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녹이 천천히 내게로 손을 내밀었다.
“이리 와.”
나는 조용히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러자 그가 내 손을 당겨 자신의 무릎 위에 앉히더니 내 뺨에 입맞춤을 남겼다.
난 얼떨떨한 얼굴로 내 뺨을 매만졌다.
내가 정말 미쳐가는 걸까? 이런 행동이 익숙해지다니 너무 놀랍다. 기분도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허리춤에 단단한 팔이 휘감겼다. 흡사 소유욕을 나타내는 짐승처럼 사나운 느낌을 자아내던 그가 기운을 누그러트리고는 내 손을 잡았다.
내 손가락 하나하나에 입맞춤을 남기던 그가 내가 입은 항공 점퍼를 의아한 얼굴로 바라봤다.
“이 옷은 어디서 난 거지?”
그가 해괴한 것을 보듯 점퍼를 바라봤다. 제국인들이 보기엔 굉장히 투박하고 못난 옷처럼 보일 게 분명했다. 나는 점퍼를 앞으로 여미며 방 안 구석에 있는 행거를 가리켰다.
“저기 있더라고요. 제니……, 아니 제나스가 가져다 둔 거 아닌가 싶어요.”
“……제니? 그 놈을 그런 애칭으로 불렀나.”
에녹의 눈썹이 못마땅한 기색을 잔뜩 담고 일그러졌다. 그의 눈동자가 타오르는 장작처럼 뜨거워졌다.
내가 당황해서 목을 움츠리자 그가 한숨을 내쉬며 다정하게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눈치를 살피며 대답했다.
“처음엔 그랬죠. 그런 놈인지 몰랐어요.”
그의 허벅지 위에 앉아 있기가 점점 민망해져서 슬쩍 일어나려고 했는데 그가 나를 다시 당겨 앉혔다.
“몸은 괜찮고?”
그의 물음에 나는 뺨을 긁적이며 내가 앉은 자리를 가리켰다.
“계속 이 자세로 있으면 안 괜찮아질 것 같아요.”
그제야 그가 얌전히 나를 놔줬다.
“하아. 시끄러워.”
내가 에녹의 품에서 빠져나왔을 때 즈음, 카이든이 깨어났다. 그가 게슴츠레 뜬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머리에는 까치집이 져 있었는데, 화려한 외모 탓인지 그마저도 고풍스럽게 소화해버린다.
고개를 들다가 나와 눈이 마주친 그가 황급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가 한걸음에 내게 다가와 나를 끌어안았다.
나는 흘끗 에녹을 바라봤다. 침대에 걸터앉은 그가 턱을 쓰다듬으며 넌지시 카이든을 쳐다보고 있었다.
“괜찮아?”
나를 품에서 떼어낸 카이든이 찬찬히 내 안색을 살폈다. 간밤에 나를 집어삼킬 듯이 저돌적으로 굴던 남자답지 않게 조심스럽다.
“어……. 그런데 마거릿, 너 안에 옷이 더 짧아진 것 같은데?”
점퍼 사이로 크롭티를 본 모양이다. 카이든이 미간을 좁히고는 점퍼의 앞섬을 손수 여며줬다.
“부끄럽잖아.”
“네가 벗고 있는 건 괜찮고?”
“난 괜찮아. 더 보여줄 수도 있거든. 궁금하면 볼래?”
보긴 뭘 봐, 이 미친X.
“안 궁금하니까 넣어둬.”
카이든이 정말로 옷을 마저 벗을 기미를 보이자 에녹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로드.”
그리곤 낮은 목소리로 카이든을 불렀다. 단지 부르기만 했을 뿐인데 엄숙한 분위기가 되고 말았다. 카이든은 혀를 차며 얌전히 물러났다.
나는 상의 탈의를 하고 있는 두 남자를 보며 행거를 가리켰다.
“여기 입을 만한 옷이 있더라고요.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기 전에 일단 옷부터 입는 게 좋겠어요.”
나는 바닥에 널브러진 에녹의 흰 셔츠를 바라봤다. 저 넝마 된 셔츠 조각은 이제 그만 버려야지.
나는 그보다 먼저 행거가 있는 쪽으로 걸어가서는 에녹과 카이든의 옷을 골랐다.
내 뒤에 선 에녹이 양 손을 뻗어 함께 행거를 뒤적거렸다. 얼떨결에 그에게 안기다시피 서서 그의 옷을 골라주게 되었다.
