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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156)화 (156/234)

“응, 맞아. 흥미는 있어. 하지만 그뿐이야.”

제나스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거짓말.

아나타는 어쩌면 플로네 영애가 제나스를 다루는데 용이한 열쇠가 되진 않을까 기대를 걸었었다.

“난 너랑은 달라야 하잖아. 응? 안 그래, 아나타?”

아나타는 제나스의 표정을 자세히 살폈다. 하지만 역시 속내를 짐작할 수는 없다. 느리게 끊어 말하는 탓에 제나스가 꼭 말장난을 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너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알레아 섬은 내가 구축했어. 알지? 알레아 시스템을 만든 건 나야.”

아나타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녀의 마력은 제나스의 마력에 비해 한참은 모자랐다. 하지만 대신에 ‘기술’적인 측면에서 두각을 보이는 마법을 구상했다. 제나스가 본래 그들이 살던 세계와 실험에 대한 전반적인 업무를 담당했다면, 다른 차원에 관해 연구하는 건 아나타의 몫이었다.

하여, 제나스는 ‘알레아’가 가진 의미를 전부 알진 못했다.

“응, 알아. 그래서 죽이진 않았잖아.”

“뭐……?”

“내가 설마 핏줄의 정 때문에 널 살려뒀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제나스의 오만한 물음에 아나타는 초조하게 아랫입술을 짓이기며 욕설을 삼켜냈다.

망할 자식.

“아, 뭐. 운과 우연으로 이뤄진 알레아 섬이니까…….”

“…….”

“네가 여태 살아 있는 것도 운이겠네.”

“너……!”

“축하해. 네가 만든 시스템 덕에 살았잖아.”

“야, 보자 보자 하니까……!”

“아나타, 그거 알아?”

의자에 묶여 발버둥을 치던 아나타가 동작을 멈췄다. 제나스가 여전히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일행 중에 마력을 쓸 수 있는 인간이 있더라.”

마력을 쓸 줄 아는 인간이라니. 그건 아나타도 몰랐던 사실이다.

하지만 만약 그 일행 중에 한 명만이 마력을 쓸 수 있다면, 그건 플로네 영애일 확률이 가장 유력했다. 다른 차원에 다녀왔으니까.

“그래서 마물의 모체가 있는 곳으로 보냈어.”

생각에 잠겨 있던 아나타가 놀라서 제나스를 쳐다봤다.

“뭐?!”

“어차피 우리 손으로는 그거 못 치우잖아.”

“그렇다고 피실험자들을 거기로 보내? 그게 죽든 피실험자가 다 죽어버리든 실험 망치면 우리도 끝이야.”

“이미 많은 게 틀어졌어. 무슨 말인지, 네가 제일 잘 알 텐데.”

제나스의 물음에 아나타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회귀게이트는 제나스의 조작 없이는 열리지 않는 문이었는데, 그녀가 유안나의 영혼을 바쳐 강제로 게이트를 열었다.

그 일을 말하는 게 분명했다.

“실험의 규칙은 이제 무시하자고. 마지막 실험인데 여기서 망칠 순 없잖아. 여긴 알레아 섬이야, 아나타. 운에 맡겨.”

자기가 불리하면 꼭 알레아란 단어를 들먹인다. 아나타는 가증스럽다는 얼굴로 제나스를 노려봤다.

“아직 여길 나가는 다른 방법은 못 찾았나 보지?”

“무슨 소리야. 곧 나갈 수 있어. 실험이 끝나가잖아.”

제나스의 확고한 대답은 꼭 자기 암시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만든 규칙에 갇혀 무려 천년이나 이 섬에서 지내왔다. 실험이 모두 끝나면 나갈 수 있도록 설계를 했으니, 실험에 성공하면 나갈 수 있다는 제나스의 말이 틀린 건 아니다.

단지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릴 줄은 몰랐을 뿐이지.

