 틈은 없었다. 유안나와 등을 맞대고 반 바퀴 돌아 달려드는 마물을 향해 조명탄의 방아쇠를 당겼다.

퍼엉! 펑!

하긴, 조명탄으로 마물을 쏴 죽이는 귀족 영애인 내가 할 말은 아닌 것 같긴 했다.

또 한 마리 처리한 유안나가 잠깐 숨을 고르며 말을 붙였다.

“무의식중에도 예전과 같은 영애를 생각하고 제압을 해야 탈출까지 평온하겠다고 생각 했지 뭐예요.”

응? 이게 무슨 소리지?

“시중 얘기는 사과할게요. 우린 그보다 훌륭한 파트너 같지 않나요?”

그렇게 말한 유안나가 나를 보며 예쁘게 미소를 지었다. 이윽고 그녀가 다시 도끼를 휘둘러 달려오는 지네형 마물의 몸통을 끊었다.

설마……. 회귀 전 일을 기억하는 건가?

“……그런 힘을 가지고 계셨으면서 그동안은 왜 도망만 다녔어요?”

나는 에녹과 카이든을 향해 달려가며 유안나를 향해 물었다. 그녀가 뺨에 튄 마물의 검은 피를 닦아내며 대답했다.

“무기가 없었잖아요. 작살로 마물을 죽일 정도의 실력은 안 되고. 그렇다고 검을 다룰 줄은 모르고.”

퍽!

푸슝- 퍼엉!

유안나의 도끼 소리와 내가 쏜 조명탄이 터지는 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유안나와 나는 숨을 헐떡이며 잠시 멈췄다.

에녹과 카이든이 지척에 있었다.

“저는 밑바닥 인생을 살던 사람이었어요. 안 해본 게 없죠. 고귀한 성녀? 웃기고 있네.”

그렇게 말한 유안나는 내 손을 당겨 나를 자신의 뒤로 밀었다. 내가 있던 자리를 향해 마물이 달려들었는데 멀리서 날아온 화살이 마물의 머리에 꽂혔다.

명중이다.

고개를 돌리니 멀리선 아스달이 석궁을 조준하고 있다가 내려놓고는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저 석궁도 아마 보급품 창고 같은데서 가져온 게 아닐까 싶었다.

“마거릿!”

지척에 있던 에녹이 달려와 일행이 있는 방향으로 우리를 끌어당겼다.

단검만으로 마물을 상대하던 카이든이 마물은 팽개치고 내게 달려와서는 안색을 살폈다. 그리고는 유안나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성녀님은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거야?”

“지금 그런 한가한 대화를 할 때인가요?”

카이든의 당황한 물음에 숨을 헐떡이며 대답한 유안나가 디에고와 루제프를 가리켰다.

“두 분이 두 남자를 업고 뛰세요. 저희가 전방과 후방에서 마물을 상대할게요. 위험하단 소린 마세요. 다른 방법은 없으니까.”

유안나가 박력 있게 말하고는 에녹과 카이든의 등을 떠밀어 디에고와 루제프를 업게 했다.

은지가 내게 다가와 재빠르게 몸통을 타고 올라와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나는 에녹과 카이든이 뭐라 다른 말을 덧붙일세라 재빨리 유안나의 말을 이어 받았다.

“맞아요. 건빵왕……. 아니 왕세자 저하께서도 저쪽에서 우리를 엄호해주고 있고 은지도 있잖아요. 자, 그럼 뛸까요?”

나는 조명탄을 장전하고 유안나를 쳐다봤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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