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152)화 (152/234)

나는 일단 ‘문’에 대한 고민은 미뤄두고 세 남자와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 다시 얘기를 나누었다.

“디에고 경을 찾고, 성녀를 만난 다음, 마물의 모체를 없애고. 대마법사의 오두막으로 가는 루트인 거지?”

카이든이 지금까지 우리가 나누었던 이야기를 정리하며 물었다. 나와 에녹이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제나스를 상대하려면 마물의 모체는 꼭 없애야 해.”

제나스는 마물의 눈을 통해 우리의 동선을 파악할 수 있었다. 마물을 조종하는 것까지는 어렵다고 했으나, 마물을 다루는 법은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제나스 한명을 상대하기도 어려운데, 마물까지 상대해야하는 건 너무 벅찬 일이다.

그러니 마물의 진화와 소탕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그래, 일단 그 마물의 모체라는 게 뭔지 보고 결정을 하자고. 성녀가 알고 있는 게 뭔지도 파악하고.”

이 섬에 온지 몇 개월 만에 처음으로 탈출이 가능하다는 희망을 본 느낌이다. 계획한 루트대로 전진하며, 제나스만 무찌르면 정말로 탈출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카이든의 정리에 우리는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짧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쏴아아아-

그때, 동굴 밖으로 거세게 내리는 빗소리가 들려왔다.

“디에고 경은 괜찮을까요.”

내 중얼거림에 루제프가 앓는 소리를 냈다.

“제 탓입니다.”

그는 계속해서 죄책감어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마도 최근 디에고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며 생사를 넘나든 이가 루제프였고 또 마지막에 함께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큰 죄책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누구의 탓도 아니에요. 잘못이 있다면, 모두 제나스 때문이에요.”

내 중얼거림에도 루제프의 기분은 나아진 것 같지 않았지만, 하는 수 없었다. 아마 디에고를 찾기 전까지는 계속 그런 상태이지 않을까 싶었다.

* * *

쏴아아-

아침 일찍 디에고를 찾기로 했는데, 여전히 비가 내렸다.

나는 동굴 입구에 쪼그려 앉아 멍하니 세차게 내리는 비를 바라만 봤다. 폭우처럼 시원하게 쏟아지는 빗방울 덕분에 더위는 완전히 꺾였다.

비가 오는 숲에서 마물을 상대하기엔 우리 상황이 너무 열악했다. 그래서 빗줄기가 조금 잦아들 때까지는 기다려야 했는데, 그럼 디에고 구출이 너무 늦어질 게 뻔했다.

조금만 더 지켜보다가 계속해서 비가 내린다면, 그냥 폭우를 뚫고 움직이기로 결정했다. 디에고가 위험에 처해있다면, 자칫 구조 가능한 골든타임을 놓칠 수도 있으니까.

“플로네 영애.”

언제 다가왔는지 루제프가 내 옆에 앉아 나를 불렀다. 그가 야자 열매가 올라간 나뭇잎을 내게 건네주었다.

“벙커에서 구한 식량은 최대한 아껴야 하니, 아침은 어제 구해둔 야자 열매로 때우는 겁니다. 양해 부탁드려요.”

루제프는 열매 채집 담당이었는데, 이 폭우 속에서 열매를 따오겠다고 제법 고생을 한 모양이다. 나는 그의 손에 가득한 상처를 보다가 감사 인사를 표했다.

“고마워요.”

루제프가 멋쩍은 얼굴로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입을 다물었다. 뒤에선 카이든과 에녹이 시끄럽게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주된 싸움의 주제는 폭우가 심하니 마거릿을 안전하게 안고 움직여야 하는데, 누가 나를 안고 갈 것이냐였다.

나도 발이 있는데, 나를 왜 안고 가.

끼어들어서 상대하기도 입 아플 것 같아서 무시하고 나는 야자 열매를 열심히 씹어 먹었다.

가만히 내 옆얼굴을 보던 루제프가 다소 의중을 알 수 없는 희한한 질문을 했다.

“섬을 탈출하면, 영애께선 어디로 돌아가실 겁니까?”

“그게 무슨 소리예요?”

“영애는 다른 세계에서도 다른 삶을 살아보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네. 그렇죠.”

“그럼 섬이 파괴되고 두 세계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영애는 어느 세계를 선택하실 겁니까?”

루제프의 질문은 선택지가 두 가지인 것 같지만, 실상 선택지는 없었다. 한국에서의 이진주는 죽었는데, 어떻게 선택을 해. 난 마거릿의 삶을 살기로 이미 결정했다.

하지만, 내가 과연 잘 적응할 수 있을까?

마거릿의 기억과 그녀가 가진 감정들이 모두 남아 있다. 하지만 그건 여전히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낯설었다.

그래도 적응해야지 어떻게 해.

나는 시무룩한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 내 표정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모르겠지만, 루제프가 당황한 얼굴로 나를 보며 사과했다.

“제가 실례되는 질문을 했습니다. 잊어주세요, 영애.”

그렇게까지 사과를 할 필요는 없는데?

의아해서 고개를 들었다가 나는 주변이 과하게 조용해진 걸 느꼈다. 그러고 보니 어느 순간부터 에녹과 카이든의 다툼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의아한 마음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에녹과 카이든은 나를 보며 매우 숙연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게 보였다. 우리가 나눈 대화를 다 들은 모양이다.

