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를 돌아 사라지려는데, 그의 로브를 잡아당기는 손길이 느껴졌다. 마법진 위에 쓰러져 있던 마거릿이 힘겹게 그의 로브를 잡아당긴 것이다.
제나스는 걸음을 멈추고 눈살을 찌푸렸다.
애처롭게 저를 붙잡는 마거릿을 돌아본 그가 곤란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지 말라고 했잖아.”
“기다려……!”
그녀의 정신이 슬슬 돌아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제나스는 카이든과 에녹의 앞길을 가로막는 불기둥이 꺼져가는 것을 보다가 다시 마거릿을 돌아봤다.
그러곤 그녀의 손에서 로브 자락을 뺀 뒤,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기다릴게. 오두막에서.”
소년의 모습으로는 대화에도 제약이 많다.
제나스는 성인의 모습을 하고 있을 때, 그녀와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눠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생각으로 그치는 게 좋다는 걸 스스로 알면서도 말이다.
제나스는 벽면을 가득 메운 텐타티오넴 꽃 하나를 잡아당겼다. 그러자 벽이 반 바퀴 회전하며 뒤로 공간이 생겨났다. 벙커의 샛길이었다.
“XX X끼야, 기다려!”
카이든의 비명 같은 외침을 뒤로하고 제나스는 벽 너머에 있는 벙커의 비밀 샛길로 홀연하게 사라졌다.
“제기랄! 마거릿!”
에녹이 먼저 쓰러진 마거릿을 안아 들었다.
허억!
숨을 못 쉬고 헐떡이던 그녀가 에녹과 체온이 맞닿자 급히 숨을 내쉬었다.
“X 같은 제나스…….”
그녀는 욕설을 중얼거리며 에녹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러더니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제나스가 사라진 벽면으로 다가갔던 카이든이 뒤늦게 텐타티오넴 꽃을 발견하고는 급히 코를 틀어막았다.
“제기랄. 전하. 전하! 여기 독초가……! 올라가야 합니다!”
그러나 이미, 에녹도 카이든도, 마거릿도 다 함께 텐타티오넴 꽃에 중독된 뒤였다.
* * *
아스달은 피곤한 얼굴로 광활하게 펼쳐진 늪지대 앞에 섰다.
태양이 내리쬐는 한낮에도 스산한 분위기를 풍기는 소름 끼치는 곳이었다. 군데군데 수면 위로 솟아오른 나무들 또한 기괴하게 꺾여 있었고 아래로 푹 처진 나뭇잎들은 음산한 분위기에 한몫을 더했다.
수면 위로는 한낮에도 안개가 자욱했고 녹조가 잔뜩 낀 수면은 사실 강이라고 하기보단 거의 진흙으로 뒤덮인 무덤에 가까웠다.
한번 발을 디디면 헤어 나오지 못하고 그대로 진흙 속으로 자취를 감춰버리니, 어쩌면 무덤이 맞을 수도.
문제가 있다면, 아스달과 유안나가 북섬으로 가기 위해선 이곳을 반드시 지나야만 했다.
한 발자국 내딛었다가 거의 죽을 뻔한 뒤 그들은 수면 위로 나무를 올려서 건너는 등 다양한 시도를 해보긴 했다. 번번이 실패했지만.
사실 그는 늪지대를 건너는 것에 굉장히 회의적이었다. 이대로 남섬에 고립되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각오도 한 상태였다.
‘하필 함께 고립된 게 디에고 경이 아니라 왕세자 저하라니. 세상에나, 신도 무심하시지.’
‘나도 하필 성녀님과 고립된 건 몹시 유감인데,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는다네. 그게 예의니까.’
‘어머, 억울하시면 저하께서도 예의 차리지 마세요. 저는 욕 먹는 거에 익숙한 사람이라 괜찮거든요.’
유안나의 대답에 아스달은 또다시 속을 삭혀야만 했다. 바위와 대화하는 것도 이토록 답답하진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건 모두 별 수 없이 그가 다 감내해야만 했다.
