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155)화 (155/234)

그녀가 카이든을 보며 기둥을 손으로 가리켰다.

“봉인 좀 해줘.”

“손 줘봐.”

에녹은 어쩔 수 없이 한발 물러섰다.

카이든은 마거릿의 손을 잡고 허공에 마법진을 그려냈다. 푸르스름한 빛이 카이든이 공중에 긋는 손가락을 따라 움직였다.

이윽고 완성된 마법진이 선을 따라 발현되었다. 이내 마력이 두 개로 갈라져 하나는 에녹 일행이 있는 나무 기둥에, 다른 하나는 건너편 나무 기둥에 스며들었다.

“로드가 먼저 건넌 다음 마거릿이 건너는 것으로 하지. 아무도 낙오되는 일은 없어야 해.”

에녹의 말에 모두가 동의한 뒤 로프 앞에 차례로 섰다.

“조심해.”

마거릿이 먼저 출발하는 카이든을 향해 당부의 말을 건넸다. 카이든은 여유롭게 웃음 짓고는 걱정하지 말라는 대답을 남기고 먼저 출발했다.

다행히도 카이든은 무사히 건너편에 당도했다.

“두 사람 모두 조심해요.”

마거릿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루제프와 에녹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녀의 몸에 매달린 은지가 혀를 날름거리며 그들을 쳐다봤다.

가장 걱정되는 건 그들이 아니라 마거릿이었다.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가득 당부의 말을 한 마거릿이 먼저 출발했다.

무사히 건너편에 도착한 그녀를 보고서야 에녹은 안도하며 걱정을 덜어냈다.

루제프까지 무사히 건넌 다음, 마지막 차례로 에녹이 밧줄에 매달려 중간까지 건너왔을 때였다.

두두두두두-

불길하게 무언가가 절벽 아래에서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굴 내부가 진동했다.

“에녹! 빨리 와요! 빨리!”

마거릿의 다급한 외침과 함께 절벽을 타고 올라오는 지네형 마물의 모습이 보였다. 성인 남성 두세 명의 몸을 합친 것만큼 거대한 크기였다.

절벽 아래에서부터 튀어 오른 지네가 몸통으로 밧줄을 반으로 끊었다. 에녹은 순간적으로 끊어진 밧줄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에녹!!”

마거릿의 비명과 함께 에녹은 아래로 추락했다.

하지만 밧줄을 놓지 않은 덕에 절벽에 매달린 채로 간신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절벽 위에서 마거릿과 카이든, 루제프가 함께 밧줄을 당기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때, 발밑에서 무언가 번쩍였다.

시선이 이끌려 아래를 내려다보니, 어두운 절벽 아래로 언뜻 화려한 꽃밭이 보이는 것 같았다.

‘……환각인가?’

꽃밭의 한가운데엔 사람이 누워 있었는데, 그 사람이 어쩐지 디에고와 무척 닮아있었다.

‘마거릿에게 알려야겠군.’

“에녹! 에노옥!”

에녹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마거릿이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한 채, 울음 같은 외침으로 그를 찾는다.

절벽을 오르는 건 그리 힘든 일이 아니다. 그러나 마거릿이 절망하는 얼굴을 보자, 기묘한 만족감이 전신을 휩쓸었다.

그를 위해 울고 있는 마거릿이라니. 그녀에게 미안할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그를 위해서 그녀가 더 울어줬으면 좋겠다.

에녹은 제 안에 그런 불온하고도 가학적인 면모가 있었다는 걸 깨닫고 당황했다. 하지만 머릿속에선 마거릿을 울리고 저만 바라보게끔 하고 싶은 욕망이 끊임없이 샘솟았다.

저런 얼굴을 하고 다른 세계로 떠나버리겠다고? 절대로 납득할 수 없다.

그때, 카이든이 마거릿의 마력을 빌려 마법을 사용하려는 듯한 모습이 보였다.

에녹은 조금 서둘러 절벽을 올랐다. 줄을 타고 오르는 게 그리 힘든 일도 아닌데, 그런 일에 마거릿의 마력을 낭비할 수는 없는 일이다.

