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146)화 (146/234)

카이든이 험악하게 인상을 구겼다.

“뭐야, XX. 저거 그 망할 꼬맹이랑 닮았는데?”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못해 미안하군. 이게 본래의 나라서.”

“뭐야, 제나스? 대체 몸은 어떻게 한 거야?”

제나스는 그들을 보며 매우 흥미롭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에녹과 카이든은 그의 품 안에 안겨 있는 마거릿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제나스를 제압하기 위해 몸을 움직였지만, 대체 어떻게 한 건지 그가 마력을 사용했다. 그렇게 제나스는 너무도 손쉽게 그들을 따돌리고는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카이든은 제나스가 자취를 감춘 곳에 빼곡하게 깔린 텐타티오넴을 발견했다.

그와 동시에, 텐타티오넴 꽃 앞으로 거대한 마법진이 생겼다. 그것은 꽃을 보호하듯이 그 앞을 벽처럼 단단히 가로막고 있었다.

“젠장, 이건 또 뭐야……?”

마법진의 문양을 봐선 보호 마법이 걸려 있는 듯 보였다.

카이든은 독에 면역이 없을 에녹과 마거릿을 뒤늦게 떠올랐다.

“제기랄. 전하. 전하! 여기 독초가……! 올라가야 합니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제길.”

독이 퍼진 모양인지, 나지막이 욕설을 중얼거린 에녹이 마른기침을 하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쪽으로 다가가려던 카이든은 걸음을 멈췄다. 갑자기 텐타티오넴 꽃 앞을 가로막은 마법진에서 빛이 발현됐기 때문이다.

마법진이 천천히 회전했다. 그 영향으로 옅은 바람이 불었다. 은지 녀석이 꽃을 향해 불을 뿜었지만 회전하는 마법진이 녀석의 불을 모두 삼켜버렸다.

카이든은 황급히 에녹과 마거릿에게로 달려갔다.

“빨리 자리를 피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때, 마법진이 공전하며 생긴 바람에 벽면을 가득 메운 텐타티오넴 꽃이 흔들리며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윽고 꽃에서 퍼져 나온 노란 꽃 수술들이 마법진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팟-

마법진을 통과해 나온 노란 가루가 거대한 돌풍을 동반하며 지하실 가득 넓게 퍼져 흩어졌다.

“콜록콜록, 제길.”

카이든은 가루를 있는 대로 들이 마시곤 자리에 주저앉았다.

조금 전까지는 분명 꽃 향을 맡아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마법진을 통과한 것들은 느낌이 달랐다.

‘X발. 그래. 뭔가를 보호하는 게 목적인 마법진이라면 이런 함정이 있을 수도 있지.’

독이 아니라 이건 마법에 가까웠다.

‘머저리 같이 이런 수도 계산하지 못하다니.’

뺨이 후끈거렸다. 카이든은 열이 오르는 느낌에 뜨거운 숨을 뱉었다. 타인과 접촉하고 싶어 미칠 것 같은 이 갈증은 텐타티오넴의 중독 증상과 같았다.

그때, 에녹이 바닥에 쓰러진 마거릿을 안아들고는 그를 향해 외쳤다.

“로드! 정신 차려!”

실로 놀라운 자제력이었다. 에녹의 외침에 간신히 정신을 붙잡은 카이든은 가진 인내를 최대한 발휘하여 그와 함께 마거릿을 옮겼다.

그들은 꽃가루를 피해 밖으로 나가려다가 벙커 안에서 침실을 발견했다.

독에 중독된 상태로 마물이 언제 나올지 모르는 밖에 있는 것보단 밀실이 나을 것이다.

침실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나자 꽃 향은 풍기지 않았다. 그들은 그대로 그녀를 침대 위에 눕혔다.

에녹도 카이든도 기억나는 건 거기까지였다.

* * *

어렴풋이 눈을 떴을 때 나는 푹신한 침대 위에 있었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두통이 밀려왔다. 몸은 여전히 뜨거웠고 정신은 몽롱했다.

온몸에 가는 실벌레 같은 것들이 기어 다니는 것처럼 간질거려서 참을 수가 없었다.

으윽.

고통에 찬 신음을 뱉자 갑자기 이마 위로 다정한 손길이 느껴졌다. 누군가의 손길이 닿은 이마 부분만 화하게 시원해지며 진정이 되는 느낌이었다.

미칠 것만 같은 갈증에 허덕이다가 오아시스라도 발견한 것만 같은 환희가 스쳤다.

내 이마에 손을 얹은 누군가의 팔을 조급하게 부여잡았다. 살결이 맞닿고 나자 심신이 안정이 되는 느낌이었지만, 매우 부족했다.

게슴츠레 눈을 뜨고 상대를 바라보니, 붉어진 뺨을 하고 있는 에녹이 보였다. 그는 이를 악문 채로 무언가를 참듯이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난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내 손을 잡고 몸을 일으키는 것을 도와주던 에녹의 눈썹이 날카롭게 일그러진다.

