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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149)화 (149/234)

“아직 꽃 향이 안 빠졌으면 어떡해요? 주교님은 일단 들여보내죠.”

내 말에 에녹과 카이든이 황급히 루제프를 붙잡아 방안으로 끌고 들어왔다. 우리는 문을 단단히 걸어닫았다.

방안으로 끌려 들어온 루제프는 에녹과 카이든을 밀치고 내게 다가와 손을 잡았다.

“어떻게 된 겁니까? 영애, 무사하셨군요!”

그는 내 손등에 기도를 하듯이 이마를 기대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한참 동안이나 그러고 있던 그가 갑자기 고개를 벌떡 들고 내게 소리쳤다.

“그렇게 갑자기 떠나버리시면 어떡합니까!”

루제프는 화가 잔뜩 난 얼굴이었다. 아니, 서운함인가? 아무튼 한가득 찌푸린 얼굴로 나를 노려보던 그가 내 손을 당겨 끌어안았다.

“……걱정했잖습니까.”

어깨에 얼굴은 묻은 그의 몸이 벌벌 떨렸다.

나는 루제프에게 폭 안긴 채 에녹과 카이든을 바라봤다. 에녹은 팔짱을 낀 채로 별말 없이 서 있었고 카이든은 어깨를 으쓱이며 관망 중이었다.

“무슨 일 있었어요? 디에고 경은요? 왜 다들 따로 있는 거예요?”

“그게……. 영애를 찾기 위해 전하와 로드, 디에고 경과 저, 이렇게 두 팀으로 나눠서 움직였습니다.”

내 물음에 루제프가 에녹과 카이든을 흘끗 보고서는 대답했다. 에녹이 고개를 끄덕였다.

루제프는 기억을 더듬으며 상황을 설명했다.

“저와 함께 숲 속을 정찰하던 디에고 경이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소리도 없이 사라져서 영문을 모르고 혼자 숲을 헤매던 차에 이곳을 발견했고요.”

“갑자기 사라졌다고요? 무슨 일 생긴 거 아니에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된 건지.”

루제프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대답하고는 피곤한 듯이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러고 보니 그는 상당히 초췌했다. 또다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꼬르르륵-

루제프의 배에서 허기를 알리는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부끄러웠는지 그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대던 루제프가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배가……. 배가 너무 고픕니다.”

그의 말을 듣고 보니 나도 허기가 졌다. 나야 여기서 통조림 캔을 땄지만, 에녹과 카이든, 루제프는 아니었으니까.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 식사는 거대한 아나콘다 마물이 나오기 직전이었던 것 같은데.

당장에 쓰러져도 이상할 것이 없기는 했다.

“밥부터 먹고 얘기할까요?”

내 말에 루제프가 눈치를 보며 내게 물었다.

“먹을 게 있습니까?”

에녹과 카이든도 궁금했는지 나를 쳐다본다. 나는 챙겨둔 가방을 가져와 그 안에서 통조림 캔을 꺼냈다.

결국 우리는 상황파악을 하고 계획을 세우기 전에 잠시 요기를 하기로 했다. 나는 바닥에 앉아 통조림을 까서 모두에게 나눠줬다.

“대체 이게 뭡니까? 어떻게 이런 맛이 나죠?”

햄 통조림을 먹은 루제프는 신세계를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눈을 번쩍 뜨고는 기뻐했다. 괜히 나까지 뿌듯해진다.

반면 카이든과 에녹은 다소 미묘한 얼굴을 하고는 식사를 했다. 나는 의아한 얼굴로 그들을 보며 물었다.

“맛없어요?”

“어……?”

카이든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나를 보며 시선을 회피했다.

“그게 아니라…….”

“원래는 로드와 둘이 있을 때 따로 얘기하고자 했다. 하지만, 주교까지는 괜찮겠지.”

말끝을 흐리며 우물쭈물하는 카이든을 대신해서 에녹이 대답했다. 난데없이 호명된 루제프가 영문을 모르고 눈을 깜빡였다.

“마거릿, 그대에게 묻고 싶은 게 더 있어.”

에녹이 침착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그가 운을 떼자, 어리둥절해 하던 루제프도 무언가 알아차렸다는 얼굴로 내 눈치를 봤다.

불안하게 왜 저러지?

나도 모르게 바짝 긴장을 하고 그를 쳐다봤다. 근처에서 꾸벅꾸벅 졸던 은지가 눈을 뜨다 말고 내게 기어와 무릎 위에 엉겨 붙었다.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에녹이 물었다.

