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158)화 (158/234)

“담는다고요? 저것들을? 위험하잖아요!”

“감당할 수 있습니다. 이 정도도 감당 못 한다면, 대주교 자격 미달입니다. 원혼들은 섬에서 탈출한 뒤에 따로 빼내어 봉인해주면 됩니다.”

귀신들의 넋을 달래어 한을 풀어주는 방식과 비슷한 모양이다.

“어떻게 하는 건데요? 위험한 거 아니에요? 신력을 사용할 수도 없으시잖아요. 그리고 저게 그냥 원혼이 아닌 거 아시죠? 마물의 진화를 촉진시킬 정도로 강력한 모체라고요.”

“봉인석만 있으면 됩니다. 봉인석은 그 자체로 신성한 힘이 담긴 물건이라 신력이 따로 필요치 않습니다.”

봉인석?

“그걸 지금 가지고 있어요?”

내 물음에 루제프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사제복 안으로 넣었던 목걸이를 밖으로 뺐다.

태양처럼 동그랗고 화려한 문양을 한 펜던트의 끝은 열쇠 모양으로 되어 있었다.

“대주교라면 항상 몸에 지니고 있는 겁니다.”

나는 미간을 좁히고 그의 말을 듣다가 다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저 마물의 모체를 주교님 몸에 담는다고 쳐요. 그 뒤로 어떤 일이 생길지는 주교님도 모르는 거잖아요.”

“이런 사례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신학도 시절, 이론으로 배우기도 했고요.”

“이론과 실제가 다른 건 알고 있죠?”

“물론입니다. 아, 혹시 제가 정신을 못 차리면 로드께 한마디만 전해주시겠습니까?”

“뭐라고요?”

내 물음에 잠시 루제프가 머뭇거렸다. 이윽고 그는 민망한 얼굴로 뺨을 긁적이며 말했다.

“저도 쓸모가 있다고요.”

나는 할 말을 잃고 루제프를 마주 봤다.

에녹과 카이든이 저세상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그렇지, 루제프가 쓸모없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는 그만의 방식으로 나름 노력하고자 했으니까.

그런데 그동안 이런 생각을 갖고 그것에 마음 쓰고 있었다니. 왜 그동안 그를 마음 써서 격려해줄 생각을 못했을까.

이 상황에서 내가 루제프를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이 정말 없는 걸까.

“그런 표정 마세요. 죽는 것도 아닌데.”

내 표정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루제프가 웃으며 말했다.

그는 목에 걸린 목걸이를 풀고 열쇠의 뾰족한 부분으로 손바닥에 동그라미를 그어 상처를 냈다.

[아, 안 돼! 안 돼!]

그때 나무가 제 불길한 미래를 예견이라도 했는지, 우리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나무가 내지르는 포효가 어찌나 거센지, 동굴전체가 흔들릴 정도였다. 고막이 찢어질 듯 아파서 나는 황급히 귀를 막았다.

은지가 멀리서 나무를 향해 불을 뿜었으나 나무는 새하얀 빛을 내며 불마저 전부 흡수해버렸다.

망할, 진짜 루제프가 그릇을 자처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는 건가.

우리를 향해 빠른 속도로 뻗어온 나무줄기는 루제프가 아닌 나를 공격했다. 송곳처럼 날카롭게 변한 나무줄기가 나를 꿰뚫듯이 공격적으로 다가왔다.

[마력! 당장! 내놔!]

“마거릿!”

“영애!”

세 남자의 당황한 외침이 들렸다. 나는 침착하게 크로스백에서 조명탄을 꺼내 장전하다가 재빠르게 바닥을 한번 굴렀다.

내가 조금 전까지 있었던 땅으로 나무줄기가 깊게 박힌 게 보였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 위로 뛰어올라 나무줄기를 타고 나무 본체까지 올라갔다. 나무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얼굴들이 빠르게 나를 향해 돌아갔다. 희번뜩 뜬 눈들이 소름끼쳤다.

땅에 박힌 나무줄기가 나를 공격하기 위해 빠르게 되돌아왔다. 난 조명탄의 해머를 당겨 내리고 나무의 본체를 향해 조준하며 방아쇠를 당겼다.

펑! 퍼엉!

은지의 불을 흡수해버릴 때 예상하긴 했지만, 역시나 조명탄의 불꽃까지 전부 흡수해버린다.