“그나마 이게 에녹의 몸에 맞을 것 같네요.”
난 검정 반팔 티셔츠를 꺼내 에녹의 몸에 대보았다. 그러다가 절로 그의 우람한 근육에게로 시선이 가고 말았다.
간밤의 일이 머릿속을 맴돌아서 죽을 맛이었다.
에녹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 채 얌전히 내게서 옷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는 티셔츠를 몸에 껴입고 바지도 갈아입었다.
“이런 옷은 처음 입어보는군.”
나는 에녹이 입은 옷을 보고 잠시 감탄사를 뱉었다. 몸에 딱 맞아 그의 단단한 근육이 아주 돋보이는 티셔츠다.
“나도 골라줘.”
가까이 다가온 카이든이 행거 위에 너저분하게 걸린 옷들을 살피며 내게 물었다.
다행히도 카이든이 입을 만한 옷과 바지도 있었는데, 그는 굳이 그 위에 마법사 로브를 입는 걸 고집했다.
왜냐고 묻자 그가 씨익 웃으면서 한다는 말이,
“네가 밤에 추우면 어떡해. 같이 덮고 자야지.”
라고 능청스럽게 대답해서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알았으니까, 얼른 옷 입어. 얘기 좀 하게.”
나는 카이든에게 고른 옷을 떠넘겨 준 뒤,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깔끔하게 옷을 갈아입은 에녹이 내게 다가왔다. 그리곤 내 머리를 조심히 쓰다듬었다. 소중한 유리 인형을 다루듯이 섬세한 손길이다.
뭔가 굉장히, 간질거리고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에녹의 손목을 잡았다. 정말로 이상한 마음이 생길 것 같아서.
슬며시 고개를 드니 나를 지긋하게 바라보는 에녹의 금안과 시선이 마주쳤다.
꼭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우린 서로 해야 할 말이 많지.”
에녹이 내게 붙잡힌 손목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의 말이 맞다. 그간 있었던 일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어야 했다.
루제프와 디에고는 어떻게 됐는지도 궁금했고.
그때 카이든이 훌러덩 옷을 벗어던졌다. 난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에녹이 손바닥으로 금방 내 두 눈을 가려버린 탓에 검은 드로어즈밖에 본 건 없지만 말이다.
“부주의하기 짝이 없군, 로드. 마거릿이 보고 있지 않나.”
“보라고 한 겁니다?”
에녹의 타박에 뻔뻔하게 맞받아치는 카이든의 대답이 들려왔다. 에녹은 나를 배려한다고 선반 뒤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왔는데, 역시 카이든은 카이든다워서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자니,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처음, 그러니까 남섬에서 우리 셋이 함께 지내던 그때로.
나는 급격히 어두워진 얼굴로 말을 삼켰다.
에녹, 카이든과 헤어지기 직전 상황이 어땠었는지 기억났기 때문이다.
‘내 마력을 봉인하려고 했었지. 그리고 나를 죽인다는 말을 했었고.’
내가 독가스에 중독되어 잘못 알아듣고 오해한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오해가 아니었다면? 그때는 어쩔 거지?
“무슨 생각을 해.”
머리 위에서 에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가린 손이 치워졌다. 나는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봤다.
에녹은 눈치가 빨라서, 아마도 내가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모양이다. 나는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며 눈을 깜빡이며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당신들이 나를 죽이려고 한다면, 그 이유는 뭘까. 그런 생각 중이었어요.”
“……뭐?”
에녹의 눈썹이 차차 일그러졌다. 옷을 다 갈아입고 내게 오던 카이든이 정말 놀란 얼굴로 기겁했다.
“잠깐, 마거릿! 그게 무슨 소리야?! 누가 누굴 죽여? 우리가, 널?”
카이든이 황당하단 얼굴로 내게 물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에녹은 먹먹한 얼굴을 하고는 나를 빤히 내려다봤다. 어쩐지 조금 속상해 보이는 표정 같았다면 내 착각일까?
“짐작은 했다. 도망친 이유가 그래서였군.”
에녹의 대답에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다시금 서러움이 밀려와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한걸음에 달려온 카이든이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나를 올려다 본다.
“우리가 그럴 리가 없잖아.”
“응.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어.”
내 대답에 카이든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그런 카이든의 얼굴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직접 물어보고 판단하려고 했어. 내가 들은 말이 진짜인지. 정말 내 마력을 봉인하려고 하는 건지.”