그때 등 뒤로 다가온 누군가가 나를 끌어안고 누웠다. 카이든인 것 같았다.

텐타티오넴에 중독된 것이 나뿐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두 남자 모두 독에 중독된 것처럼 보였다.

사실 정신이 몽롱해서 지금 내가 무얼 하고 있는지도 제대로 인지가 안 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어쩌다가 이런 상황이 된 걸까. 모든 게 혼란스러웠다.

벙커에서 마법진을 발견하고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 뒤에 텐타티오넴에 중독됐고, 제나스를 본 것 같은데…….

에녹과 카이든은 언제 온 거지?

이건 꿈인가?

뒤에서 나를 끌어 당겨 안은 카이든이 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앞엔 에녹이 있었다. 지난번과 같은 자세다.

다른 이와 체온을 나누고 있으니 숨통이 조금 트였다.

에녹은 욕망으로 이글거리는 눈을 하고서도 내게 섣부르게 다가오지 않았다. 놀라운 인내심이었다. 그래, 에녹은 늘 그랬다. 항상 자신보다 내 반응을 먼저 살피고 배려했다.

‘하지만 나는 못 참겠어…….’

나는 내 얼굴을 만질 듯 말 듯 간질거리는 에녹의 팔을 끌어 당겼다.

그는 내가 당기는 대로 끌려와 조심히 나를 안았다.

양팔을 뻗어 그를 마주 끌어안은 나는 차오르는 고양감에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굴곡진 가슴팍에 뺨을 비비며 생명수라도 찾듯이 그의 등허리를 쓸어내렸다.

그러나 여전히 어딘가 부족했다. 계속해서 갈증이 났다. 신체접촉만으로는 뭔가 부족하고 허전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순간 얼굴로 갑자기 열이 확 몰렸다.

허억.

갑작스럽게 호흡 곤란이 와서 나는 목을 움켜쥐었다. 괴로워하는 얼굴로 몸을 비틀며 울먹이자 에녹이 진정을 시키듯이 내 손을 잡았다.

“……마거릿. 진정해.”

이마에 에녹의 이마가 와 닿았다.

날카로운 그의 콧날이 내 코끝에 부드럽게 스쳤고 그의 달콤한 금안이 내 얼굴을 샅샅이 훑었다. 그의 몸은 나보다도 더 뜨거웠다.

생명줄을 꼭 쥐어 잡듯이 등 뒤로 나를 끌어안은 카이든의 체온도 상당히 높았다.

나와 마주 보고 있던 에녹이 내 뺨에 손을 얹었다. 호흡곤란으로 정신이 없는 상태로 나는 그를 따라 그의 뺨에 손을 얹었다.

어깨에서 말캉한 입술 감촉이 느껴졌다. 카이든은 계속해서 조급하게 나를 찾았다.

“하아.”

만족스러운 숨을 터트리자 카이든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드러난 어깨에 그가 뺨을 문댔다.

텐타티오넴에 이 정도로 심각하게 중독이 되었다면, 단순히 시간이 흐르는 것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안다.

마주 앉은 에녹은 폭주를 억누르던 정신력으로 이 또한 버티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을 것이다.

나로 인해 트라우마를 극복했다던 에녹.

언제부터 그는 나를 바라보고, 나를 위해주기 시작했던 걸까.

“……에녹.”

에녹의 금안이 내게 닿았다.

‘그대가 정말로 다른 사람일 수도 있겠단 생각을 하긴 했다. 그것도 꽤 자주.’

‘그래도 헷갈리지는 않아. 내가 좋아한 건 지금의 그대거든. 그건 알아줬으면 해.’

그 말에 담겨 있던 마음엔 지금도 변함이 없을까?

조금 전 받은 충격으로 인해 아직도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나는 이진주인가, 마거릿인가.

이제는 나조차도 내가 무엇인지 모르겠는데, 완벽한 타인인 이들이 ‘나’를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나?

혼곤한 정신으로 그런 생각을 하던 중에, 내 어깨에 입술을 내리누르던 카이든이 잠긴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마거릿.”

낮은 음성이 귓가를 간질거리자 나도 모르게 목이 움츠러들었다. 카이든이 내 턱을 잡아 자신에게로 돌렸다.

이윽고 내 입술 위로 그의 말캉한 입술이 닿았다.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

입술이 맞닿는 순간 미쳐버릴 것 같은 호흡곤란이 차차 가라앉기 시작했다.

“하……. 마거릿. 네가 너무 좋아…….”

부드러우면서도 저돌적인 움직임에 지금까지 고민하며 망설이던 것이 무색해져 버렸다.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 말이 진심이었으면 좋겠다.

그는 내가 진짜 마거릿이어야 나를 더 좋아해 줄까. 아니면 내가 다른 사람이어야 나를 더 좋아해 줄까.