‘아니, 근데 왜 저래?’

“왜 그래요?”

내 물음에 에녹과 카이든은 대답하지 않았다. 루제프만이 두 남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해한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럼 섬이 파괴되고 두 세계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영애는 어느 세계를 선택하실 겁니까?’

조금 전 루제프의 그 질문 때문인가? 하지만 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세 남자는 내 궁금증을 해결해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나는 깔끔하게 궁금증을 내려놓고는 다시 야자 열매를 먹으며 비 내리는 숲 속을 바라봤다.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을 다시 되새김질했다.

만약 디에고의 신변에 무슨 문제가 생겼다면, 그땐 어떻게 해야 하지?

스슥-

은지가 가까이 다가와 내 허벅지 위로 기어 올라왔다. 그리고는 머리를 슬쩍 올리고 나를 보며 혀를 날름거린다.

“너도 디에고 경이 걱정되니?”

그럴 리는 없겠다만, 디에고가 은지를 좋아했던 게 떠올랐다. 디에고가 워낙 예뻐하는 티를 감추지 않아서 은지도 나름 디에고를 좋아했던 것 같다. 그래서 걱정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렇게 은지의 비늘을 쓰다듬고 있을 때, 땅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두두두두두-

“이게 무슨 소리야?”

나는 놀라서 은지를 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땅이 거세게 흔들리고 있었다.

쩍-

폭우 속에 진동하던 땅이 살벌하게 갈라지는 게 보였다. 지진의 여파로 인해 동굴 옆으로 산사태가 일어났다.

“어……?”

나는 절벽이 무너져 내리는 걸 멍하니 바라봤다. 그러자 옆에 있던 루제프가 나를 동굴 안쪽으로 급히 끌어당겼다.

“영애, 위험합니다!”

그가 동굴 입구에서 멀찍이 떨어져 한 팔로 나를 보호하듯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무너진 절벽의 흙더미들이 동굴 입구로 쏟아져 내렸다.

“마거릿!”

에녹과 카이든이 내게로 뛰어왔다.

쿠르르릉-!

거대한 바위들과 함께 동굴의 입구를 단단히 가로막아 버린다. 순식간에 주변이 어두워졌다.

우리는 꼼짝 없이 동굴 안에 갇히고 말았다.

“이게 무슨 일이야?”

카이든이 가로막힌 동굴 입구를 보며 기가 막힌 듯 중얼거렸다.

다행히 동굴 안에 모닥불을 피우고 있었기 때문에 서로를 볼 수는 있었다.

“어떡하지? 나갈 수 있어?”

동굴 입구를 가로막은 바위를 치워내고 흙더미를 긁어내는 카이든을 보며 물었다. 카이든이 신경질적인 동작으로 들고 있던 바위를 내던졌다.

“제길, 갇힌 것 같은데?”

그의 말에 나는 침착하게 지도를 꺼내 바닥에 펼쳤다. 그리고 우리의 현재 위치와 우리가 가려고 했던 보급품이 있는 방향까지의 동선을 가늠했다.

동굴 안에 만약 외부로 통하는 길이 있다면, 밖으로 나갈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동굴의 깊숙한 안쪽을 넌지시 바라봤다.

“네가 가진 그 마도구로 입구를 뚫는 건 어때?”

카이든이 내게 물었다. 조명탄을 말하는 게 분명했다. 나는 그의 말대로 크로스백에서 조명탄을 꺼내 들었다.

“위험하지 않을까?”

“갇혀있는 것보단 뭐라도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뜻밖에도 루제프가 카이든의 말을 거들며 나를 봤다. 나는 루제프와 카이든을 보다가 이번엔 에녹을 바라봤다.

내 시선의 의미를 알아차린 에녹이 흘끗 동굴 입구를 바라봤다.

“위험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시도는 해봐야 하지 않겠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명탄을 장전하고 해머를 내렸다.

“다들 뒤로 물러나요.”

내 말에 카이든과 루제프가 은지를 안고 동굴 안쪽으로 들어갔고 에녹이 언제든 나를 업고 뛸 수 있도록 옆에 남았다.

나는 그대로 방아쇠를 당겼다.

피슈웅-

붉은 연기가 꼬리를 만들며 동굴 입구를 가로 막은 흙더미에 처박혔다.

퍼엉!

이윽고 흙더미가 폭발하고 바위가 우수수 흘러내리더니 땅이 진동을 했다. 에녹이 재빨리 나를 들어 어깨에 걸치고는 동굴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동굴 입구가 무너져 내렸기 때문이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우리는 더 깊이 고립되고 말았다. 나는 허탈함에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아니, 갑자기 무슨 지진이야.”

그렇게 허망하게 중얼거리고 있자니 루제프가 배낭을 챙겨 내 옆에 앉으며 대답했다.

“오랜 실험으로 섬이 망가져 간다고 했었지 않습니까? 혹시 그 여파가 아닐까요?”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이다. 나는 가만히 앉아 동굴의 깊숙한 안쪽을 멍하니 바라봤다.

이 동굴은 어디로 연결이 되어 있는 걸까? 영화에서 보면 바다나 강으로도 연결되고 그러던데.

“길은 이쪽뿐인 것 같은데, 들어가 보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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