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향한 흔들림 없는 마음이 너무도 고마웠다. 체증이 내려앉은 것처럼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들의 그 단단한 믿음에 대한 보답을 하고 싶었다.
“제 상황에 대한 건, 말하자면 복잡해서 성녀님과 만났을 때 제대로 설명을 드리고 싶었는데요…….”
나는 이걸 어떻게 정리해서 설명을 해줘야 하나 머리를 싸매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성녀님도 저와 연관된 일을 겪은 것 같았어요. 우선 그녀를 만나 얘기를 해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상했다.
아무리 다른 사람의 몸에 빙의를 했다지만, 타인이 가진 과거의 기억을 나는 아무런 무리도 없이 받아들였다.
마치 내가 본래의 마거릿이라도 되는 것처럼 기억이 뒤섞였는데도 나는 이질감 없이 그것들을 받아들였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인데, 이제는 왜 그랬는지 알겠다. 내가 진짜 마거릿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차분하게 세 남자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내가 겪은 일과 아나타와 유안나의 대화에 대해.
세 남자는 내게서 그간의 얘기를 듣고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침묵했다.
다른 차원에서 살아갔던 이야기까지 꺼내고, 그때 읽은 <생존보다 중요한 것>에 관해서도 이야기하고 나자 스스로가 너무도 바보 같고 머저리 같아서 참을 수가 없었다.
책 속 세상에 빙의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니. 나는 그동안 필요 없는 걱정을 하고 과도하게 이들을 의심했다.
“그동안 속여서 미안해요.”
솔직히 세 남자가 이 말을 듣고 배신감을 느껴도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죽고 싶지 않았어요.”
에녹은 말없이 나를 빤히 쳐다봤다.
침묵을 가르고 뜻밖의 위로를 건넨 건 루제프였다.
“말했잖습니까. 저희는 영애를 믿습니다. 그러니 영애도 저희를 믿어주십시오.”
루제프가 경외하듯 내 두 손을 조심스럽게 잡고 속삭였다. 그 또한 신뢰가 가득 담긴 눈을 하고 있었다.
뺨이 화끈거렸다. 부끄러워서.
나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만 끄덕였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루제프는 그런 나를 보고 웃으며 머리를 토닥였다.
“무서웠겠군.”
그때 에녹이 입을 열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들고 그를 쳐다봤다.
“대답해줘서 고맙다. 그동안 혼자 무거운 비밀을 짊어지느라 고생 많았어.”
에녹이라면 믿어줄지도 모른다고 막연히 생각했다. 나 역시 이들을 믿고 신뢰했으니까.
“그리고 알아주지 못해 미안하다.”
에녹의 이어지는 말에 다시금 울음이 차올랐다. 나는 이를 악물고 눈살을 찌푸렸다.
흐윽.
결국 복받쳐 다시 한번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마거릿, 울지 말라니까.”
카이든이 엄지로 부드럽게 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 손길이 너무도 따뜻해서 다시금 눈물이 흘렀다.
얘기를 가만히 듣고만 있던 루제프 또한 내 머리를 계속 쓰다듬으며 위로를 했다. 그는 별다른 말을 꺼내지는 않았지만, 그 다정한 손길이 너무도 큰 위로가 됐다. 그래서 결국 난 이번에도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일곱 살 난 어린아이가 된 것 같다. 이곳에 와서 이게 몇 번째 눈물인지도 모르겠다. 눈물샘이 고장이라도 난 건 아닌지 걱정이 될 지경이다.
에녹도 한마디 더 보탰다.
“그만 울어라. 예쁜 눈이 다 붓겠군.”
예쁜 눈이라니. 에녹은 늘 다정한 말도 담백하게 말을 하는 사람이었는데, 어쩐지 낯간지러운 그 말에 나는 결국 눈물을 멈췄다.
“그런데 궁금한 게 있군.”
나는 의아한 얼굴로 에녹을 봤다.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운을 뗐다.
“그 소설 속 이야기 말이다.”
