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봐, 마거릿. 아나타의 마법진이 발동했을 텐데, 뭘 봤지? 그거 말해주면 도와줄게.”
함께 알레아 섬을 만들고 실험을 했으면서 뒤늦게 그를 배신한 자신의 누이, 아나타. 그녀는 배신하기 직전, 이 벙커 지하에 의문의 마법진을 새겨놨었다.
그는 손댈 수가 없던 마법진이었다. 마거릿은 어떻게 했기에 그녀의 마법진을 발동시킬 수 있었는지 그게 궁금했다.
그녀의 영혼과 유안나가 쓴 책, 그리고 마법진. 이 세 가지의 조합인가.
‘차원의 틈으로 다른 영혼을 데려온 게 아나타의 계획일 수도 있겠군. 무슨 계획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흥미로워.’
그런 추측을 하며 마거릿에게 재차 대답을 종용했지만, 당연하게도 심각하게 중독된 그녀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제나스는 하는 수 없이 그녀를 안아 들고자 허리를 숙였다.
그런데 그때 내내 숨어서 눈치만 살피던 은색 뱀이 용기를 냈는지 마거릿의 머리맡에서 튀어나왔다.
화아악-
그러곤 그를 향해 불을 뿜었다.
은색 뱀은 제 주인에게 손도 대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듯 날 선 경계를 보였다. 덜덜 떨면서도 주인을 지키려는 것이, 용기 하나는 가상해 보인다.
제나스는 가만히 뱀을 쳐다봤다. 각인이 된 놈이라 다른 마물들처럼 정신을 지배해 몸을 빌리지는 못하지만 위협 정도는 가능할 것이다.
역시나 그의 붉은 눈을 보고 놀란 녀석이 경기를 일으키며 마거릿의 머리맡에 다시 얼굴을 숨겼다.
‘까불긴.’
제나스는 피식 웃음을 짓고는 마거릿을 안아 들었다. 그러자 마거릿의 몸이 가뿐하게 그의 품안으로 안겨든다.
그녀는 지나치게 가벼웠다. 안쓰러울 정도로.
‘뭐. 제대로 먹은 게 없을 테니. 당연한 거지만.’
제나스는 콧노래를 부르며 마거릿을 안은 채로 다시 계단을 올라갔다. 은색 뱀이 눈치를 보며 소심하게 그의 뒤를 따라왔다.
그에게 안겨 있던 마거릿이 손을 뻗어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는 저도 모르게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하아.”
그녀가 이윽고 그의 어깨에 뺨을 묻었다. 뜨거운 숨결이 후드 자락을 파고들어 그의 살결에 스친다.
제나스는 흠칫 놀랐다가 이윽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어깨에 팔을 두른 마거릿이 떨어지기 싫다는 듯이 그를 더 꽉 끌어안았다.
“싫어…….”
그녀가 칭얼거리듯 중얼거리며 연신 달뜬 숨을 뱉었다. 그리고는 그의 목덜미에 뺨을 문질렀다.
제나스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는 고개를 슬며시 기울이고는 삐딱하게 마거릿의 발그레한 얼굴을 쳐다봤다.
“마거릿, 이러면 좀 곤란해.”
제나스가 나직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러나 마거릿은 말없이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그의 목을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녀가 괴로운 울음을 터트리며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연신 고개를 저었다.
가느다란 몸이 옅은 발작을 일으키듯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가지 마, 제발…….”
마거릿은 간절하게 그의 살결을 찾아 더듬거리는가 싶다가도 울음을 터트리기도 했고 고통에 찬 신음을 뱉으며 괴로워하기도 했다.
“너, 내가 누군지 알겠어?”
그의 물음에 마거릿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걸 파악할 정신은 없어 보였다. 그의 질문을 제대로 듣고는 있는 걸까.
제나스는 그런 그녀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봤다.
마물의 눈으로 과거 마거릿 일행이 텐타티오넴 꽃에 중독되어 어떻게 미쳐가는지 보았었다. 이렇게 눈앞에서 그 고통을 보는 건 처음이었지만.
“심각하긴 하네.”
그렇게 중얼거리던 제나스는 마거릿이 숨넘어갈 듯이 발작하는 걸 보고 얼떨결에 그녀를 끌어안았다.
