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154)화 (154/234)

22. 마물의 모체

* * *

동굴은 생각보다도 더 깊었다.

한참을 들어가고도 끝이 보이질 않아서 에녹은 걸음을 멈췄다. 일행을 돌아보니 다들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묵묵히 에녹의 뒤를 따르던 마거릿이 문득 카이든을 바라보더니 말을 걸었다.

“카이든, 전에 디에고 경과 에녹이 불침번 서다 사라졌을 때 둘의 위치를 마법으로 확인했었잖아. 그거 지금은 못 해?”

“그때는 위치를 특정하는 게 가능했었는데, 지금은 어려운 상황이잖아. 너무 광범위한 추적 마법은 정확도도 떨어지고 괜히 마력만 소비하는 거라 사용 안 하느니만 못해.”

카이든의 대답에 마거릿이 시무룩한 얼굴로 입을 다문다.

“잠시 쉬어가지.”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에녹이 말했다. 모두 동의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곧 동굴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고 모여 앉아 잠시 휴식을 취했다.

대나무 통에 담아온 물을 마시던 에녹은 맞은편에 앉은 카이든을 보았다. 그가 마거릿에게서 소설 <생존보다 중요한 것>을 건네받아 읽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침에 먼저 소설을 읽었던 에녹은 카이든의 반응을 예상했다. 아마도 욕설이 먼저 튀어나오리라.

“이게 무슨 X 같은 소리야?”

역시나. 카이든이 불쾌하다는 얼굴로 미간을 좁혔다.

“성녀하고 우리가……? 이게 말이 돼……?”

“넌 이 어둠 속에서 글자가 보여?”

마거릿의 되물음에 카이든이 능청스럽게 대꾸한다.

“나 시력 좋아. 그런데 마거릿, 이 소설 내용을 그대로 믿은 건 아니지?”

팔짱을 끼고 동굴 벽에 기대어 앉아 있던 에녹은 카이든을 따라 맞은편에 앉아 있는 마거릿을 바라봤다. 그도 내심 그녀의 반응이 궁금했던 차였다.

마거릿의 얼굴은 어둠 속에서도 똑똑히 보일 정도로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러곤 카이든의 의혹을 부인하며 횡설수설한다.

에녹이 마거릿에게 물었다.

“이 소설은 아나타란 마법사가 그대를 현혹하기 위해 각색한 책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럼 결국 마거릿 그대의 취향이…….”

“아니에요! 아니야! 그런 거 아니에요!”

마거릿이 펄쩍 뛰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덕분에 그녀 옆에 잠들 듯 말 듯 꼬리를 말고 있던 은지가 화들짝 놀라 방방 뛰었다.

마거릿의 반응은 귀여웠지만, 내용이 좀 불쾌했던 건 사실이다. 그녀가 그들에게 책에 대한 이야기를 전할 때 얼마나 내용을 순화해서 말했는지도 알 수 있었다. 물론 일부 섹슈얼한 에피소드를 제외하면 내용 자체는 무척 흥미로웠다. 마거릿이 처음부터 그를 피해 혼자서 떠날 생각을 했던 게 이해가 됐을 정도니까.

“저는 아나타란 마법사를 보면 항의할 겁니다. 어찌 신을 모시는 사제를 가지고 이런 불경한 상상을 했는지.”

루제프가 항의하듯 입을 열자 조금 진정하고 민망한 기색으로 자리에 앉은 마거릿이 뺨을 긁적였다.

“아, 그건 아나타의 취향 아니었을까요? 원래 배덕할수록 맛…….”

말을 하다 말고 아차 싶었는지 마거릿이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책을 들고 있던 카이든이 박장대소를 했다.

“푸하하핫! 푸하하! 역시 네 취향이었지! 아니긴 뭘 아니야! 하하하하! 마거릿, 너무 귀엽잖아!”

“이, 이만 가죠? 충분히 쉬었잖아요.”

마거릿이 황급히 반딧불이 랜턴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무언가 생각이 난 얼굴로 말을 덧붙였다.

“듣기로는 사실을 기반으로 작성된 기록용 노트라고 했어요. 거기 적힌 내용이 어느 정도는 맞을 거라고요.”

“잠깐, 그러면 여기서 내가 널 죽였다는 게 사실이란 말이야? 거짓말하지 마.”

카이든이 마거릿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그녀의 말을 믿을 수 없었는지, 현실을 부정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웃는 낯이었다.