“그 망할 대마법사가 말하기를, 그대의 몸에 다른 영혼이 들어가 있다고 하더군.”

“……네?”

너무 놀란 난 앉아 있던 자세 그대로 굳었다. 카이든이 한숨을 내쉬며 말을 덧붙였다.

“우린 네 말만 믿어, 마거릿. 그러니까 진실을 알려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는 들고 있던 통조림을 내려놨다. 애써 침착한 얼굴을 했지만 피가 싸늘하게 식는 기분이었다.

에녹과 카이든, 루제프를 차례로 바라봤다. 그들 모두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무서웠다.

실망했나?

내게 배신감을 느끼는 건가? 아니면, 나를 의심하고 있을까?

적당한 말을 찾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뭐라고 대답을 해야 이들이 날 이해해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 갑자기 울컥 눈물이 차올랐다.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눈가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이윽고 차오른 눈물이 주체를 못하고 뺨을 타고 방울방울 떨어지자 세 남자가 나를 보며 허둥지둥 댔다.

“사실이라면, 여러분은 절 싫어할 거죠?”

방울진 눈물이 계속해서 흘러내렸다.

처음엔 혼자 살아남으려고 했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됐을까.

이렇게까지 타인에게 마음을 열어 본 건 처음이다. 마거릿은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일단 지금의 나는 이진주가 아니던가.

나는 이들을 좋아한다. 이제 그건 부정할 수 없었다. 이성적 감정을 떠나서 그냥 사람으로서의 이들이 좋았다.

나는 손등으로 눈물을 대강 훔치며 세 남자를 쳐다봤다.

“거짓말해서 미안…….”

말을 채 끝내지 못하고 나는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울음이 목 끝까지 차올라서 더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동안 거짓말을 했던 건 나야.’

언젠가부터 이들이 날 신뢰하기 시작했다는 건 알았다. 그럼에도 의식적으로 한 발짝 거리를 두던 것은 나였다. 비겁하게.

처음으로 마음을 내어준 이들에게 미움을 받는 건 두려웠지만, 이제는 피할 수 없었다.

사실대로 말하고 비밀을 공유하면 서로 마음이 통하는 관계로 발전할 수 있을까?

억눌린 울음소리와 코를 훌쩍이는 소리만이 방 안을 가득 메웠다.

“마거릿, 미안해. 울지 마.”

가장 먼저 침묵을 깬 건 카이든이었다. 그는 어쩔 줄 몰라하며 내게 사과했다.

그러나 한번 터진 눈물은 쉽사리 그쳐지질 않았다. 손으로 눈물을 훔쳐내는 것도 한계가 있을 지경이다.

결국 보다 못한 에녹이 행거에서 남는 티셔츠 한 장을 가져왔다. 그가 세심하게 내 얼굴을 살피며 눈물을 닦아준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다정한 손길에 왠지 모를 서러움이 더 밀려왔다.

그가 얼굴을 계속해서 닦아주어도 내 눈에서 흐르는 눈물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에녹이 한숨을 내쉬더니 기어코 손을 내렸다. 눈물을 닦아주는 게 문제가 아니라는 걸 깨달은 모양이다.

루제프와 카이든은 내 양 옆에 서서 고장 난 로봇처럼 삐걱거렸다.

“마거릿.”

코를 훌쩍이다가 나는 에녹을 쳐다봤다. 조금 전에 한 질문에 대한 답을 요구하는 것처럼 나를 지그시 보는 시선이 집요했다.

나는 결국 눈물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제나스가 다른 말은 안 했어요?”

“그대 안에 다른 영혼이 있다, 그대가 우리 모두를 속이고 있다. 그것밖에 듣지 못했다.”

분란을 조장하려고 그런 말을 했던 모양이다. 제나스는 내가 이진주라는 걸 아는 걸까? 아나타가 말한 걸까? 제나스는 어디까지 나를 아는 걸까.

내가 ‘진짜’ 마거릿이었다는 진실은 모르는 것 같았는데.

그런 생각을 하던 중에 에녹이 말했다.

“분란을 만들기 위해서 흘린 말인 걸 알고 있었으니 걱정하지 마라.”

“하지만, 사실인걸요.”

나는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솔직한 대답에 카이든이 놀란 얼굴로 내 어깨를 잡았다.

“진짜 너 마거릿이 아니야?”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나를 보는 카이든에게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그동안 그와 감정적 교류를 한 건 난데, 이젠 마거릿이 아니라서 싫은 걸까.