“저쪽에 있는 ‘그놈들’ 너무 믿지 마. 지금이나 제나스 님이라고 추앙하지, 실험에 성공하고 지들 잇속 다 챙기고 나서도 그럴 것 같니? 너도 알잖아.”

“하하하-. 하하하하!”

아나타의 말을 듣던 제나스가 천진한 얼굴로 웃음을 터트렸다. 지켜보던 아나타마저 왠지 속이 후련해질 정도로 시원한 웃음이었다.

“날 바보로 아네. 섬을 구축한 게 너일지는 몰라도, 이 실험을 기획한 건 나야.”

제나스가 작은 손으로 아나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놈들’이 내 머리 위에 있을 순 없어. 걔들도 내 체스 말에 불과해. 어때? 내가 뭘 할지, 궁금하지?”

제나스가 차분한 어조로 한 자 한 자 느긋하게 말하며 예쁘게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재미있는 걸 보여 줄게.”

아나타는 제나스의 광기가 두려웠다.

“……제나스. 우린 벌 받을 거야. 지은 죄가 너무 많아.”

제나스는 한 줌의 동요도 없이 웃으며 대답할 뿐이었다.

“나도 알아. 난 지옥에 갈 거야.”

* * *

꽃밭이 상당히 넓었다. 천장은 아득하게 높았으며, 앞뒤 공간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광활했다.

에녹이 봤다고 했던 디에고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너무 넓습니다.”

루제프가 주변을 훑으며 막막하단 투로 중얼거렸다. 한참을 다 함께 꽃밭을 배회하다가 카이든이 결국 성질을 못 이기고 짜증을 냈다.

“흩어지는 게 좋겠어. 공간이 넓으니 서로의 시야에서 크게 벗어나지만 않는다면 괜찮을 것 같은데, 다들 어떻게 생각합니까?”

“동의한다. 너무 멀리 가지만 않으면 괜찮을 것 같은데.”

에녹은 카이든의 말이 일리가 있다는 얼굴로 우리를 돌아보며 말했다. 나도 어느 정도 동의하던 차라 결국 하는 수 없이 우리는 흩어져서 디에고를 찾기로 했다.

너무 아무것도 없는 공터라 디에고가 정말로 이곳에 있는 게 맞을까 싶긴 했다.

나는 손전등을 들고 꽃밭을 천천히 걸었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넓은 공간은 사람을 압도하는 힘이 있었다.

게다가 내가 들고 있는 손전등을 제외하면 불빛 하나 없는 공간인데도 앞을 보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

꼭 마치 이 동굴 전체에 은은하게 마력이 도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파드득.

갑자기 손전등 안에서 요란하게 파득거리는 날갯짓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반딧불이 벌레들이 들어있는 손전등을 쳐다봤다.

“왜 그래?”

손전등을 흔들어보다가 이놈들이 한 방향으로 빛을 쏘아댄다는 걸 알아차렸다. 내 뒤쪽 방향이었다.

“……어.”

불길한 느낌에 잠시 망설였다. 멀리서 세 남자가 주변을 살피기에 여념 없는 모습이 보였다. 확인해보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디에고를 찾아야 하잖아.

나는 천천히 발을 돌렸다. 긴장이 돼서 손에 땀이 났다.

몸을 완전히 틀고 뒤를 돌아보자, 꽃밭 한가운데에 누군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게 보였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지만, 한눈에 보기에도 디에고였다.

“디에고 경!”

나는 단숨에 그에게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외치며 어깨를 잡았다. 초췌한 얼굴로 디에고가 느리게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모두 여기 와 봐요!”

나는 다급하게 일행을 불렀다. 하지만 에녹도 카이든도, 루제프도 모두 내 외침이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상하다. 동굴이라서 분명 소리가 울릴 텐데.

“영애.”

그때 디에고가 나를 불렀다.

나는 다시 그를 돌아봤다. 그의 상태가 심상치 않아 보이기는 했다. 얼굴이 몹시 창백했고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저, 저쪽에 묶여 있었는데, 이상한 게, 있습니다. 따라오십시오.”

