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145)화 (145/234)

“젠장, 젠장! 이건 말이 안 돼!!!”

유안나는 마물의 피를 뒤집어 쓴 탓에 여전히 마물에게 공격을 받고 있었다.

어느새 아스달이 밟고 있는 마물이 늪에 거의 다 잠겼다. 아스달은 살 수 있다는 희망은 포기했다. 그리고 활시위를 당겨 유안나의 반대편에서 뛰어온 마물을 쏘아 죽이며 그녀를 도왔다.

이렇게 된 거, 그녀라도 살려야지.

그때 유안나가 갑자기 방향을 틀었다. 그녀는 곧장 아스달이 잠겨가는 방향으로 마물을 유인했다.

늪지대는 군데군데 스산한 나무들이 솟아 있었는데, 그녀는 물가까지 축 늘어진 나무줄기를 잡아 당겨 나무에 매달렸다.

그러곤 매달린 힘을 반동 삼아 마물을 발로 걷어차는 등, 지형지물을 아주 잘 활용하고 있었다.

유안나가 민첩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그러한 장점을 마물을 피해 도망치는 데만 활용했었다. 그래서 이처럼 효과적으로 자신의 장점을 살리는 걸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렇게 그녀는 그의 지척까지 순식간에 다가왔고 그의 멱살을 쥐었다.

“이보세요, 왕자님. 살면서 누구한테 맞아본 적 있으세요?!”

유안나의 외침에 아스달은 인상을 와락 구겼다. 이런 와중에 그런 이상한 질문이라니.

“그걸 말이라고 하나?”

“이런, 그럼 이게 첫 경험이겠네요.”

“뭐?!”

아스달은 더는 질문을 할 수가 없었다. 유안나의 뒤로 바짝 다가온 오랑우탄형 마물 때문이었다.

놈은 유안나를 따라 마물들을 밟고 바짝 쫓아와서는 그들을 향해 거대한 주먹을 휘둘렀다.

아스달의 멱살을 쥐고 있던 유안나가 빠르게 몸을 숙였고 덕분에 아스달은 놈의 주먹에 직격으로 맞고 멀리 날아갔다.

“제기랄!!!”

얼마나 강하게 후려 맞았는지 뼈가 부러진 것 같았다. 살면서 이렇게 많은 욕설을 뱉어본 것도 처음이었다.

그는 곧장 그대로 늪지대를 벗어나 평평한 흙바닥 위로 날아가 처박혔다.

얼떨결에 마물에게 얻어터지며 늪지대를 벗어난 것이다.

잘못 맞았으면, 즉사했을지도 모른다. 너무 무모한 행동이었지만 결론적으로 이번에도 그녀가 그의 목숨을 살린 격이었다.

게다가 진짜 문제는 그가 아니라 그녀였다.

유안나는 계속해서 마물들을 유인해 징검다리를 건너오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마물에게 물어뜯기는 건 아닌지 걱정될 정도로 위험천만하기 그지없었다.

아스달은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로 엎어져서 멀리서 뛰어오는 유안나를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어째 아슬아슬하더라니, 그녀는 결국 맨땅을 코앞에 두고 오랑우탄형 마물에게 붙잡혔다.

“제기랄, 조심해!”

그녀는 거대한 오랑우탄 마물과 함께 늪지대 속으로 빠졌다. 머리를 밖으로 내민 채 헤엄쳐 밖으로 나오려던 그녀는 수면 아래에 깔린 마물에게 다시 붙잡혔는지 모습을 온전히 감췄다.

“이, 이게 대체……. 이럴 수는……. 이럴 수는 없어…….”

아스달은 충격에 젖은 얼굴로 멍하니 유안나가 사라진 자리만 쳐다봤다.

질척하고 고요한 수면 위로 반대편에서 마물들이 포효하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때, 갑자기 수면이 요동쳤다. 그러더니 이내 무언가 팟! 하고 수면 위로 튀어올랐다.

마치 무언가에 얻어맞고 튀어 오른 듯한 그것은 아스달의 눈앞에 패대기쳐졌다.

유안나였다.

진흙과 녹조, 그리고 마물의 피로 덕지덕지 묻은 유인나가 옅게 신음하며 몸을 일으켰다.

“괜찮은가!”

아스달의 놀란 외침에 그를 발견한 그녀가 시익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냈다. 네모반듯한 그것은, 손가락만큼 작고 딱딱해 보였다.

아스달은 그것과 비슷한 물건을 마거릿이 남섬의 오두막에서 가방에 챙겨 넣는 걸 본 적 있었다.