체온이 닿고 살결이 닿자 조금 진정이 된 모양이다. 그녀가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기대고 숨을 헐떡거렸다.
제나스는 그녀를 품에 안고 아이를 달래듯이 그녀의 등을 쓸어내리며 진정시켰다.
“내가 지금 뭐 하는 건지.”
본인이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 그런 말을 중얼거렸지만, 그럼에도 마거릿을 어루만지는 손길은 쉼이 없었다.
이게 또, 하다 보니 마거릿의 반응을 살피는 재미도 들려서 텐타티오넴을 더 들여놔야 하는 건 아닌가 제나스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아니다. 이것 때문에 마거릿이 성녀처럼 실험을 망쳐버리면 곤란하지.”
거의 성공 직전이었는데, 회귀 게이트가 열리는 바람에 다시 제로부터 시작된 실험이다.
그간 수백 명의 마력을 모아 실험을 성공시켰고 차원의 문을 열 수 있는 마력도 거의 다 모았다.
마지막 한 방만 있으면, 이 지긋지긋한 실험도 끝이다.
“그러니 협조 좀 해줘, 마거릿.”
제나스는 괴롭게 일그러진 마거릿을 보며 비딱하게 웃었다.
실험이 모두 끝난 뒤에 그는 제 후손의 육체를 차지하고 자신의 펜던트를 되찾을 것이다. 그러면 차원을 지배하는 것도 가능할 정도의 힘을 얻겠지.
그 정도의 능력은 가져야 그간의 세월이 보상이 되지 않겠는가.
“뭐. 네 영혼이 뭐든 그건 이제 중요하지 않아. 덕분에 더 재미있는 실험이 될 것 같아서.”
그렇게 말하며 제나스는 품 안에 안긴 마거릿의 콧잔등을 손가락으로 톡 튕겼다.
그리고 그때,
“너 누구야.”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나스는 흘끗 고개를 들었다.
벙커의 입구, 계단 끝자락에 은발을 한 남성과 흑발의 남성이 서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에녹과 카이든이었다.
“뭐야, XX. 저거 그 망할 꼬맹이랑 닮았는데?”
오랜 세월 기다려온 저와 상성이 잘 맞는 후손은 매우 건방졌다. 제나스는 피식 웃음을 짓고는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못해 미안하군. 이게 본래의 나라서.”
“뭐야, 제나스라고? 대체 몸은 어떻게 한 거야?”
카이든이 와락 인상을 구기며 물었다. 그 사이 에녹은 제나스를 매섭게 노려보다가 조용히 검을 빼어들었다.
“수상쩍은 인물과 구태여 대화 나눌 필요 있나. 무력으로 제압하는 게 좋겠군.”
날카로운 칼날이 번뜩이는 걸 보고도 제나스는 느긋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마거릿이 너희를 속였다고 이야기해줬잖아. 그런데도 아직도 마거릿을 믿나 보군? 이 아이는 너희가 아는 마거릿이 아닌데.”
제나스가 품에 안고 있는 마거릿을 고갯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의 고갯짓을 따라 마거릿에게로 시선을 다시 내린 에녹의 얼굴이 기어코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에녹은 검을 들고 있었지만, 제나스가 마거릿을 안고 있는 탓에 함부로 공격을 감행하지는 못했다.
널찍한 어깨에 그림자가 진 탓인지 에녹은 유난히 더 거대하고 사나워 보였다. 진득하게 일렁이는 금안은 타오르는 불꽃보다도 더 위협적이다.
“그걸 왜 네놈이 판단하지? 판단은 우리가 해.”
에녹은 꼭 마치 이로 말을 짓이겨 씹듯이 대꾸했다.
오랜 세월 살아온 그조차도 일순 주춤거리게 만들 정도로 대단한 위압감을 뽐내는 사내를 보고 제나스는 잠시 감탄했다.
의심의 씨앗을 심는 것이 목적이었는데, 이 남자들에겐 그다지 효과적으로 적용되지 않은 듯했다.
‘다른 피실험자들은 이렇게 하면 금방 분란이 생기던데.’
제나스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저 남자는 마거릿에게 미쳐 있었다.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한 상태다. 그건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다.