소설? 아. <생존보다 중요한 것>을 말하는 모양이다. 에녹은 내 눈을 똑바로 마주 보다가 이내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그의 눈빛이 내 입술 위로 고였다.
피식 웃음을 지은 에녹이 엄지로 내 입술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그가 찬찬히 나른한 동작으로 시선을 올려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내가 그리 힘이 좋았나? 그대가 나를 성인 로맨스 소설의 남자 주인공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네, 네?!”
내가 놀라서 반문하자 그가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렸다. 어린아이처럼 천진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조금 전까지 서글펐던 감정들이 눈 녹듯이 한 번에 녹아내렸다.
“잠깐, 주인공이 황태자야? 거짓말 하지 마. 기술은 내가 더 좋아, 마거릿. 그 소설책 다 거짓부렁이네.”
이어지는 카이든의 말에 이번에 나는 어리벙벙한 얼굴로 그를 돌아봤다.
“증명할 수도 없는 건 말하기 쉬운 법이지.”
도발하듯이 에녹이 말하자 카이든의 안면이 거칠게 일그러진다.
“증명이 왜 불가능합니까?”
그러더니 카이든이 나를 다시 돌아봤다.
“마거릿, 너도 못 믿어? 증명이 필요하면 말해. 얼마든지 보여줄 테니까.”
카이든이 금방이라도 옷을 벗을 듯이 말을 해서 나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필요 없어.”
내 단호한 대답에도 카이든은 주눅 들지 않았다. 그가 다시 에녹을 노려보자 에녹의 눈썹이 못마땅하게 치켜 올라갔다.
“말보다 행동이 더 먼저 나가는 마법사는 정말이지 처음 보는군. 참고로 칭찬은 아니다.”
“당연히 칭찬 아니겠죠, 누굴 머저리로 봅니까?”
“모르고 있었다니 놀라운데.”
카이든이 욱하며 달려들 기미를 보이자 루제프가 한숨을 내쉬며 주위를 환기시켰다.
“저 여러분……, 우선 저희는 정리를 하고 한시라도 빨리 디에고 경을 찾아야 합니다.”
루제프의 말에 에녹과 카이든이 그제야 무분별한 다툼을 멈추었다.
그렇게 우리는 하던 식사를 마저 한 뒤에 짐을 챙겼다.
“지도를 한 번 보는 게 좋겠는데.”
에녹의 말에 나는 크로스백에서 지도를 꺼내 펼쳤다. 우리가 꺼낸 벙커가 아마도 보급품이 있던 그 장소일 거다.
그러다가 나는 북섬의 동쪽 끝자락에 마물의 모체가 있다는 제나스의 말을 떠올렸다.
디에고가 왠지 거기에 있을 것 같은 나쁜 직감이 드는데.
“디에고 경이 어떻게 사라진 건지 자세히 얘기해주시겠어요?”
나는 지도를 보다가 루제프를 향해 물었다. 온순한 양처럼 얌전히 눈치를 보던 그가 생각을 더듬는 얼굴로 대답했다.
“한밤중이었을 겁니다. 영애도 찾지 못했고 잘 곳이라도 찾아야겠다고 생각해서 주변을 탐색하던 중에 이상한 걸 봤습니다.”
“이상한 거?”
뚫어져라 지도를 노려보고 있던 카이든이 고개를 들고 되물었다. 루제프가 사뭇 진지하게 목소리를 깔았다.
“그건 또 무슨 소리지?”
이번엔 에녹이 뜸들이지 말고 본론만 빨리 말하란 듯이 고개를 까딱였다.
“수풀 사이로 한 노년의 신사가 저희를 부르더군요.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었지만, 형체가 희미한 게 꼭 유령 같기도 했습니다.”
루제프가 목소리를 한층 더 낮췄다.
“처음엔 정말 사람인 줄 알고 다가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디에고 경이 저를 막아서더라고요. 그 노인의 발이 보이지 않는다고.”
헉.