처음 이 섬에서 눈을 뜨고 마물의 공격을 받았을 때, 그는 유안나까지 챙길 여력이 없다고 생각했다.
며칠 나절 먹은 것도 없이 섬에서 미쳐가던 중에 죽을 위협까지 닥친 상황이었다. 친분도 없던 유안나를 구하다가 죽고 싶진 않았다.
그렇게 그녀의 죽음을 방치하며 어쩔 수 없었다며 비겁하게 스스로를 위안했었다.
디에고는 유안나의 죽음을 방치한 것에 죄책감을 느끼는 듯하였으나, 아스달이 유안나에게 진 빚은 다른 부분에 있었다.
그가 타란튤라 마물에게 완전히 먹힐 뻔했을 때 구해준 사람이 유안나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타란튤라 마물의 피를 온몸에 묻힌 뒤 마물들을 유인했었다.
당시엔 죽다 살아났던지라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그것도 그저 우연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에녹이 폭주하며 타란튤라 마물을 소탕했을 때, 마물들이 동료의 피 냄새를 맡고 모여든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 않았던가.
유안나는 그 사실을 이전부터 알고 있었던 거다.
아스달은 그녀의 수상쩍은 행동 역시 끊임없이 의심을 해왔지만, 목숨값을 빚진 터라 결정적인 증거가 나오기 전까진 침묵했다. 하지만 끝내 증거라고 할 만한 것은 잡지 못했다.
결국 제가 책임지고 옆에서 지켜보다가 유사시에 그녀를 저지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 정도 책임은 져야 한다. 그가 사람이라면.
그를 늪지대 앞까지 끌고 온 유안나는 꼭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눈빛부터가 달랐다.
전에는 생명력이 하나 없이 무기력했다면, 지금은 생기와 자신감이 차고 넘쳐흘렀다.
“성녀님이 미끼가 되는 건 동의하지 않는다고 했을 텐데. 차라리 내가 하겠네.”
그의 만류에도 유안나는 느긋하게 웃음을 지었다.
“유인하는 방법을 알아서 제가 하겠다는 거지, 저 혼자 미끼가 된다고 한 적은 없어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아스달은 미간을 좁혔다. 그럼 저더러 미끼가 되라는 말인가?
“저하께서도 저와 같이 행동하시는 게 좋아요. 마물을 유인해서 늪으로 자빠트릴 거거든요. 늪에 빠진 마물들을 밟고 지나가는 거예요.”
“미쳤군.”
“네. 미친 방법이죠. 한 번만 삐끗해도 죽을지도 몰라요.”
유안나는 웃으며 순순히 인정했다.
“하지만 다른 방법 있으신가요?”
그녀의 물음에 아스달은 답할 수 없었다. 지금 며칠을 이 늪 앞에서 어쩌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늪이 끝나는 지점까지는 거리가 꽤 될 텐데. 성공할 가능성이 있기는 한 건지 모르겠군.”
아스달은 회의적인 얼굴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이러나저러나 죽는 건 매한가지일 테지만, 이건 자살행위가 될지도 모르겠다.
“이게 망할 꼬맹이를 엿 먹이기 가장 좋은 방법이기도 하고, 우리가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고…….”
“망할 꼬맹이? 그게 누구지?”
아스달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계속해서 반문하자 유안나가 예쁘게 눈웃음을 지었다.
“나중에 설명 드릴게요.”
그러더니 지난밤 그가 화살로 죽인 늑대 한 마리를 데려와 날카로운 돌칼로 사체를 분해했다. 그리고는 검은 피를 자신의 온몸에 잔뜩 묻혔다.
그 모습을 보고 아스달은 다소 섬뜩한 기분을 느꼈다.
“역시 위험해. 자칫 우리 둘 다 죽을 수도 있어.”
“그러니 꼭 성공시켜볼게요. 제가 발이 빠른 거 아시죠? 마거릿처럼 생존력이 뛰어난 건 아니지만, 요령이라면 자신 있거든요.”
그녀의 말이 맞다. 민첩함과 순발력은 그녀가 그보다 나을 것이다.