제기랄, 생각해야 해. 할 수 있어.

나는 4m 높이 되는 나무의 본체 위에서 아래로 어떻게 떨어지면 잘 떨어질 수 있을지 머리를 굴렸다.

골절 정도로만 끝나면 좋겠는데.

그렇게 결심하고 아래로 뛰어내리려던 찰나였다.

[크아악!]

갑자기 원혼 나무의 고통에 찬 비명이 들려왔다. 내게로 가까이 다가왔던 나무줄기가 다시 멀어지며 몸부림을 쳤다.

고개를 돌려 보니 열쇠 모양의 펜던트로 자신의 손을 내리 찍은 루제프가 태연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거의 다 끝났는데!]

나무의 원통한 목소리가 찢어질 듯 동굴 가득 울렸다.

그때 나무줄기를 타고 달려온 카이든이 나를 들쳐 업고 함께 온 에녹이 주변을 경계하며 아래로 빠르게 내려갔다.

바닥에 내려온 나는 카이든과 에녹에게 감사 인사를 한 뒤 루제프를 바라봤다. 그가 나무를 향해 말을 걸었다.

“편안하게 해드리겠습니다. 혼자는 아닐 겁니다. 제가 있으니까요.”

차분하고 자애로운 얼굴로 말하는 루제프에게서는 정말로 신성한 기운이 풍겼다.

신력을 쓰는 게 아닐 텐데도 말이다.

[안 돼! 싫어! 억울해!!]

나무줄기가 루제프를 향해 공격적으로 뻗어나왔다. 놀라서 나는 루제프를 향해 손을 뻗었으나 나무줄기가 다가오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두꺼운 나무줄기가 루제프의 허리를 휙 감싸서 들어올렸다.

“주교님!”

당황한 내 외침에도 루제프는 동요가 없었다. 늘 겁에 질린 모습을 보이던 남자답지 않게 마물의 모체에게 끌려가면서도 매우 차분했다.

루제프를 높이 들어 올린 나무의 몸통, 그러니까 나무 기둥이 두 갈래로 갈라졌다. 그것이 짐승의 입이 벌어진 것 같은 모양새를 했다.

이윽고 그것이 루제프를 먹었다.

먹었다……고?

잠깐만.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나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주교님!!”

급히 마물의 모체를 향해 뛰어가려는데 에녹과 카이든이 각각 양쪽에서 나를 말리며 붙잡았다.

밀려오는 충격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 겁 많은 남자가 용기를 내어 자신을 희생한 모습이 눈에 콕 박혀 떠나질 않았다.

‘아니야.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지금.’

이건 희생이 아니다. 루제프는 멀쩡할 거다. 디에고도 루제프도 이렇게 허망하게 떠날 사람들이 아니다.

혹시 이것도 루제프가 세운 계획의 일부인 걸까? 차분했던 모습을 떠올리자면,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디 그래야만 해. 살아 있어줘야 해.’

그렇게 절망과 약간의 희망을 안고 마물의 모체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쿠르르르- 쾅!

동굴 밖에서부터 들려오는 묵직한 굉음과 함께 땅이 진동했다.

툭, 투둑.

머리 위에서 가루와 함께 작은 돌들이 부서져 내렸다. 동굴이 무너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젠장, 일부러 조명탄도 사용 안 하고 있었건만, 이러다가 동굴 안에 파묻히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위험하겠는데, 빨리 위로 올라가야 할 것 같아.”

카이든의 중얼거림에 나는 얌전해진 마물의 모체를 돌아봤다.

“주교님과 디에고 경을 두고 갈 순 없잖아요. 우리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이대로 돌아가자고요? 그럴 순 없어요!”

“그렇다고 여기서 죽을 순 없잖아.”

그렇긴 하지만, 나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루제프와 디에고를 두고 갈 순 없다. 나는 루제프를 믿는다.

카이든이 계속해서 나를 설득하고 있을 때였다. 에녹이 우리 두 사람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잠시만.”

그가 어떤 다른 움직임을 감지한 것처럼 주변을 살폈다.

요동치며 발광하던 마물의 모체가 움직임을 멈췄다. 갑자기 왜 저러지? 루제프의 영향일까?

그때 동굴 벽이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천둥이 울리는 소리 같은 게 들려왔다. 이윽고,

번쩍-!

