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147)화 (147/234)

* * *

아스달은 거친 움직임에 몸이 불편해서 눈을 떴다. 시야에 새파란 하늘이 움직이고 있는 게 보였다.

지이이익-

지이이이익-

그의 몸이 덜컹거리며 흔들리기도 했다.

급히 몸을 움직였다가 그는 고통에 찬 신음을 뱉고 말았다.

허리 통증이 엄청났다. 아마도 뼈가 부러진 게 맞는 것 같았다.

“어? 깼어요?”

유안나의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그녀가 그를 거대한 나뭇잎 위에 올려 그를 끌고 이동 중이었다.

“후. 힘들어 죽는 줄 알았네.”

아스달은 어쩐지 그녀에게 고맙기도 하고 미안해지기도 해서 몸을 일으키고자 애썼다.

“애쓰지 마세요. 제가 저하의 식사까지 다 뺏어 먹었잖아요. 그래서 그렇게 힘 없이 쓰러졌나 했죠.”

유안나가 한숨을 내쉬며 그를 만류했다.

아스달은 어쩐지 수치스러워져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도와준 건 고맙네. 구해준 것도.”

“네 뭐, 구해준 건 고마워하셔야죠. 저한테 목숨값 두 번 빚지셨어요.”

“꼭 갚겠네.”

그의 확고한 대답에 유안나가 웃음을 지었다.

“네. 기대할게요.”

아스달은 고개를 돌려 통증이 느껴지는 부위를 살펴보았다. 허리뼈가 부러진 것은 아니고 윗배 쪽에 위치한 뼈가 부러진 느낌이었다.

‘플로네 영애가 갈비뼈라고 말했던가.’

일전에 마거릿도 같은 부상을 당했었다. 그때 그녀가 단단한 것으로 허리를 보호해줘야 한다고 했었는데.

아스달은 정복이 아닌 실내복 차림이어서 보호대처럼 단단히 허리를 받쳐줄 재킷도 없었다.

‘갈비뼈가 부러졌을 땐, 안정을 취하기보단 오히려 많이 걷는 게 좋대요. 걱정 마세요.’

당시 그녀를 배려해서 일정을 지연시키려는 에녹을 향해 마거릿이 했던 말이었다.

“어? 왜 일어나세요?”

유안나가 낑낑거리며 그가 누워 있던 나뭇잎을 끌다가 의아한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아스달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그녀를 돌아봤다. 그러다 밀려오는 통증에 미간을 좁혔다.

“이전에 플로네 영애가 다쳤을 때와 증상이 같아. 부상을 당한 위치도 비슷하고. 그때 그녀가 말하지 않았나. 오히려 걷는 게 좋다고.”

유안나는 그제야 이해한 얼굴로 감탄사를 뱉었다. 그녀는 심각해진 얼굴로 턱을 괴더니 생각에 잠겼다.

“플로네 영애는 정말 아는 게 많았어요.”

그녀의 중얼거림에 아스달도 백번 동의했다.

“내가 알던 영애가 맞나 싶을 정도더군. 마치 그동안 본 모습을 숨기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유안나가 흥미롭다는 얼굴로 눈을 반짝였다.

“역시 플로네 영애를 빨리 만나는 게 좋겠어요.”

그녀의 말에 아스달은 전적으로 동의했다.

이 섬에서 마거릿 없이 살아남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마거릿의 도움이 없었다면 진작에 죽음을 맞이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그녀를 지금껏 그가 어떻게 대해왔는가. 매번 의심하고 몰아세우지 않았던가.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마거릿이 저와 함께 하기 싫어 도망간다고 해도 할 말은 없었다.

아스달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모두 제 업보이니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다시 만난 마거릿이 분노와 경멸을 표해도 그는 감당해야 한다. 시간을 되돌린다고 해도 그는 마거릿을 의심했을 사람이니까.

아스달은 최대한 조심조심 몸을 움직여보며 주변을 훑었다.

“우리가 북섬으로 건너온 건가?”

“아, 네. 막 건너왔어요.”

유안나의 말에 아스달은 그제야 등 뒤로 있는 기다란 길이 하나뿐인 북섬과 남섬을 잇는 길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때, 유안나가 주머니에서 지도를 꺼내 펼치며 지형을 살폈다.

“음. 여기 근처에 보급품이 있는 것 같은데, 챙겨서 서쪽으로 이동할까요? 여기서 꽤 가깝네요.”