유안나는가 얼굴 위로 흐르는 진흙을 대충 손으로 닦아내고는 심호흡을 했다. 이윽고 네모난 물건의 뚜껑을 열자 화르륵 불이 타올랐다.

아스달이 깜짝 놀라서 몸을 뒤로 뺐다.

“그런 마도구는 어디서…….”

“오늘 아침에 주웠어요. 사용법은 그냥 아는 언니가 옛날에 알려준 게 기억났고요.”

‘그냥 아는 언니’라니. 설명 한 번 애매했다. 분명 마거릿이 비슷한 물건을 챙겨 다닐 때는 그게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는데…….

유안나의 녹색 눈동자에 광기가 스쳤다. 그녀는 엉망인 몰골로 웃음을 지었다.

반쯤 미친 것처럼 보이는 얼굴이 섬뜩할 정도였다.

“마물의 피에 물이 섞이면, 불이 잘 붙는다는 거 아시나요?”

유안나가 아스달을 향해 물었다. 마물 토벌단을 지휘할 때, 보좌관을 통해 들은 것도 같다. 하지만 정확히 기억나는 것은 아니라 미간을 좁히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아스달은 고통에 비명을 내지르고는 다시 바닥에 엎어졌다. 뼈가 부러진 게 맞았다.

“그냥 보기만 하세요.”

그런 그를 보고 유안나가 씨익 미소 짓더니 들고 있던 불을 늪지대를 향해 던졌다.

화르륵-

늪지대는 이미 마물의 시체로 가득했던 터라 불덩이를 한가운데로 던지고 나자 늪 전체로 번져 불이 붙었다.

그들을 잡아먹기 위해 모여들었던 마물 떼들이 한꺼번에 불이 붙은 건 말할 것도 없었다.

거대한 늪지대가 마물 떼와 함께 타올랐다. 찢어질 듯한 마물의 포효가 난무했다.

“보고 있니? 제나스! 거기서 기다리렴?! 내가 곧 갈게!”

불이 붙어 죽어가는 마물들을 보며 소리친 유안나가 소리 높여 웃음을 터트렸다.

대체 누구랑 얘기하는 건지 모르겠다. 아스달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유안나를 쳐다봤다.

그녀는 정말로 미친 사람 같았다. 적어도 정상적인 사고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 모습을 보며 아스달은 깨달았다.

생존력 따위라곤 없는 두 사람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 그건 그녀가 미쳐 있기 때문이라는 걸.

그녀는 마거릿 일행이 강에 빠지는 시점부터 어딘지 모르게 변했다.

그러더니 얼마 전부터는 갑자기 잃어버린 기억들을 되찾은 사람처럼, 뭔가를 알고 있는 사람처럼 돌변해서 알 수 없는 말들을 하곤 했다.

대체 무슨 일인지 궁금했지만, 그걸 묻기에 앞서 우선은 그녀에게 구해줘서 고맙다는 얘기는 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밀려오는 통증에 머릿속이 새하얘졌기 때문이다.

뼈가 부러져서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거기다가 며칠나절 구한 과일도 전부 유안나에게 양보하고 난 터라 먹은 것도 거의 없어 정신마저 혼미해졌다.

살아남았지만, 어쩌면 차라리 죽는 게 나았을지도 모르겠단 생각마저 들었다. 아스달은 그렇게 고통에 찬 신음을 뱉다가 정신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그가 유안나에게 ‘진실’에 대해 듣게 된 건, 한참 뒤가 되었다.

* * *

‘너희가 아는 마거릿은 마거릿이 아니야.’

‘마거릿 로즈 플로네 안에 다른 영혼이 들어가 있는 것 같더라.’

처음, 제나스가 하는 그 말을 들었을 때 에녹은 놀라지 않았다. 짐작은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애는 정말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

‘다른 사람 맞아요.’

‘전 정말 다른 사람이 됐거든요. 대충 새로 태어났다고 생각해 주세요.’

에녹은 문득, 이 섬에서 눈을 뜨고 마거릿과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제기랄.

에녹은 자책 가득한 욕설을 중얼거렸다. 어쩌면 마거릿은 처음부터 신호를 보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저를 알아봐달라고.

카이든 역시 그리 놀란 눈초리는 아니었다. 루제프와 디에고는 다른 반응인 듯 했지만 말이다.

‘그녀 본인도 알고 있을걸?’

‘너희 모두는 속고 있었던 거야.’

제나스의 말엔 증거가 없었다. 하지만 그간 마거릿이 다른 사람 같을 정도로 변했다고 여기던 이들에게 그 말은, 불씨를 키운 것과 다름이 없었다.

