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지도는 뭐야?”
“모르겠습니다. 혹시 그 유령들이 디에고 경을 납치하고 이걸 떨어트린 게 아닌지…….”
카이든의 물음에 대답하던 루제프가 말끝을 흐렸다. 카이든이 그를 빤히 쳐다봤기 때문이다.
“너무 허무맹랑한 거 알지?”
“딱히 허무맹랑할 건 없지 않습니까. 이곳에선 늘 상상 그 이상의 일들이 벌어졌으니까요.”
루제프가 인상을 찌푸리면서 불만스레 대거리했다.
사실 루제프의 말이 맞다. 이 섬에선 늘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의 일들이 벌어지곤 했으니까.
나는 북섬 동쪽에 있는 괴물 그림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지도에 있는 이 표시 말이야. 아무래도 마물의 모체인 것 같아.”
나는 루제프의 지도에 그려진 괴상한 모양의 마물 그림을 가리키며 말했다. 에녹이 의아한 얼굴로 반문했다.
“마물의 모체라니?”
“이 섬이 천년 동안 실험을 반복하면서 망가져 가는 중이라고 들었어요. 마물의 진화도 그 전조 중 하나고요. 제나스가 북섬 동쪽에 마물의 모체가 있다고 했는데, 그걸 없애면 마물들이 진화를 멈출 거라고 했어요.”
내 말을 듣던 카이든은 난해한 문제를 푸는 학생처럼 심오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마물의 모체가 뭔데?”
“그건 모르겠어. 직접 가보라던데.”
나는 다시 한 번 제나스의 말을 곱씹으며 욕설을 삼켰다. 망할 제나스.
우리의 대화를 듣던 에녹이 침착하고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마거릿, 제나스란 자가 그대에게 마물에 대해 알려 준 이유는 들었나? 수상쩍군, 함정일지도 모르니 조심할 필요가 있을 것 같은데.”
에녹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나는 생각에 잠겨 당시의 일을 떠올렸다.
“아마 제가 그 자리에서 죽을 거라고 생각해서 알려 준 것 같아요. 마물에게 거의 먹힐 뻔했거든요.”
“뭐?! 그런 말 없었잖아.”
내 말에 카이든이 발작하듯 화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콰직-
그때 에녹이 들고 있던 통조림 캔이 거칠게 찌그러졌다. 굴곡진 근육으로 섬세하게 짜인 실팍한 팔뚝엔 힘줄이 잔뜩 돋아 있었다. 카이든도 루제프도, 나도 할 말을 잃고 에녹을 쳐다보았다. 그가 태연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그 마법사가, 그댈 죽이려고 했다고?”
목소리는 점잖았지만, 어쩐지 눈빛에 은은하게 광기가 비치는 것도 같았다. 그 격한 반응에 당황한 나는 눈을 굴려 시선을 살짝 회피했다.
“아…… 음. 정확히는 방치네요. 제나스가 직접적으로 절 위협한 건 아니지만, 오두막으로 들이닥친 마물에게 끌려갈 때, 구해주지 않고 방치했거든요.”
“그 XX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뛰쳐나가려는 카이든의 손을 끌어당겨 애써 앉히고는 에녹을 돌아봤다.
“단서가 이 지도뿐인데, 마물의 모체를 찾는 건 어때요? 제나스의 말이 사실이라면, 마물 소탕을 위해서라도 마물의 모체를 없애야 해요. 그렇게 되면 제나스가 더는 마물의 눈을 빌려 우리를 감시할 수도 없을 거고요.”
“마거릿 말이 맞다. 단서는 이것뿐이고 지금 이곳과 거리상으로도 가장 가깝지.”
“마물의 모체를 찾기 전에 성녀님을 만나는 건 어떻겠습니까?”
이번엔 루제프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제시했다.
“성녀님이 갖고 계신 지도에 보급품이 있는 장소가 표시되어 있었잖습니까. 마물의 모체가 있다는 섬의 동쪽 방향으로 가는 길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루제프의 말이 끝나자 에녹이 턱을 쓰다듬으며 다시 바닥에 펼쳐진 지도를 노려봤다.
나도 에녹을 따라 지도를 쳐다봤다. 우리가 갖고 있는 지도에는 보급품 표시가 없었지만, 내 기억으로 북섬에는 보급품 표시가 있던 장소가 총 세 군데였다.
그 세 군데 중 한 곳이 지금의 벙커 위치였다. 우리가 챙긴 물건들이 아마 ‘보급품’이 아닐까 싶었다.