아스달이 유안나를 따라 지도를 살폈다. 그녀의 말대로 북섬 동쪽에 보급이란 글자가 표시되어 있었다. 그들이 있는 장소와 매우 가까운 위치여서, 들러 보는 것도 동선 상으로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이전에 남섬에서도 보급품을 찾은 적은 있다. 그러나 사용할 줄 아는 물건은 물론이거니와 용도를 아는 물건조차 거의 없었다. 게다가 당시에 늪지대에 당면하는 바람에 챙겨 둔 몇 가지 물건도 전부 버려야만 했다.

“탈출하기 위해선 보급품을 최대한 많이 모으는 게 중요할 것 같아요. 무기가 있으면 좋겠는데.”

유안나가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아스달은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꼭 탈출하는 방법을 아는 것처럼 말하는군.”

아스달의 말에 유안나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생각에 빠진 얼굴로 가만히 그를 쳐다보다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망할 꼬맹이의 오두막에 탈출구가 있다는 건 알아요. 거기 가려면 무기가 필요하고요.”

“망할 꼬맹이?”

유안나의 대답에 아스달이 미간을 좁혔다.

또다. 또다시 알 수 없는 말을 한다.

아스달은 고민 어린 얼굴로 잠시 그녀의 말간 얼굴을 쳐다봤다. 그리고 조심스레 운을 뗐다.

“전부터 성녀님한테 묻고 싶은 게 있었는데…….”

“물어보세요.”

유안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시원하게 대답했다. 정말로 뭐든 대답해줄 것만 같은 얼굴이었다.

아스달은 이참에 줄곧 궁금했던 것을 다 물어보기로 했다.

“갑자기 성녀님의 태도가 바뀐 이유를 알고 싶네. 아니란 말은 하지 말게. 플로네 영애가 강에 빠지고 난 뒤로 성녀님은 갑자기 변했어.”

“…….”

“뭔가를 기억해 낸 게 맞나? 성녀님이 알고 있는 게 대체 뭐…….”

그때였다.

구오오오오-

아득히 먼 곳에서 괴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도를 보던 아스달과 유안나는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지독하게 뜨거운 열기를 품은 태양이 떠 있는 한낮이었다.

마물의 행동 패턴이 변하고 있다는 건 인지하고 있었다. 한낮에도 마물이 나타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들려온 괴성은 남섬에서는 들어본 적 없는 종류의 기괴한 괴성이었다.

유안나의 얼굴이 점차 창백해졌다. 딱딱하게 몸을 굳힌 그녀가 고개만 돌려 아스달을 쳐다봤다.

“세상에……. 잊고 있었어요. 마, 마물은 진화를 해요…….”

“그게 무슨 소리지?”

“원래 마물은 한밤중에만 나타났었어요.”

“뭐?”

“그리고 시간을 돌리기 직전엔 노을이 지기 시작할 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했죠.”

아스달은 그녀가 도통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몰라 미간을 좁혔다. 시간을 돌린다고? 그건 또 무슨 말인가.

그러나 유안나는 자세히 설명할 정신이 없어 보였다. 그녀가 혼잣말을 하듯 계속 중얼거렸다.

“그뿐만이 아니에요. 형태도 변화할 거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누가?

아스달은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유안나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의 팔을 다급하게 잡아끌어서 더 깊게 질문할 수 없었다.

“저하. 저건 마물이 낸 소리예요. 저희 도망가야 해요.”

하지만 그들은 얼마 가지 못하고 문제의 마물무리와 마주치고 말았다.

놈들은 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기괴한 형태를 하고 있었다.

‘산 넘어 산이다.’

아스달은 마거릿이 종종 사용하던 관용적 표현을 중얼거리며 거칠게 머리를 헤집었다. 이번에야말로 정말 살아남기 어려울 수도 있겠다.

* * *

나는 푹신한 침대 위에서 정신을 차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르겠다. 머리가 아주 맑았고 무척 개운한 느낌이 들었다.

몸을 뒤척이는데 움직임이 다소 불편하다는 걸 깨달았다.

“으음.”

한껏 잠에 취한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그제야 난 두 눈을 번쩍 떴다. 시야에 굴곡진 근육과 보드라운 맨살이 들어왔다.

헉.

간밤에 꿈을 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꿈이 아니었다.

잠깐……. 꿈이 아니었다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 침대엔 나와 함께 카이든과 에녹이 상의를 탈의한 채로 잠들어 있었다.