그러나 마거릿은 그의 기대를 저버린 듯 입을 꾹 다물었다. 카이든의 얼굴이 점차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말도 안 돼. 그럴 리 없어. 마거릿, 알지? 내가 그럴 리 없잖아.”

“……지난 일을 들춰서 뭐 해. 사실인지 확인도 불가능한데. 지금이 중요한 거지. 지금의 너는 믿어.”

부정하지 않는 마거릿의 모습에 카이든은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지금은 믿는다는 마거릿의 말이 그에게 큰 위안을 주지는 못한 모양이다.

충격받은 카이든에게는 별 관심이 없어 보이던 루제프가 입을 열었다.

“사실 이 세계 밖에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는 말이 아직도 진심으로 믿기지는 않습니다. 이곳에서 발견한 괴상한 물건들이 그 세계의 것이라는 점은 이해했습니다만…….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받아들이는 건 다르잖습니까.”

루제프의 말에 마거릿은 이해한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아직 다 받아들이지 못했는데, 당신들은 오죽하겠어요.”

마거릿의 씁쓸한 얼굴이 에녹의 가슴에 콕콕 박혔다.

그녀가 그녀답지 않게 체념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는 불안했다. 언제든 미련 없이 떠나버릴 것만 같아서.

“충분히 쉰 것 같으니, 그만 출발하시죠.”

갈 길이 멀었다. 그녀의 말대로 서둘러 출발해야 했다. 불필요한 사설은 넣어두고 다들 동의하며 자리를 정돈하고 일어났다.

그렇게 그들은 동굴 안으로 더 깊숙이 들어갔다.

갈림길은 꽤 여러 번 나왔는데, 그때마다 반딧불이 같은 날벌레들이 길 안내를 자처했다.

“이렇게 깊이 들어가도 괜찮을까? 왔던 길로 되돌아가기 힘들겠는데.”

후방부를 맡으며 뒤따라오던 카이든이 중얼거렸다.

에녹은 마거릿의 옆얼굴을 바라봤다. 그녀는 긴장한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카이든의 욕설도 듣지 못했을 정도로 집중하는 것 같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걸까.

이럴 때의 마거릿은 같은 공간에 있는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가 다른 세계에서 다른 삶을 살다 왔다는 얘기를 듣고서는 더더욱 그녀가 손에 잡히지 않을 듯이 멀게만 느껴졌다.

‘그럼 섬이 파괴되고 두 세계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영애는 어느 세계를 선택하실 겁니까?’

루제프의 그 물음에 마거릿은 곤란한 얼굴로 대답하지 않았었다.

섬에서 탈출한 뒤, 정말로 그녀가 다른 세계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면…….

에녹은 미간을 좁혔다. 고려하고 싶지 않은 가정이다. 그는 그렇게 그녀를 허망하게 놔줄 생각이 없었다.

“길이 없어.”

그때 마거릿의 곤란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녹은 걸음을 멈췄다.

그녀의 말대로 길이 절벽 앞에서 끊겨 있었다. 절벽 아래는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득히 깊었다.

건너편 길과 연결된 다리가 있었는지, 나무 기둥과 기둥에 매어진 밧줄만이 다리가 있었던 흔적을 나타내고 있었다.

마거릿이 이번에도 카이든을 돌아보며 물었다.

“마법으로 건널 수는 없나?”

“마법이 만능은 아니라고 했으니, 어렵지 않을까요.”

카이든을 대신해 루제프가 대답했다. 그러자 카이든이 심기 불편한 얼굴로 그를 흘겨봤다.

“동굴 안에선 마법 사용을 지양하는 것뿐이야. 자칫 잘못 사용했다가 동굴이 무너지면 어쩔 거야?”

“그러니까 결론은 마법을 못 쓴다는 거죠? 명색이 대마법사인데, 생각보다 제약이 많군요.”

루제프의 대꾸에 기어코 카이든이 화를 터트렸다.

“따까리, 그게 제일 쓸모없는 네가 할 말이야?”

카이든의 물음에 할 말이 없어졌는지 루제프가 입을 다물었다.

“네, 뭐……. 맞습니다. 제가 할 말은 아닙니다.”

그리고는 안쓰러울 정도로 불쌍하게 자신의 쓸모없음을 인정했다.

“그리고 말이 나와서 말인데, 이게 내 마력으로 쓰는 마법이야? 마거릿의 마력이잖아. 남의 힘을 빌려다가 마법을 사용하는 걸 아무나 하는 줄 알아? 내가 그렇게 마법을 남발하면 마거릿의 체력은 어떡할 거야. 적당히 해야 할 것 아니야, 적당히!”