‘재미있군.’
제나스가 기억하기로 눈앞의 두 남자는 시간이 돌아가기 이전엔 마거릿에게 관심도 없었던 것은 물론, 여자와는 담을 쌓고 지낸 사람들처럼 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녀에게 미쳐 있다?
‘아니, ‘마거릿’이 아니라 정체 모를 다른 여자인가.’
제나스는 품에 안겨 있는 마거릿의 벌건 얼굴을 다시 한번 흥미롭게 내려다봤다.
그녀가 고양이처럼 그의 목을 끌어안고 연신 어깨에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절대로 그를 놔주지 않겠다는 듯이 끌어안는 팔에 힘을 준다.
그 모습을 보고 제나스가 에녹과 카이든을 향해 어깨를 으쓱여 보인다.
“마거릿은 너희보다 내가 더 좋은가 본데.”
카이든이 제나스를 금방이라도 갈기갈기 찢어발길 것만 같은 눈빛을 하고는 스산하게 웃었다. 제나스의 것보다 조금 더 날카로운 그의 붉은 눈이 위험하게 번뜩였다.
“XX, 난 무조건 마거릿이 하는 말만 들을 거야. X까. 새X야. 마거릿 내려놔.”
제나스는 마거릿을 안으며 그들 보란 듯이 그녀의 등을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어쩌지. 나도 마거릿에게 관심이 많은데.”
“저 개XX가……!”
카이든이 참지 못하고 제나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제나스는 가뿐한 동작으로 계단을 내려오며 카이든의 공격을 피했다.
그 덕분에 마법진이 그려진 장소로 다시 돌아오게 됐다.
제나스는 뒤를 한 번 돌아본 뒤 쯧, 하고 혀를 찼다. 그리곤 계단 위에서 경계 태세를 갖춘 카이든과 에녹을 올려다봤다.
“우리 후손님은 입이 상당히 거칠군. 후대에는 예절 교육 같은 걸 안 시키나 봐. 나는 로하데 가문을 그렇게 키우지 않았는데.”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에녹의 날카로운 검날이 팔뚝을 스쳤다.
제나스는 쓰라린 팔의 통증을 느끼고 미간을 좁혔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고통이다.
“더 주기 싫어지는데.”
제나스는 성가시단 얼굴로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곳에서 이 이상 버티는 건 그에게도 한계였다. 하는 수 없이 그는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그러자 카이든과 에녹 앞으로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은색 뱀도 이쪽으로 넘어오지 못하고 방방 뛰었다.
하지만 불길은 마력에 의한 것이라 금방 꺼질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불길이 꺼지기 전에 떠나야 했다.
제나스는 마거릿을 다시 아나타의 마법진 위에 천천히 내려놨다.
그녀가 몸부림치며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다.
그걸 보는 그의 기분은 다소 묘했다.
실험체와 이렇게 직접적으로 접촉해본 건 처음이었다.
처음 이 섬을 만들고 다른 마법사들과 함께 이 섬에 자발적으로 갇혔을 때, 아나타가 그에게 한 말이 있었다.
‘실험자는 직접적으로 만나지 마. 심리적으로 그들에게 동조하거나 동화되어 버리니까. 그러는 순간 끝이야. 그들을 죽일 수 없게 된다고.’
그런 말을 하던 아나타는 유안나에게 동조해버리더니 기어코 섬에 갇혀 천년 동안 협력해온 그를 배신했다.
그는 아나타와 다르다. 아나타와 다르게 그에겐 천년의 시간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으니까.
“마거릿. 이제 진짜 놔야 해.”
그가 마거릿의 손을 억지로 떼어내자 그녀가 울음을 터트리며 또다시 발작하기 시작했다. 호흡곤란이라도 왔는지 피가 쏠려 붉어진 얼굴을 하고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하지만 더는 마거릿을 도울 수가 없었다. 마력을 완전히 소진한 제나스는 금세 다시 어린아이 몸으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성인의 모습으로 돌아와 조금 들떴던 기분도 싸늘히 가라앉았다. 아쉬운 한숨이 새어 나왔다.
“미안해, 마거릿.”
제나스는 괴로워하는 마거릿을 마법진 위에 내버려 둔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