어렵지 않게 절벽을 올라온 에녹은 한숨을 내쉬며 뻐근한 목덜미를 매만졌다.

그가 땅을 밟자마자 마거릿이 와락, 그를 껴안았다. 그의 등허리를 감싸 안은 마거릿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좀 전의 일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에녹은 그제야 마거릿을 걱정시켰다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팔을 뻗어 그녀를 마주 끌어안았다.

그를 위해 울어주는 마거릿은 너무도 자극적이었지만, 역시 그녀가 슬퍼하는 건 싫다.

“죽다 살아난 건 알겠는데, 내 앞에서 너무 애틋하게 굴진 마시죠? 나 진짜 삐뚤어진다.”

그들을 지켜보던 카이든이 한껏 인내를 발휘했다는 듯한 표정을 하고는 말했다. 그제야 마거릿이 민망하단 듯이 에녹에게서 떨어졌다.

에녹은 잠시 아쉬운 얼굴로 마거릿을 보다가 절벽 아래를 내려다봤다.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절벽 위에 오르면서 높이가 높아져서 아까처럼 바닥이 잘 보이진 않았으나, 디에고처럼 보이는 형상을 봤던 것은 일행에게 공유해야 했다.

그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일행은 동굴 안으로 계속 들어가지 않고 일단 절벽 아래로 내려가 보기로 했다.

다른 수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에녹은 상황이 다소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만 같은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조금 불길했다.

* * *

난 암벽등반을 해본 적이 있다. 이진주 시절 꽤 많은 스포츠 종목을 취미로 즐겼고 클라이밍도 그중 하나였다.

에녹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절벽은 생각보다 깊지는 않았다. 다행히도 돌바닥에 단단하게 박혀 있는 나무 기둥이 있으니 밧줄을 묶기에도 제격이다.

나는 가지고 있는 밧줄을 최대한 모았다. 밧줄을 몸에 묶어 아래로 내려가기 위함이었다.

“진짜 내려가는 겁니까?”

루제프가 떨떠름한 얼굴로 미간을 좁히고 물었다.

“앞으로 더 전진한다고 해도 뭐가 나올지 우리는 몰라요. 출구가 있는지도 확실치 않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는 디에고 경을 찾으러 여기까지 온 거잖아요.”

“죄송합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루제프가 죄책감 어린 목소리로 빠르게 사과했다.

“하여간 마거릿 한 마디에 다물 입을 왜 그렇게 쉽게 놀리는지 모르겠다니깐.”

그 모습을 보던 카이든이 혀를 차며 중얼거리자 루제프가 울컥한 얼굴을 했지만, 내 눈치를 보며 조용히 입을 다문다.

일단 우리는 한시라도 빨리 디에고를 찾아야 했으므로 서둘러 움직였다. 내가 만든 로프를 허리에 감고 다 함께 절벽을 타고 내려갔다.

절벽 아래로 온전히 다 내려오자, 에녹의 말대로 웬 꽃밭이 있었다.

혹시나 텐타티오넴의 일종일까 봐 우린 먼저 코를 단단히 틀어막았다. 하지만 다행히도 독화 같은 게 아니라 평범한 꽃이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긴장을 놓지는 마.”

내 표정을 본 카이든이 경고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주변을 샅샅이 살폈다.

하지만 에녹이 보았던 꽃밭에 누워 있는 디에고는 찾을 수 없었다.

“환각을 본 거 아닙니까?”

카이든이 의아한 얼굴로 에녹에게 물어왔다.

“글쎄, 환각일 수도 있겠지.”

그렇게 대답한 에녹은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긴 얼굴로 주변을 훑었다.

“하지만 디에고 경이 실종되기 직전에 주교가 봤다던 유령들은 환각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나? 그때와 비슷한 현상을 내가 본 거라면, 그게 뭐였는지 확인을 해봐야지.”

에녹의 말이 맞다. 디에고가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지금, 단서가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살피는 게 중요했다.

* * *

제나스는 지네형 마물의 눈을 통해, 마거릿 일행의 위치를 확인했다.

‘그곳’으로 향하는 동굴에 있는 모양이었다.

곧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겠다. 이제 실험의 끝도 얼마 남지 않았다.