“뭐? 마거릿, 그건……!”
카이든이 놀라서 반박하려던 것을 에녹이 가로 막았다.
“내가 말하지. 마거릿, 그대가 오해를 하고 있어.”
그가 차분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내가 그날 밤, 드문드문 들어 오해했던 그 대화에 대해서 말이다.
“이 섬에서 탈출하는 데 그대가 열쇠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우리 중 유일하게 마력을 갖고 있으니까. 마력을 봉인시키겠다고 한 건, 그대의 마력이 마물을 불러 모으는 건 아닌지 실험을 해보기 위해서였다.”
“그럼 절 죽이겠다고 한건…….”
“그런 적 없어. 네가 들은 건 아마 실험을 해본 뒤에 마물을 죽여도 늦지 않을 거라는 말을 들은 걸 거야.”
에녹의 말에 내가 의문을 표하자 카이든이 대답했다.
아…….
나는 그제야 상황을 이해하고 탄식했다. 밀려오는 안도감과 함께 그들의 믿음을 의심해서 미안한 감정이 파도처럼 내 안을 휩쓸었다.
나는 자괴감에 젖어 그만 두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부끄러웠다. 그걸 뛰어넘는 자책에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나는 슬그머니 손을 내리고 내 발끝만 노려봤다.
“미안해요……. 난……. 그런 뒤에 다시 돌아갔어요, 동굴로. 반나절을 기다렸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고……. 마물을 마주쳐서 도망치다가…….”
당혹스러운 마음에 나답지 않게 횡설수설 말을 했다. 무릎 위로 가지런히 손을 모아 맞잡았는데, 당황해서인지 손이 덜덜 떨렸다.
그때,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나를 올려다보던 카이든이 내 손을 잡았다. 그는 내 손가락 하나하나에 집착적으로 입을 맞추며 내 눈을 쳐다봤다.
“괜찮아. 어차피 네가 어디로 도망가든 우린 너를 찾을 거였어.”
그렇게 말하며 카이든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보조개가 쏙 들어가면서 특유의 매력적인 미소를 자아냈다.
카이든의 말에 에녹이 동의한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겁을 먹게 해서 미안하다. 그대가 혼자서 얼마나 두려움에 떨었을지…….”
에녹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자책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들이 동굴로 바로 오지 못한 건 나를 찾아다니다가 내가 떨어트린 천 조각을 발견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다가 제나스를 만났고.
“몸을 피할 곳이 필요했어요. 숨을 곳을 찾다가 이 벙커의 지하 샛길을 찾았죠.”
“샛길? 아, 그 망할 대마법사가 사라진 그 길인가?”
“뭐, 그런 것 같아.”
카이든의 물음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나는 중간에 다른 길로 빠져서 해골을 만났지만.
그 해골과 로말리잔 전투복, 벙커에서 있었던 일도 이야기해주려던 참이었다.
쿵!
방문 밖으로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화들짝 놀라서 굳게 닫힌 방문을 돌아보았다.
“뭐, 뭐야……?”
크로스백을 찾아온 난 다급하게 조명탄을 꺼내 들었다. 에녹과 카이든도 마찬가지로 각각 장검과 단검을 뽑아 들고 경계 태세에 돌입했다.
“마물일까요?”
나는 긴장된 얼굴로 닫힌 방문을 경계하며 에녹과 카이든을 향해 물었다.
“혹시 벙커 문 열어놨어요?”
내 물음에 카이든이 곤란한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
“들어온 문은 닫았지. 잠금 장치가 없어서 열고자 하면 못 열건 없어 보이던데? 하지만, 마물이 닫힌 문을 열 정도로 지능이 있어?”
카이든이 내게 되물었고 답을 알 리가 없는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 사이에 에녹이 방문 앞에 서서 귀를 기울인 다음 우리를 돌아봤다.
“먼저 나갈 테니, 벙커 문 앞까지 엄호를 부탁한다.”
나와 카이든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에녹은 잠시 심호흡을 한 뒤 빠르게 문을 열고 앞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쾅!
“으악!”
그리고 우리는 낯설지 않은 비명을 들었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문 앞에 쓰러져 있는 이는 다름 아닌 루제프였다.
“다들 여기 계셨습니까?!”
루제프가 우리를 보더니 울먹이며 소리쳤다. 굉장히 서러운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