“마물의 모체와 가까운 위치에 보급 표시가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때 에녹이 입을 열었다. 그는 나를 쳐다보며 의견을 구했다.
“디에고 경을 찾으며, 그곳에 먼저 가보는 게 어떻겠나. 그런 다음 성녀를 찾는 게 좋겠어. 마물의 모체가 있는 곳은 위험성이 매우 큰 곳이니, 상황 파악부터 한 다음에 다시 계획을 세우도록 하지.”
에녹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물의 모체에 관해 생각하다가 제나스가 내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나는 마물의 눈을 빌리는 것뿐이지, 조종하는 게 아냐. 걔들이 그냥 널 좋아하는 거야.’
‘마물이 날 왜 좋아해?’
‘메그한테서 맛있는 냄새가 나나 보지. 다른 사람하고는 다른.’
마물들이 나를 좋아한다고 했었지…….
그 좋아한다는 게 은지처럼 따르는 느낌이 아니라 정말로 ‘별미’로 생각하고 공격하는 느낌이었다.
이런 내가 마물의 모체를 만나는 게 과연 괜찮은 일일까?
‘그리고 메그 일행 중에 마력을 사용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던데.’
‘나도 이 몸으로는 제어 당하고 있는 마력을, 그 사람은 어떻게 썼을까.’
내 영혼이 다르다는 걸 제나스가 결국 알게 됐다면, 마력 사용이 가능한 게 나라는 것도 알아차리지 않았을까?
제나스를 만나고 싶었다. 아직도 그에게 궁금한 점이 너무도 많았다.
‘마물의 모체가 뭔데?’
‘그건 직접 가봐.’
‘근데 난 메그가 살아남았으면 좋겠다. 일종의 도박? 재미라고 해두자. 좀 힘내 봐. 여긴 알레아 섬이잖아.’
나는 제나스가 해준 말을 떠올리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망할 제나스!’
* * *
쏴아아-
폭우가 쏟아지는 오후였다.
이런 날씨엔 마물이 나타나도 조명탄을 사용하는 덴 한계가 있다. 비에 젖어 조명탄의 불꽃이 금방 사그라들기 때문이다.
‘젠장, 벙커에 우산이나 우비는 없던데.’
나는 입고 있는 항공점퍼의 후드를 뒤집어썼다. 그러나 세 남자는 후드가 없어서 내리는 비를 처량하게 맞아야만 했다.
카이든과 에녹이 각각 커다란 배낭을 맺고 루제프가 은지를 안고 있었다. 나는 메고 있는 크로스백이 젖어가는 걸 보다가 항공점퍼 안으로 가방을 고쳐 멨다.
조명탄이나 라이터는 티셔츠 같은 천으로 돌돌 말아서 보관하긴 했으나, 이렇게 무자비하게 내리는 비라면 그마저도 젖을 수 있었다.
쏟아지는 비의 양이 심상치 않았다.
우리는 질퍽한 진흙바닥을 밟고 힘겹게 움직였다. 그러다가 끝내는 얼마 가지 못하고 강가 근처의 동굴을 찾아 그 안에 들어가야만 했다.
“제기랄. 꼭 기다렸다는 듯이 비가 내리네.”
카이든이 짜증스럽게 물먹은 옷깃을 쥐어짜며 중얼거렸다.
나는 멍하니 동굴 입구에 앉아 내리는 비를 처량하게 바라만 봤다. 마음먹고 뭔가를 해보겠다고 나오자마자 이런 재해라니.
비 내리는 걸 보는 건 정말 오랜만인 것 같다. 이 섬에서 눈을 떴을 당시 내리고선 한 번도 비가 온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쏴아-
울적한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비 내리는 소리는 시원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어깨에 메고 있던 크로스백을 열어 내용물을 꺼내어 살폈다.
유안나의 노트와 소설 <생존보다 중요한 것>은 일부가 젖어 있었다. 라이터와 조명탄, 그리고 상비약은 아직 멀쩡한 것 같고 제나스가 준 망원경도 멀쩡했다.
“건전지도 없는 손전등을 줘서는.”
나는 작동되지 않는 손전등을 바닥에 툭툭 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제나스가 왜 이런 작동도 되지 않는 걸 줬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그가 준 물건이라 더욱 찝찝했다.
‘아무래도 망원경과 손전등은 버리는 게 좋을 것 같아.’
나는 망원경과 손전등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다시 가방 안에 넣었다. 그리고 동굴 안을 열심히 청소 중인 남자들을 돌아봤다.