아니, 진실을 말하면 저를 속였다고 나를 미워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 스스로가 싫었다. 카이든은 마치 내가 하고 있는 모든 생각들이 쓸데없는 상념이라는 듯이 그렇게 나를 원하고 있는데.

카이든은 못 참겠다는 듯이 미간을 좁히며 고통스러운 숨을 토해냈다. 그가 내게로 다시 고개를 기울였다. 얼굴이 코 앞으로 다가온 순간,

“마거릿.”

에녹이 나를 당겼다. 저도 봐달란 듯이.

그의 시선이 찬찬히 내 이마부터 콧잔등을 쓸고 내려와 입술에 고였다.

카이든은 아쉬운 듯 내 입술을 바라봤다. 평소 같았으면 화를 터트렸겠지만 카이든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돌렸다.

“앗.”

이어서 그가 내 목덜미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소중한 사람을 대하듯 따뜻하고 조심스럽게. 간질거리는 느낌에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마주 다가온 에녹이 부드러운 손길로 내 뺨을 쓸어내렸다. 나는 슬그머니 눈을 뜨고 그를 마주 보았다.

“마거릿…….”

에녹은 무언가 애타게 바라는 얼굴로 입술만 달싹거렸다. 하지만 끝내는 이를 악물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날카로운 눈썹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진다.

“괜찮아요……?”

나는 그에게 조심히 물었다.

사실 내가 할 질문은 아니었다. 나도 멀쩡한 정신이 아닌걸.

“내가, 괜찮아 보이나?”

나는 그 말에 뜨끔해서 시선을 회피했다. 그가 내 턱을 잡아당겨 자신에게로 고정시켰다. 피하지 말라는 듯이.

“괜찮지 않아. 전혀. 이 망할 꽃이 아니더라도…… 미쳐버리기 직전이었다.”

그가 울컥 치미는 감정을 억누르듯이 한숨을 삼키는 게 보였다.

“그대가 혼자 얼마나 무서웠을지, 그걸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괴로워서 숨을 쉴 수가 없어.”

그가 먹먹한 얼굴로 눈을 질끈 감았다.

“몇 번이고 손을 잡는 건 내가 하겠다. 그러니 그댄 그대 하고 싶은 대로 해. 기다리겠다.”

에녹은 늘 내게 이렇게 조심스러웠다.

카이든은 말보다 행동이 더 먼저 나가는 타입이었는데, 그는 반대였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라면 내가 먼저 다가가도 좋겠다고 생각한 것은. 나는 양손으로 뻗어 그의 뺨을 잡았다. 그러자 에녹이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나는 그에게로 천천히 고개를 기울이며 눈을 감았다. 이윽고 입술이 맞닿아, 뜨겁고 습한 숨결이 얽혀들었다.

“하아.”

입술을 비집고 잔뜩 억눌린 듯한 에녹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를 따라 나 역시 그만 앓는 소리를 냈다. 이건 텐타티오넴과는 전혀 관계없는 반응이라 수치심이 옅게 밀려왔다. 안개가 낀 것처럼 부옇던 정신이 맑게 개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카이든이 두터운 팔로 내 배를 강하게 끌어당겨 안았다.

“마거릿. 나도……. 나도 네가 없으면, 안 돼.”

카이든이 다시 한 번 나를 당겼다. 에녹의 얼굴이 천천히 멀어졌다.

“네가 마거릿이라서 좋아한 게 아니야. 그냥 너라서 좋아한 거지.”

등 뒤에 있던 카이든이 내게로 상체를 기울이며 속삭였다. 마치 내 마음 속을 훔쳐보기라도 한 듯.

그가 내 턱을 당기면서 고개만 살포시 돌아갔다. 가까워진 그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온 순간, 젖은 내 입술이 그에게로 삼켜졌다.

카이든은 입을 맞출 때 눈을 감지 않았다. 타오르는 붉은 눈빛으로 나를 또렷하게 보고 있었다. 마치 내 얼굴 표정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꼭 굶주린 짐승 같았다.

앞에서 나를 끌어안고 있던 에녹은 내 손목 위에 지그시 입술을 눌렀다. 말랑한 감촉이 손목 안쪽을 배회했다.

머리가 점차 맑아지고 마음도 차차 안정이 되었다. 에녹도 카이든도 무척 힘들 텐데 그들은 최대한의 인내를 발휘하고 있었다. 그 따뜻한 배려가 절절히 느껴져서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들에게 고마워서.

그때, 내가 다른 생각 중인 것을 알아차린 카이든이 커다란 손으로 내 뒷목을 잡았다.

고개가 뒤로 살짝 꺾이자 카이든이 내게로 얼굴을 기울이며 더 깊숙이 입술을 삼켜버렸다. 숨 쉬기가 버거울 정도로.

에녹도 카이든도, 나도 모두 미칠 것 같았다.

텐타티오넴이 우리를 이렇게 만든 거다.

이건 독화 때문이다.

독화 때문…….

정말……,

독화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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