어린 소년의 모습을 한 제나스는 다소 들뜬 얼굴로 안식의 방문을 열었다. 마법진 위에 놓인 의자와 의자에 봉인된 채로 앉아 있는 아나타가 보였다.

제나스는 그녀에게 코코넛을 내밀었다. 힘겹게 고개를 든 아나타가 코코넛을 보고는 사납게 얼굴을 구겼다.

“배 안 고파?”

천연덕스러운 그의 물음에 아나타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시야에 제나스의 예쁘장한 얼굴이 들어왔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하나뿐인 제 동생을 향해 말했다.

“제나스, 이걸 풀어야 먹지.”

“내가 먹여줄게.”

제나스의 천진한 대답이 돌아오자 아나타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야. 너 진짜 이럴 거야?”

“아나타.”

제나스가 작은 손으로 코코넛을 쪼갰다. 어린아이의 모습을 했다곤 상상도 할 수 없는 완력이었다. 그가 쪼갠 코코넛 하나를 아나타의 입가에 들이밀었다.

“그러지 말고 마셔. 나 서운해.”

“서운 같은 소리 하네. 그만 하자니까.”

이 또라이야.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 뒷말을 삼킨 아나타가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그녀의 말을 들은 제나스의 동작이 멈췄다. 옅게 올라가 있던 입꼬리가 서서히 내려오고 붉은 눈동자가 번뜩였다.

“그만……? 그게 할 소리야?”

제나스가 들고 있던 코코넛이 바닥에 툭, 떨어져 마법진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맛이 간 듯 광기가 어린 제나스의 눈빛에 아나타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제나스의 심기를 잘못 건드린 걸 알았으나, 제가 한 말을 돌이킬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진실로 지겨웠다. 사람을 죽이는 짓도, 이제는 정말 그만하고 싶었다. 하다 하다 이제는 제 후손까지 끌어들일 줄은 몰랐지.

아나타에겐 아직 그 정도의 윤리의식은 남아있었다. 제나스는 아닌 것 같지만.

그녀가 독기 어린 눈빛으로 제나스를 노려봤다.

“우리가 실험에 정말 성공하면 그 새끼들 좋은 일만 시키는 거야. 너도 알잖아.”

실험 설계자인 그들이 섬에 갇혀 미쳐가는 동안 밖에서 제물들만 밀어 넣으며 호의호식하고 있는 ‘그 새끼들’ 말이다.

“나 제나스 이그란 로하데야.”

제나스는 아주 오만한 눈을 하고 있었다. 그가 아나타를 비웃듯이 고개를 기울여 그녀를 내려다봤다.

마치 신이 한미한 인간을 굽어살피듯이.

“대비책 있어.”

제나스는 느긋한 어조로 말하고는 잠시 아나타의 반응을 살폈다. 아나타는 미간을 좁히며 입을 꾹 다물었다.

“날 믿어.”

이어지는 제나스의 말에 아나타가 기어코 화를 터트렸다.

“내가 널 어떻게 믿니? 봉인이나 풀어달라니까?!”

“너를 위해서야.”

제나스가 천천히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나타, 지금 피실험체들에게 홀렸잖아.”

아래에서 위로 그녀를 올려다보며 그가 이젠 거의 처량한 강아지처럼 말했다. 아나타는 할 말을 잃었다.

“그러면 안 돼.”

느릿하게 말을 이은 제나스가 계속해서 아나타를 타일렀다.

“넌 지금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상태가 아니야.”

“너도 그들과 접촉했잖아. 너는 아닐 것 같아?”

아나타의 물음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제나스가 속을 알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잠시 침묵했다.

하지만 그 짧은 반응으로 아나타는 확신했다.

제나스는 플로네 영애에게 흥미가 생긴 게 분명했다.

다른 차원에서 건너온, 마거릿이자 마거릿이 아닌 영혼. 그 이질감은 제나스가 충분히 관심을 가질 법도 했다.

역시. 그럴 줄 알았지. 제나스라면 분명 그녀를 눈여겨볼 거라고 생각했다.

아나타는 입가에 조금씩 번지려는 미소를 억누르며 제나스를 향해 말했다.

“잘 생각해 봐. 정말 너는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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