지금껏 누군가의 시중만 받으면서 살아온 남자들이지만, 성정이 까다로워서인지 더러운 꼴은 또 잘 못 보는 모양이다.
덕분에 내가 할 일이 많지 않았다.
나는 에녹이 젖은 장작을 모아 물을 붙이려고 애쓰는 걸 보다가 가방에서 다시 라이터를 꺼냈다. 그리고 장작에 불을 붙였다.
가만히 그 모습을 보던 루제프가 내게 물었다.
“그런 물건들을 사용할 줄 아는 것도 영애가 다른 사람, 아니 그러니까 다른 세계에서 다른 삶을 한 번 살았기 때문입니까?”
루제프의 물음에 에녹과 카이든이 동시에 나를 쳐다봤다. 내심 그게 궁금했던 모양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네. 어쩌다가 제가 그쪽 세계에서 다른 삶을 살다 왔는지는 모르겠어요. 이곳에 왜 그쪽 세계의 물건이 있는지도…….”
-그런 의미에서 차원 너머로 사라진 마거릿의 영혼에 대해서 얘기해보자. 차원의 문은 제나스만이 열 수 있거든. 그것도 그냥 열 수 있는 건 아니고…… 실험이 모두 끝난 뒤에, 죽은 이들의 마력을 끌어모아야 가능해. 한두 사람의 마력으로 열리는 문이 아니거든.
-그렇다고 차원의 문을 열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야. 네가 그 열쇠로 회귀 게이트를 열면 차원의 문도 열릴 거거든. 마거릿은 그때 내가 데려올게. 제나스는 아직 이 사실을 모르니까 신속하게 움직여야 해.
마법진을 통해 본 기억 속 아나타가 분명 그런 말을 했었지.
나는 모닥불 앞에 앉아 세 남자를 쳐다봤다.
“벙커에 있던 두 개의 문 중, 마법진이 그려져 있던 문이 차원의 문인 것 같아요. 제가 잠시 살았던 세계로 통하는 문이요. 거길 통해서 1년마다 그쪽 세계 물건들이 넘어오는 것 같아요. 실험은 1년 주기로 반복된다고 들었거든요. 다른 문은 전에 말한 대로 회귀게이트고요. 성녀님이 가진 열쇠로 회귀게이트를 열면 차원의 문도 열린다고 했거든요?”
벙커에서 내게 회귀게이트와 유안나, 아나타에 대한 내용을 들은 에녹과 카이든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들었다.
루제프는 어리둥절한 얼굴이었지만, 대충 눈치껏 이해하려고 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게 보였다.
“그런데, 실험이 1년 주기로 반복된다는 건 뭐야? 아나타가 한 말이야?”
카이든이 문득 내게 의문을 표했다. 나는 크로스백에서 소설 <생존보다 중요한 것>을 꺼내어 첫 장을 펼쳤다.
- 1년마다 섬 밖으로 연결된 문이 열린다. 그리고 그들은 그 ‘문’이 열리기 전까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섬에서 살아남아야만 했다.
1인칭 시점의 소설 도입부에 적힌 글귀다.
손 글씨로 적힌 누군가의 습작용 소설이었는데, 그 글귀만 다른 글씨체여서 이상하긴 했지.
물론 도입부에 적힌 글귀 외에도 중간 중간 글씨체가 다른 부분이 있었지만, 미세한 차이였고 그게 두 사람이 쓴 글이어서 그랬던 걸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정황상 이 문구는 아나타가 썼을 거예요. 원래는 1년마다 문이 열리고 피실험자들을 데려오는 시스템인 것 같아요. 그런데, 상황을 보니 우리가 마지막 피실험자인 것 같아서 1년마다 열리는 문은 의미가 없을 거라는 말이죠.”
“그 문을 열면 탈출할 수 있는 겁니까?”
루제프의 의문에 에녹이 고개를 저었다.
“하나는 회귀게이트, 하나는 차원의 문이라고 하지 않았나. 둘 다 탈출할 수 있는 문은 아닌 것 같군.”
“제 생각도 같아요. 탈출하는 방법은 다른 데 있을 거예요. 이를테면 섬을 파괴해야만 할지도 모르겠는데, 그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잖아요.”
다른 탈출구가 있다면, 어디일까. 혹시 제나스의 오두막 지하에 있던 의문의 ‘문’일까? 가장 수상쩍은 걸로 따지자면, 거기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