‘그래도 미친 짓인 건 맞아.’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아스달은 옅게 땅이 진동하는 걸 느꼈다. 때마침 마물들이 모여드는 것 같았다.
“제가 마물들을 유인할 테니 저하께선 저를 엄호해주세요. 그 화살로.”
마음에 드는 계획은 일단 아니었다. 아스달은 미간을 모으고 그녀를 빤히 쳐다봤으나, 오래 머뭇거릴 시간은 없었다. 금세 마물들이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아스달은 하는 수 없이 근처 지형을 빠르게 훑었다. 그런 뒤에 수풀 사이로 숨어 활시위를 당기며 대기 자세를 취했다.
늑대형 마물만 나타난 게 아니라 타란튤라나 두더지형 마물 등, 종류가 다양했다. 이제 서식지 구분은 완전히 무의미해진 듯 보였다.
거기다가 파도처럼 떠밀려오듯 달려드는 마물의 머릿수도 엄청났다. 저것들을 전부 늪지대로 밀어 넣으면 늪을 가득 메울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였다.
유안나는 예정대로 늪지대 바로 앞에 섰다. 그리고 마물들이 코앞으로 다가올 때까지 서 있다가 그것들이 저를 향해 입을 크게 벌렸을 때, 빠르게 몸을 숙이며 피했다. 엄청난 순발력이었다.
그녀의 계획대로 두어 마리의 늑대형 마물이 늪지대 위로 추락했다. 움직임이 다소 둔한데다가 몸집이 커다란 오랑우탄형 마물들은 늪지대의 징검다리로 이용하기 아주 좋은 놈들이었다.
아스달은 적당히 그녀의 가까이로 다가간 마물들을 화살로 쏘아 죽였다. 그러던 중에 성큼성큼 그에게로 다가온 유안나가 그의 멱살을 쥐었다.
“뭐, 뭐야?”
그가 당황하며 외쳤지만, 유안나는 답 없이 그를 질질 끌고 뛰었다.
“말할 시간 없어요, 뛰어!”
아스달은 그녀에게 멱살이 잡힌 채로 늪에 빠져 가라앉는 마물들의 몸통을 밟고 뛰었다.
그들의 뒤로 그들을 쫓아 마물을 밟고 달려오는 놈들 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마물 반이 우수수 쏟아졌다.
“제길!”
정말 말도 안 되는 계획인데, 나름 효과가 있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다.
아스달은 유안나에게 끌려가는 와중에도 화살을 꺼내 활시위를 당겨 다가오는 마물을 쏘아 죽였다.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되어 고립되자 유안나가 그의 멱살을 잡아 겨 험악한 얼굴로 소리쳤다.
“제가 하는 거 보고 따라할 수 있어요?!”
“뭐?”
“따라 해요!”
그녀는 제게로 달려드는 늑대형 마물을 보며 몸을 숙인 뒤, 놈의 배를 발로 걷어차고는 늪 위로 떨어지는 놈을 밟았다.
그리고는 멀리서 그녀를 향해 뛰어드는 마물을 피해 늪으로 떨어지는 마물의 몸통 위를 징검다리처럼 밟으며 이동했다.
“제기랄, 그걸 어떻게 따라……!”
그러나 아스달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오랑우탄 마물이 그를 향해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살기 위해선 해야 한다!
그는 민첩하게 몸을 숙였다. 놈의 육중한 몸체가 늪을 향해 기울자 발로 밀어 놈을 밟고 올라섰다.
두어 번 그런 짓을 반복하며 아스달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제 겨우 3분의 2가량 지나온 것 같았지만, 아직도 3분의 1이나 남았다.
이제는 마물들도 주춤거리며 다가오지 않았다. 유안나와 달리 그는 마물의 피를 뒤집어쓰지 않았기 때문에 놈들이 이성을 잃고 달려들지는 않았다.
결국 아스달은 늪지대에 고립됐다.
그마저도 발밑에 있는 마물이 거의 반 이상 잠겨서 곧 있으면 그조차도 늪에 잠겨들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