그가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나며 내게 말했다. 어……. 이렇게 갑자기?

디에고는 꼭 마치 뭔가에 홀린 사람 같았다.

“잠깐만요. 다른 사람들도 불러올게요.”

나는 뒤를 돌아 다시 세 남자를 불렀다. 그러나 세 남자는 내 목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 듯이 이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지금……! 한시가 급합니다. 서둘러주십시오. 다들 눈에 보이는 곳에 있으니 우선 확인한 뒤에 다른 이들을 불러와도 되지 않겠습니까.”

디에고가 내 팔을 붙잡고 다급하게 말했다. 그의 눈에는 여전히 초점이 없었고 다 갈라져 메마른 입술은 무언가를 참아내듯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아니, 진짜 이상한데. 여기서 디에고를 믿고 무작정 따라가기엔 상황이 너무 기묘하지 않은가.

스스스-

그때 발밑에 있던 은지가 내 다리를 타고 올라와 디에고를 경계하듯이 이빨을 드러냈다.

그래, 은지가 있으니까…….

나는 크로스백에서 조명탄을 꺼내 여분의 탄알을 넣어 장전하며 일단 디에고의 뒤를 따라 걸었다. 흘끗 뒤를 돌아 세 남자의 동향을 파악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 안에서 조명탄을 쏘는 게 현명한 선택은 아니겠지만, 가진 무기가 이것뿐인 걸 어쩌겠는가.

다행히도 멀리 가지 않아 디에고가 걸음을 멈췄다. 하지만 그가 말한 ‘이상한 것’은 그 어디에도 보이질 않았다.

혹시나 했는데, 설마 진짜 함정인가……?

디에고가 뒤를 돌아서 나를 보더니 다시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그의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그, 그만……!”

“네? 뭘 그만해요? 디에고 경. 정말 괜찮아요?”

디에고는 이를 악물고 눈을 질끈 감았다. 이번에도 무언가를 참고 있는 얼굴이었다. 꼭 마치 자기 자신과 싸움이라도 하고 있는 듯이…….

“디에고 경?”

디에고가 고개를 떨궜다. 그의 무릎 위로 눈물방울이 뚝, 뚝 떨어져 내렸다.

나는 당황해서 뭐라 할 말을 잃고 그 모습을 가만히 쳐다봤다.

창백한 얼굴의 디에고는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그가 오른손을 뻗어 내 점퍼를 자신의 생명줄인 양, 손에 쥐었다.

“경?”

파르르 떨리는 오른손을 그의 왼손이 부여잡는다. 스스로 제어가 안 되는 것처럼 말이다.

“……크헉.”

그가 피를 토했다.

“경?! 괜찮아요?”

“죄송합니다. 지금 제 몸이, 통제가 안 됩니다. 목숨을 빌미로, 협박을 당했습니다. 그것들이 영애를 노리고 있습니다.”

그것들? 그것들이 대체 뭐지?

“저를 미끼로 삼아 영애의 마력을 갈취할 생각이었던 것 같……! 컥!”

“경!!”

디에고의 복부를 관통한 새하얀 나무줄기가 보였다. 꽃밭 사이로 튀어나온 것처럼 보였다.

나는 충격으로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입을 벌린 채 그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커헉……! 차라리 제가 대신…….”

뭐?

“영애는 꼭 살아남으십시오. 저, 저는 여기까지인가 봅니다.”

디에고의 입술을 비집고 피가 선명히 흘렀다.

놀라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는데, 디에고가 비틀거리며 바닥에 떨어진 손전등을 주웠다. 그리고는 내 손에 간신히 쥐여 주었다.

“계속 랜턴을 들고 계시는 게 좋습니다. 저놈들은 빛에 약합니다. 어, 얼른 피하십시오. 컥…….”

그 말을 끝으로 디에고의 복부를 꿰뚫은 나무줄기가 거침없이 그를 끌고 갔다.

“디에고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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