에녹과 카이든이 어떻게 벙커를 찾아 들어왔는지 모르겠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루제프와 디에고는 보이지 않았다.

두 남자는 내 움직임에도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다. 아무래도 내가 그랬던 것처럼 두 사람도 무척 피곤했던 모양이다. 침대에서 자는 게 거의 반 년만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카이든도 카이든이지만, 일단 에녹이 이렇게 깊게 잠이 든 건 처음 본다. 이 섬에 와서 단 한 번도 그가 제대로 깊이 잠드는 걸 본 적이 없긴 했지만, 내가 일어나는 줄도 모르고 잠이 들어 있다니.

나는 눈을 감은 그의 얼굴을 빤히 보다가 이마 위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조심히 정돈해줬다. 그리곤 엄지로 슬그머니 그의 이마를 매만졌다.

피부가 어쩜 이렇게 매끈하지?

천천히 손을 내려 그의 콧잔등을 쓸고 그의 말랑한 입술 위에서 손을 멈췄다.

갑자기 지난밤의 입맞춤이 떠올라서 나는 그만 화들짝 손을 뗐다.

으음.

그때 등 뒤에서 카이든의 커다란 손이 뻗어져 와 배에 감겼다. 그가 잠결에 한 팔을 뻗어 나를 안은 것이다.

나는 슬쩍 그를 돌아봤다. 잠든 모습도 참 예쁘다. 새하얀 은발에 예쁘장한 미모 때문인지, 정말 천사 같았다.

‘그런데 카이든은 독에 내성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간밤의 기억으로는 분명 그도 독에 중독된 상태로 보였다.

중독되지 않은 사람의 낮은 체온만이 텐타티오넴 꽃에서 나오는 독성 물질을 해독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면역이 있는 카이든까지 중독된 것으로 봐선 일반적인 중독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러다가 다시금 그들과 나눈 진한 입맞춤을 떠올린 나는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 입맞춤이었는데 하필이면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했다니! 억울해!

‘망할 제나스.’

텐타티오넴만 아니었어도 붙잡아둘 수 있었는데. 여기 있는 꽃들은 제나스가 설치해둔 것이라 아나타도 건드리지 못한다는 말이 떠올랐다.

확실히 이렇게 강력한 중독 효과를 일으키는 맹독이라면 문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긴 했다. 게다가 연다고 그냥 열리는 문도 아니고.

나는 배에 둘러진 카이든의 팔을 치워내고 비몽사몽한 정신으로 침대에서 나왔다.

간밤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아부어서인지 온몸에 힘이 없었다.

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옷 꼴이 말이 아니었다. 흰색 티셔츠가 잔뜩 늘어나고 찢어져 있어서 상당히 보기 흉했다. 독가스로 엉망이 되었던 옷이라 그런지 찝찝하기도 했다.

방 안 한구석에 있는 행거에 옷가지가 너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잘됐다.’

남자들이 깰세라 재빨리 걸려 있는 옷 중에 내가 입을만한 상의를 골랐다. 이번에도 쓸 만한 게 크롭티 뿐이어서 나는 하는 수 없이 흰색 반팔 크롭티를 입었다.

그래도 여기엔 점퍼가 하나 있어서 크롭티 위에 검정 항공점퍼를 걸칠 수 있었다. 바지는 행거에 걸린 게 청바지뿐이라 그냥 입고 있는 카고 바지를 그대로 입기로 결정했다.

그때 바닥 카펫에 똬리를 틀고 자고 있던 은지가 눈을 떴다. 나를 보고 화들짝 놀란 녀석이 자리를 방방 뛰고는 내 주위를 방정맞게 맴돌았다.

나는 웃으며 녀석의 비늘을 쓰다듬어 준 다음 침대 위에 잠든 남자들을 바라봤다.

때마침 에녹이 침대에서 부스럭거리며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카이든은 아직 꿈나라였다.

“마거릿……?”

잠에 한껏 잠겨 깊고 낮은 목소리였다.

에녹은 침대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마른세수를 했다. 그리고는 손으로 턱을 매만지더니, 눈썹을 치켜뜨고 나를 쳐다봤다.

“왜 벌써 일어나 있어.”

잠에서 막 깨어난 상태라서 그런지 그는 나른한 눈을 하고 있었다. 상의 탈의까지 하고 있던 지라 상당히 관능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