“마거릿이 아니면, 내가 싫어?”

나는 기운 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카이든의 표정을 볼 자신이 없었다. 양심은 있으니 기대는 하지 말아야지.

그렇게 공허한 마음으로 답을 기다리고 있는데, 카이든이 내 턱을 잡아들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내가 어떻게 널 싫어할 수가 있어. 세상이 멸망하고 내가 죽지 않는 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

카이든은 입에 꿀이라도 바른 듯이 나를 다독였다.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과장된 말에 겸연쩍어진 나는 결국 헛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아득한 늪으로 깊게 가라앉다가 단숨에 끌어올려진 기분이다.

엉거주춤 서 있던 루제프가 내 반응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게 보였다.

에녹은 고요하고 잠잠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눈이다. 이윽고 그가 나를 불렀다.

“마거릿.”

“네?”

“나는 원래 마거릿 로즈 플로네를 경멸했다. 그건 그대도 알고 있겠지.”

“아……. 네.”

나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이 얘기를 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카이든은 불안해하는 내 얼굴을 보더니 조심히 내 손을 잡았다.

에녹이 흘끗 카이든과 맞잡은 내 손을 바라봤다. 그는 한참동안 우리가 잡은 손을 노려보다가 내게 물었다.

“그대가 다른 사람이라고 하기엔 마거릿의 기억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던데.”

“……마거릿의 기억도 갖고 있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인 거 아는데, 사실이에요. 저는 마거릿이지만, 마거릿이 아니거든요. 정확히 말하자면 다른 사람이라기보단, 마거릿이 변해서 제가 된 게 맞겠네요.”

에녹은 팔짱을 끼고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나를 내려다봤다. 그의 얼굴에 표정이랄 것이 없어 더욱 무심하고 서늘해 보여 나는 움츠러들고 말았다.

“비현실적인 이야기인 거 알아요. 저도 지금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걸요. 내가 누구인지……. 나도, 나도 모르겠…….”

말하다가 다시 서러워져서 그만, 말문이 막혀버렸다.

이걸 어떻게 이해 가능하게 설명을 하지? 솔직히 말해서 이런 말을 하는 나부터도 내 정체가 무엇인지 모르겠는걸.

에녹은 표정 없는 얼굴로 가만히 나를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애초에 현실성이 없기로 따지자면, 경멸하던 여자에게 이렇게까지 미쳐 있는 내가 더 현실성이 없겠지.”

꼭 마치 나를 나무랄 듯이 굴어서 잔뜩 긴장하고 있었는데, 들려온 뜻밖의 말에 나는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카이든과 루제프가 ‘네가 그럼 그렇지’하는 시선으로 에녹을 보았다.

에녹은 군더더기 없는 단정한 시선으로 나를 봤다. 그 어떤 일말의 편견도 없는 곧은 눈빛이었다.

“내가 알고 싶은 건 객관적인 사실뿐이었다. 그래야 그대를 완벽히 보호할 수 있으니까. 고작 그런 이유로 내가 변할 거라 생각했나.”

“아…….”

예상치 못한 답변을 들은 나는 머저리같이 얼떨떨하게 서 있었다.

내 손을 잡고 있던 카이든이 나를 슬쩍 당겼다. 저를 보란 듯이.

“이제 네 생각을 말해봐, 마거릿. 우리를 대하던 네 마음과 태도는 전부 거짓말이었어?”

나는 카이든의 물음에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절대 아니야.”

“그럼 됐어.”

카이든은 그렇게 간단히 대답하고는 물러났다. 그 또한 에녹과 다름없이 곧은 나무처럼 완강한 태도를 보였다.

이 남자들은 어쩜 이럴까? 어떻게 이렇게 흔들림이 없을 수가 있지?

“저도 영애를 믿습니다.”

조용히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고 있던 루제프가 말을 보탰다.

“야, 따까리. 너는 원래 마거릿 광신도잖아.”

그리고 루제프의 말에 카이든이 미간을 찌푸리고는 그를 노려봤다.

“그게 무슨 모욕적인 언사입니까? 제 신은 따로 있습니다.”

“아. 그러시겠지.”

카이든이 건성으로 대답하자 루제프가 화를 터트렸다. 두 사람의 다툼이 또 시작되는 걸 보고 나는 고개를 젓다가 웃음을 짓고 말았다.

어쩐지 시야를 가린 장막이 걷히고 밝은 빛이 쏟아진 느낌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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