나는 진지하게 그의 말을 듣다가 소름이 돋아서 숨을 삼켰다.
‘아니, 왜 이 섬에는 이렇게 유령 같은 게 많은 거지?’
나는 벙커와 제나스의 오두막에서 아나타의 영혼으로 추정되는 여자를 봤던 일이 떠올랐다.
게다가 벙커 지하에는 움직이는 해골들도 있었지.
혹시…… 그것들은 알레아 섬에서 피실험체로 쓰이다가 죽은 자들의 혼이 아닐까? 천년 동안 실험이 진행되어 왔으니,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섬에서 생을 마감했겠는가.
“저희는 최대한 그 존재를 무시하고 움직였습니다. 그렇게 노인을 지나쳐서 한참을 걸었는데, 길 끝에 그 노인이 또 서 있더군요. 분명 지나쳐 왔는데 말이죠.”
소름 끼치는 이야기였는데 카이든은 별 반응이 없었고 에녹도 별다른 동요 없는 덤덤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들을 뿐이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갑자기 저와 디에고 경 주위를 수많은 사람이 에워싸기 시작했습니다.”
“네? 수많은 사람이요?”
“사실 사람이 맞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숲 속 어디서 나타난 건지, 갑자기 얼굴 형체도 알아보기 힘든 사람 형체들이 하나둘씩 늘어나며 저희 주변을 에워싸며 다가왔습니다.”
“음, 이것도 환각이 아닌가? 두 사람이 아나콘다 마물의 독가스를 맡았을지도 모르지.”
가만히 얘기를 듣던 카이든이 넌지시 의문을 표했다. 신빙성 있는 추론이다. 어쩌면 이쪽이 더 가능성 있을지도 몰랐다.
우린 여기서 이상한 것들을 수없이 많이 봤으니까. 환각의 섬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아나콘다 마물을 마주친 적이 없어 잘 모르겠습니다만, 환각이 맞을지도 모르겠군요. 이 섬에선 워낙 그런 일이 많았으니까요.”
루제프가 초췌한 얼굴을 하고는 마른세수를 했다.
“그것들은 누군가를 찾는 것 같았습니다. 한참을 저희 주변만 배회하다가 사라졌거든요.”
누군가를 찾는 것 같았다니. 나는 이번에도 그 누군가가 나임을 지울 수 없는 불길한 예감 같은 것을 느꼈다.
마물들이 내 마력 때문에 나를 좋아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일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결국 잠도 못 자고 숲을 헤매며 밤을 샜습니다. 다행히 그동안 마물은 나타나지 않더군요. 마치 마물들도 그 유령들을 피하는 것 같았습니다.”
“…….”
“그렇게 밤을 새고 돌아다니다가 강을 발견하고 그 앞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거든요. 피로가 쌓인 탓인지 잠깐 휴식을 취한다는 게 깜빡 잠이 들었습니다.”
루제프가 초췌한 얼굴로 마른세수를 했다. 정말 피곤해 보이기는 했다.
“그러다가 잠에서 깼는데, 옆 자리에 앉아 있던 디에고 경은 온데간데없이 보이지 않더군요. 이 검만 남겨두고 사라졌습니다. 평생 검을 잡아온 기사가, 그것도 황실의 근위대장이 이 위험천만한 섬에서 검을 놔두고 어딘가로 사라졌다니, 너무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럼 디에고 경은 못 찾은 거예요?”
내 물음에 루제프가 참담한 소식을 전하는 전쟁용사 같은 얼굴을 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기에 결국 찾으러 돌아다녔는데, 근처에 이런 지도가 떨어져 있더군요.”
“지도?”
에녹의 반문에 루제프가 사제복의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천 조각을 꺼내어 펼쳤다.
내가 가진 지도엔 벙커 표시만 있었는데, 루제프가 꺼낸 지도에는 북섬 동쪽에 의문의 괴물 같은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문득 제나스가 ‘마물의 모체’에 대해 들려준 이야기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