천장에서부터 번개가 내리쳐 마물의 모체, 그러니까 새하얀 나무 위로 꽂혔다.

번쩍-! 번쩍-!

번개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여러 번 다양한 모습으로 내리쳤다.

그 광경은 기이하게도 너무나 거룩해 보였다.

‘강력한 원기, 신성한 힘을 가진 그릇, 오늘과 같은 폭풍우 치는 날씨의 조합이라면 저 원혼 덩어리를 달래어 가둘 수 있습니다.’

조금 전에 루제프가 했던 말이 이런 뜻이었나 보다.

[안 돼-! 싫 어-!]

나무가 고통에 몸부림치는 게 보였다. 거대한 포효소리가 동굴 안을 가득 메웠고 동굴이 차차 무너지는 게 보였다.

번쩍!

번개가 한 번 더 내리치자 새하얀 빛을 발현하고 있던 마물의 모체가 깨진 유리처럼 산산조각 났다.

[으아아아아-!]

광란 같은 포효를 끝으로 빛은 흔적도 없이 소거되었고 그 자리에 디에고와 루제프가 모습을 드러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디에고 경!”

“따가리!”

에녹과 카이든이 황급히 두 사람을 수습해왔다. 나는 조금 안도하며 바닥에 떨어진 배낭을 주워 메고 무너지는 천장을 바라봤다.

카이든의 말대로 우린 얼른 이곳을 벗어나야했다. 조금만 지체하면 정말로 무너지는 동굴에 묻혀버리겠다.

* * *

아스달은 당겼던 활시위를 내려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만들어둔 화살이 다 떨어진 탓이다.

높다란 나뭇가지 위에 그와 함께 앉아 있던 유안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의 발밑으로는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마물들이 입을 벌리고 그들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력을 사용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들은 북섬에 도착하자마자 괴상한 형태로 진화한 마물들과 조우했다. 뿐만 아니라 엄청난 머릿수에 결국은 마물을 상대하기를 포기하고 도망치기에 이르렀다.

“윽.”

아스달은 허리 통증에 잠시 신음을 삼키며 나무기둥에 등을 기댔다. 유안나가 그녀답지 않게 무척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괜찮아요?”

그는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대신했다.

시간이 지나며 상태는 차차 나아지고 있었지만, 이런 류의 고통을 겪어보는 건 난생처음이라 무척 곤혹스러웠다.

헤스티아 왕국을 손에 쥔 황금 열쇠라고 불리던 그가 이런 고통을 겪을 일이 어디 있었겠는가.

마거릿이 가진 구급약통에 진통제가 있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마거릿을 만나면 그녀에겐 마력이 있으니, 카이든의 마법으로 치료도 가능할 거다.

그런 생각을 하던 중이었다. 빠르게 몰려드는 먹구름에 한낮의 태양이 자취를 감췄고 무서울 정도로 많은 양의 폭우가 쏟아졌다.

아스달은 비를 맞으면서도 여전히 나무 근처를 떠나지 않는 마물들을 보다가 유안나에게 물었다.

“마물의 피와 물이 만나면 불이 잘 붙는다고 하지 않았나.”

“무슨 생각 하는지 아는데, 그러려면 저 마물들이 피를 흘리게 해야 하거든요. 지금 우리 상황에서 가능할까요?”

유안나의 회의적인 반문에 아스달은 한숨을 내쉬었다. 유안나는 무기가 없었고 그가 가진 화살은 전부 떨어졌다.

번쩍!

“아, 깜짝이야!”

그녀와 대화를 나누던 도중 하늘을 뒤덮는 반짝거림과 함께 사나운 번개가 내리쳤다.

번쩍! 번쩍 번쩍!

경이로울 정도로 사나운 번개가 연달아 같은 곳을 향해 내리치는 게 보였다.

우르르 쾅! 쾅! 콰아아앙!

이어서 들리는 천둥소리 또한, 사람을 단숨에 압도시킬 정도로 장엄했다.

“저게 뭐야, 저런 건 처음 봐요.”

유안나가 소름끼친다는 얼굴로 낮은 산 너머를 바라봤다. 번개가 계속해서 같은 곳을 향해 내리치고 있었다.

섬뜩할 정도로 기묘한 현상이었다.

“저기 뭔가 있나 보군.”

아스달의 중얼거림에 유안나가 의미심장한 얼굴로 그를 돌아봤다.

“가보는 게 좋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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