카이든의 분노에 루제프는 당황하며 뒤로 물러났다. 결국 마거릿이 나서서 그를 진정시켰다.

“나는 괜찮아. 힘들면 에녹한테 업어달라고 하면 되니까.”

마거릿은 ‘업어줄 거지?’ 하는 눈빛으로 에녹을 돌아보며 예쁘게 미소 지었다. 에녹은 반사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그 미소가 그의 심장에 대단히 해로웠기 때문이다.

조금 전까지 화를 터트리던 카이든이 에녹과 마거릿을 번갈아 보고는 허탈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나도 업어줄 수 있어.”

“너한테 업히면 이상한 짓 할 것 같아.”

하지만 마거릿은 단호했다.

에녹은 어쩐지 그 말에 속이 시원하게 내려가는 기분을 느꼈다. 그는 애초에 마거릿을 다른 남자와 공유할 생각이 없었다.

섬에서 탈출만 하면 그때는…….

“그건 동의합니다, 로드보단 황태자 전하가 낫지요.”

“뭐야, 이거 내 평판 왜 이래.”

“몰라서 묻는 건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양심 좀 챙기십시오.”

“따가리, 넌 조용히 해.”

카이든과 루제프의 다툼이 길어지자 결국 마거릿이 시선을 돌렸다. 그녀가 바닥에 얌전히 있던 은지를 향해 물었다.

“돌아가는 다른 길 없을까?”

그녀의 물음에 은지는 모르겠다는 듯이 천진한 얼굴로 고개만 갸웃거리고 있었다. 마거릿이 포기한 얼굴로 카이든이 메고 있는 가방을 가리켰다.

“로프 좀 꺼낼게.”

그녀는 카이든이 만들어둔 밧줄을 꺼내더니 매듭을 묶기 시작했다.

에녹뿐 아니라, 카이든과 루제프마저도 그녀가 뭘 하는 건지 유심히 지켜봤다.

“여기 건너야 하잖아요.”

“그걸로 건넌다고?”

마거릿이 단단히 바닥에 박혀 있는 두꺼운 나무 기둥을 가리켰다.

“다행히 건너편까지 연결된 다리 밧줄 하나는 안 끊어지고 남아 있으니 매달려서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더 좋은 방법 있나요?”

더 좋은 방법이 있냐는 물음에 세 남자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예상했다는 얼굴로 마거릿이 카이든을 향해 물었다.

“모두가 건너는 마법을 사용할 수 없다면, 다리 밧줄의 매듭이 풀리지 않게 마법을 거는 것 정도는 가능하겠지?”

카이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는 쉽지.”

카이든의 대답을 들으며 마거릿은 묶고 있던 매듭을 마무리 지었다.

그런 그녀의 능숙한 대처가 에녹은 이제 와 새롭게 다가왔다.

귀족영애 치고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플로네 공작이 딸을 얼마나 아끼는지 생각해 봐도 그녀가 플로네 가문의 교육으로 인해 그런 기술들을 익혔다는 변명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는데.

마거릿은 만든 매듭을 건너편과 연결된 다리 밧줄에 묶은 뒤에 그들을 돌아보며 설명했다.

“제가 만든 이 매듭을 허리에 묶을 건데요. 헛디뎌서 떨어지는 걸 방지하려고 매단 거예요. 보통 군대에서 유격 훈련할 때……, 아, 유격 훈련이 뭔지 모르겠구나. 음……. 그러니까 바비큐 꼬치 아시죠? 그렇게 매달려서 움직이면 돼요.”

“플로네 영애, 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감탄하며 마거릿의 설명을 듣고 있던 루제프가 입을 열었다.

“네?”

“다른 세계에선 대체 무슨 일을 하셨던 겁니까?”

루제프의 순수한 물음에 마거릿의 얼굴이 다시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모습마저 몹시 사랑스럽고 귀엽게 느껴져서, 에녹은 제가 정말로 그녀에게 미쳐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어떡하겠나. 마거릿이 귀엽다는 건 엄연한 사실이니 그가 어찌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어……. 그냥 평범한 사람이었어요.”

마거릿이 당황한 얼굴로 시선을 회피했다. 그 모습을 보며 에녹은 확신했다.

‘저쪽 세계에서도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군.’

그럴 줄 알았다. 마거릿은 특별했으니까. 저쪽 세계에서도 대단한 인물이었을 게 분명했다.

“다, 다 됐다.”

마거릿이 슬그머니 눈치를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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