제나스는 혼란에 빠진 이들을 훑으며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말을 해주려고 왔어.’

그 말을 한 뒤에 감쪽같이 사라졌다.

에녹은 제나스가 사라지는 것을 보았지만, 그를 뒤쫓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마거릿을 찾는 게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일단 마거릿부터 찾도록 하지.”

에녹의 말에도 모두 넋을 놓은 채 답이 없었다. 카이든조차도 말이다.

에녹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들 정신 차려, 마법사 꼬맹이가 사라지지 않았나.”

그리고 이어지는 에녹의 말에 그제야 모두 놀라서 나무 위를 쳐다봤다. 에녹의 말대로 나무 위에 있던 은발의 미소년은 자취를 감추고 사라진 뒤였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일까요.”

루제프가 짐을 챙기고 무거운 배낭을 힘겹게 짊어지며 에녹에게 물었다. 가만히 루제프를 보던 카이든이 그에게서 가방을 빼앗아 가볍게 어깨에 짊어졌다.

“그건 마거릿을 찾은 다음에 대화를 나눠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카이든이 이번엔 에녹을 돌아보며 말했다.

“팀을 나눠서 마거릿을 찾죠. 저 XX가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지금 최선은 마거릿을 찾는 겁니다.”

팔짱을 끼고 있던 에녹의 무심한 시선이 카이든의 안면에 닿았다. 그는 카이든의 말에 동의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디에고를 돌아봤다.

“디에고 경.”

“하명하십시오, 전하.”

에녹의 부름이 끝나기 무섭게 디에고가 절도 있는 동작으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경은 주교와 함께 움직여.”

“네? 하지만…….”

디에고가 슬쩍 루제프를 바라봤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건 마치 못미더운 동료를 바라볼 때 나오는 시선과도 같았다. 눈치는 빠른 루제프가 불만 가득한 얼굴로 미간을 좁혔다.

“이의 있나.”

“없습니다.”

에녹의 물음에 디에고가 군더더기 없이 대답했다. 카이든은 배낭을 맨 채로 그 모습을 보다가 에녹을 향해 말했다.

“빨리 움직이죠.”

에녹은 디에고와 함께 언제 어디서 다시 만날 건지, 신호는 어떻게 보낼 건지 등을 얘기 나눈 뒤 카이든과 함께 움직였다.

그리고 디에고, 루제프와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졌다고 생각이 들고서야 에녹이 카이든을 돌아봤다.

“자네도 같은 생각인가 보군.”

배낭을 맨 채로 머리를 헤집고는 카이든이 한숨을 내쉬었다.

“벙커밖에 없죠. 마거릿이 여기서 갈만한 곳은.”

“진실이 뭐든, 마거릿이 벙커에서 뭘 하고 있든 무조건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한다.”

에녹의 무덤덤한 말에 카이든이 한숨을 내쉬며 짜증스레 중얼거렸다.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다른 이들로부터 마거릿을 방어해줄 수 있을 테니까요.”

간만에 카이든과 뜻이 통한다. 에녹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동의했다.

“그럼 벙커로 가지.”

“아. 그런데 지도는 마거릿한테 있습니다.”

카이든의 말에 에녹은 개의치 않은 얼굴로 앞장서서 걸었다.

“전쟁터에 오래 있다 보니, 지도를 보는 데 익숙하다. 한 번 보고 외우는 것도 가능해.”

에녹의 대답에 카이든은 그제야 안도했다.

덕분에 그들은 오래 헤매지 않고 반나절 만에 벙커로 보이는 곳의 입구를 찾기는 했다. 수풀 사이에 가려져 있어서 그 근방을 한참 헤매긴 했지만.

문제는 그들보다 먼저 도착한 이가 있었다는 거다.

처음엔 그곳이 문인 줄도 몰랐다. 문이 살짝 열려 작은 틈새가 있지 않았다면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돌문에 달려 있는 문고리도 그제야 발견했다.

에녹과 카이든은 서로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본 다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두터운 돌문을 열자마자 바로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벽은 모두 단단한 돌벽으로 이뤄져 있다. 밖에서 무슨 일이 생겨도 이곳만은 안전할 것만 같았다.

계단을 천천히 내려간 그들은 마거릿을 품에 안고 있는 정체 모를 남자와 마주쳤다.

은발에 적안, 화려한 외모를 가진 남자였다. 선이 날카로운 카이든과는 다르게 나른한 느낌을 자아내는 남자는 그들과 마주하고도 태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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